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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381화 (381/774)

381화. 집결하는 거인들 (1)

“제법 운치가 있는 자리 아니오?”

“그렇구먼.”

“이 인근에서 그나마 경치가 제일 좋은 자리외다. 가끔 생각이 많아질 때 들르는 곳이기도 하지.”

“천하에 아름답지 않은 경치가 어디 있겠는가. 자네 마음이 평온하다면 창 하나 없는 골방도 무릉도원으로 느껴질 것이요, 마음이 심란하다면 천하제일의 명승지(名勝地)도 지옥 같겠지.”

“마음이라…… 마음의 ‘다름’은 인정하면서도 경치의 다름은 인정하지 않는 거요?”

“허허, 말이 그렇게 되나?”

담사영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담담했다.

“의천맹, 정확히 말하자면 의천맹의 전신이었던 무림맹(武林盟)은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선 안 된다고 하였소이다. 전략적으로 좋은 위치에 지어져도 안 된다고 하였소. 이유인즉, 무림맹이란 무림천하연맹(武林天下聯盟)의 준말이라, 천하를 지켜야 할 무림맹이 특별한 곳을 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지.”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담사영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 아니오? 천하를 경영하려면 응당 목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야지. 그래야 천하를 더 쉽게 관조할 수 있는 법이거늘.”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물론이오.”

“그럴 거라 생각은 했네만, 역시나 자네는 무림맹이 창설된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군.”

“창설된 이유라?”

“무림맹은 무림을 경영하기 위해서 지어진 곳이 아닐세. 외세의 침입,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재해(災害)나 도적들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작게는 개인의 삶을 지키는 것이요, 크게는 천하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것이네.”

“천하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통제가 필요한 법이오.”

“그렇지 않네. 이 드넓은 땅을, 연맹이라고는 하나 어찌 하나의 단체가 통제할 수 있겠는가. 통제를 하려면 마땅히 법(法)과 규범이 있어야 할 터인데, 무림에는 도덕(道德)의 선은 있어도 법은 없다네.”

“그러니 더더욱 강력한 권력이 필요한 것이오.”

“세상 어떤 무림 문파도, 어떤 무림 세가도 권세에 몸을 담아서는 아니 되네.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은 존재들에게 필요한 것은 법보다 도덕과 양심이야. 그것을 잃는 순간, 세상은 지옥이 되기 때문이지.”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생각으로 수백 년을 버텨 왔으니 세상이 이 꼴이 난 것이외다.”

“부인하지 않겠네. 그러나, 끝없이 도덕을 외치고 협(俠)을 이루려 하였기에 악랄한 권력자나 살인마 등의 도적들을 때려잡을 수 있었던 것이네.”

“결국 본인들이 보고 싶은 것들만 보는 족속들이오, 당신들은. 그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생각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 고릿적 냄새나는 과거의 환상에 젖어 변화를 용인하지 않는 이들일 뿐이오.”

“단체의 규범은 분명 중요하네. 그러나 무림맹은 관부가 아니야. 바람처럼 모여서 바람처럼 흩어지는 이들, 그런 이들이 바로 무림에 몸을 담은 강호인이라네.”

“관부는 유명무실해진 세상이오. 멸망해 버리기 직전인 황궁을 지키느라 세상이 지옥이 된 것도 모르고 있소. 그런 세상이라면, 응당 무림이 나서야지.”

“도움은 줄지언정 그 자리를 차지하려 들어서는 안 되겠지. 그래서 자네가 위험한 것