380화.천마강림(天魔降臨) (5)
그것은 분명한 빛이었다. 형형한 광채와 쏟아지고 난 이후 눈에 남는 잔상은 분명 그것이 빛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빛이 아니기도 했다.
애초에 흑(黑)이라는 색깔은 빛을 낼 수가 없다. 빛을 낸다면 그것은 더는 흑이 아니다.
그래서 저 번개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힘이었다.
먹구름을 누비며 쏟아지는 저 흑뢰(黑雷)는 실제 번개보다도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콰콰콰쾅!
세상을 적시던 겨울비가 모조리 증발했다.
거대한 영역을 통째로 파괴하고 뒤집어 버리는 벼락 세례였다. 쏟아지는 벼락은 색깔만 검을 뿐, 실로 보편타당한 번개였으며 당연히 위력도 자연의 번개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한 벼락‘들’이 무려 수백, 수천이다.
퍼어어어엉! 콰르르릉!
부서진 땅이 또 다른 벼락에 쪼개지고, 쪼개진 돌덩이들이 진한 열기에 눌어붙었다.
서량의 표정이 멍해졌다.
‘저것이……!’
철탑처럼 크고 단단한 체격을 갖춘 한 마신(魔神)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휘두르던 검이 하늘로 향해 있으며, 뻗었던 왼손은 자연스레 땅으로 향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지옥을 통째로 옮겨와 현세에 구현한 마신이 분명한데, 저 모습만 보면 도저히 마신 같지 않았다.
마치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서 태어났다던 석가세존의 전설처럼.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향해 스스로를 증명했다던 불교 조종(祖宗)의 신화적인 광경이 이와 같을는지.
번쩍!
이천상의 머리 위로 둥그런 후광이 비쳐 드는 듯했다. 그것은 실로 탱화 속 부처의 후광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천상의 세계에서 석가는 실패한 수행자일 뿐이었다.
적멸(寂滅)의 경지에 이르기 직전에 끌려 내려와 욕망의 불꽃에 몸을 담으니(滅法欲火), 기어이 석가의 깨달음을 포기시키고 육도(六道)의 윤회를 제 손으로 끊어 내(棄悟斬輪) 스스로 부처의 경지를 빼앗아 존귀해졌다.
마신(魔神)이자 악불(惡佛)이었다. 번뇌를 상징하던 욕계의 마신이 부처를 끌어와 도리천(忉利天)의 질서를 뿌리부터 바꿔 버렸다.
그런 그가 외친다.
마신의 입으로, 마신의 혼으로.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걸 드러낸 석가불(釋迦佛)의 탄생게(誕生偈).
이천상의 마황보검은 하늘로 향해 번뇌 가득한 벼락을 끌어왔고, 왼손은 땅으로 향해 지저 깊숙한 곳에서 지옥도(地獄道)의 겁화(劫火)를 끌어 올렸다.
화르르륵! 콰르르릉!
인간의 조막만 한 머리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
천지(天地)의 뇌화가 부딪치며 엄청난 파괴의 현장을 만들어 냈다.
콰콰쾅!
서량이 외쳤다.
“피해!”
재빨리 후방으로 몸을 날리려던 서량이 이를 악물었다.
마동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강인하게 빛나던 눈은 멍했고, 팔다리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것은 호왕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호왕은 경련이라도 일으킨듯 벌벌 떨고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신화의 광경에 압도당한 것이다.
‘제길!’
그럴 만도 하다. 당장 서량만 해도 끓어오르는 공포를 억지로 내리누르고 있었으니까.
파아악!
서량이 마동필을 붙들고 후방으로 몸을 날렸다. 금호는 호왕의 목덜미를 물고 서량을 따라 달렸다.
퍼어어어엉!
치솟는 먼지가 순식간에 흩어지고, 흩어진 먼지 사이로 시커먼 불꽃이 피어올랐다. 눈 깜짝할 새에 대지를 끓게 만드는 지옥의 겁화가 타오른다 싶더니, 곧장 번개가 내려쳐 천지를 뒤흔들었다.
“으아아아아!!”
“크아악!”
놀랍게도 그 절대의 힘 앞에서도 찰극천멸마금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세상의 섭리를 뒤바꾸는 힘은 멸마금진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진법은 아직 진을 구축한 노고수들의 생명력을 전부 끌어다 쓰지 못했다.
주르륵.
광암자의 칠공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다른 노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구파 최고의 비기이자 신선조차 멸하는 무적의 진법을 홀로 부숴 가는 마신의 존재에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극한의 공포가 천문(天門)의 마지막 삼 식(三式)으로의 변형을 앞당겼다.
후우욱!
타오르는 불꽃이 순식간에 진법의 역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쏟아지는 벼락도 빛과 힘을 잃었다.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콰드드드득!
노고수들이 하나, 둘 재가 되어 흩어졌다. 멸마금진의 엄청난 인력(引力)은 이천상이 발하는 뇌화(雷火)까지 끌어와 없애고 있었지만 모든 힘을 소멸시킬 순 없었다.
그 남은 힘이 노고수들의 몸을 재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극히 일부의 힘이지만, 그 기(氣)의 파편만으로도 가히 천하제일의 무공이라 할 만했다.
사르르르륵!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
이윽고 백 명의 노고수들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육신만 사라졌는지, 이 끔찍한 힘의 총화에 혼백까지 소멸해 버렸는지는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그리고.
퍼석!
영산진인의 다리가 날아갔다.
치이이익!
금죽사태의 팔이 연기를 뿜으며 증발했다.
‘사부님.’
핏발 선 눈으로 이천상을 노려보는 광암자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내렸다.
‘천마는…… 죽일 수가 없…….’
퍼어어어엉!
피부가 전부 녹아 버리기 전, 광암자의 몸이 폭발했다.
그렇게 멸마금진을 형성하던 노고수들이 몰살을 당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지이이이잉!
놀랍게도 멸마금진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스스로 힘을 불리고 있었다. 반투명했던 구형의 기막은 이제 시커멓게 물들어 이천상의 뇌화는 물론 대지와 공기, 빛마저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이천상은 짧게 평했다.
“머저리 같은 놈들이군.”
할 수 있으니까 한다.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니까 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건조한 겨울 산에 불을 붙이는 건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장난삼아 던진 불이 거대한 산불로 번질 수 있다.
저들이 한 짓은 그런 짓이었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해 천하를 도탄에 빠트린 것이다.
만약 자신이 죽었다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저 힘이 이곳 일대를 죽음의 지역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적어도 호북 의창 주변의 현(縣) 네다섯 개는 날려 버린 후에야 사그라들기 시작할 것이다.
퍼어어어엉!
치솟는 겁화가 한차례 폭음을 내더니 잠잠해졌다.
치이이익! 파지직!
쏟아지던 벼락도 희뿌연 연기와 그물 같은 전광을 그리다가 멈추었다.
그렇게 천상천하멸가종무는 멈추었다.
지이이이이잉!
거대한 흑색 구체가 조금씩, 조금씩 크기를 불렸다.
이천상이 마황보검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마황보검이 순식간에 마황거로 돌아갔다.
검을 날려 보낸 이천상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척.
한 발을 앞으로, 양손을 전방으로.
번쩍!
이천상의 두 눈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화아아아악!
거대한 흑색 구체의 움직임이 조금씩 늘어지더니, 이내 이천상의 양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서량은 깜짝 놀랐다.
“반천축정?!”
그렇다. 이천상은 군림마황기의 비기 중 하나, 반천축정술로 저 불가해한 힘을 받아 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교주님!!”
제아무리 이천상이라도 저 힘을 받아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상대하는 건 가능하고, 억누르는 것도 가능하지만 인간의 육신으로 고스란히 받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량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상식에서는 그러했다.
이천상의 상식에선 아니었다.
후우우우웅! 번쩍!
“……어?”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휘이이이잉!
차가운 동풍이 희뿌연 아지랑이를 피워 냈다.
쏴아아아아아!
백여 장이 넘는 영역을 건드리지 못했던 겨울비가 드디어 그곳에도 쏟아졌다. 이전보다 더 굵어진 빗줄기가 단숨에 대지를 적셔 놓았다.
‘어디 갔지?’
방금까지 모든 것을 빨아들이던 흑색 구체가 사라져 버렸다.
서량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으음.”
백 장이 훌쩍 넘는 거리였지만 서량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고개를 숙인 이천상이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서량은 이천상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천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를 압축시키고 있는 듯했다.
푸스스스스.
이천상의 몸 주위로 온갖 색상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후우.”
이천상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교주님!”
파아아악!
서량이 순식간에 이천상의 곁에 도달했다. 내외상은 여전히 극심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이천상이 힐끔 서량을 바라보았다.
걱정 가득한 제자의 얼굴을 본 이천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왠지 모르게 그런 웃음이 나왔다.
신선의 힘을 다루는 마신이, 사람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에게 천마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예?”
이천상이 몸을 돌렸다.
“아직까지는 내가 천마라는 것이지.”
천마불패(天魔不敗), 천마불사(天魔不死).
천마는 패배하지도, 죽지도 않는다.
멍하니 이천상을 보던 서량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못 해 먹을 자리로군요, 천마라는 것도.”
이천상이 마황거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서량이 따랐다.
척!
기마에 올라타 있던 천마군의 마인들 모두가 땅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천마군의 후방에 있던 고루마존과 진마대, 저 멀리 동쪽에서 모습을 보인 철검마존과 광마대도 무릎을 꿇었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마인들이 무릎을 꿇고 이천상을 향해 절을 올렸다.
신마경어의 여덟 자구는 외치지 않았다. 그들은 눈앞에서 신(神)의 능력과 경이를 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고작 말 몇 마디로는 신의 대단함을 찬양할 수 없었다.
마황거 앞까지 도달한 이천상이 서량에게 물었다.
“함께 오르겠느냐?”
서량이 마황거를 올려다보았다.
집채만 한 마황거는 실로 엄청난 박력과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화려하네요. 저놈 타고 여기저기 쏘다니면 기분이 참 삼삼하겠습니다.”
“타고 싶다면 타 보아라.”
마교주가 아니면 마황거에 탈 수 없다. 즉, 이천상은 이미 서량을 차기 천마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서량은 이천상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저 자리는 교주님의 자리지, 제 자리가 아닙니다.”
“언젠가 너의 것이 될 자리다.”
“지금은 아니지요.”
서량이 웃으며 호왕을 가리켰다.
“제 자리는 따로 있습니다. 승차감은 별로지만, 나름대로 탈 만해요.”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라.”
“섬서로 가십니까?”
“그럴 생각이다.”
“가서 어떻게 하시게요?”
“가 보면 안다.”
서량이 나직이 침음했다.
“피를…… 보실 생각이십니까?”
우우우웅.
이천상이 마황거를 향해 날아올랐다.
마황거의 휘장 속으로 몸을 감추기 전, 그가 한마디를 남겼다.
“그들이 그것을 원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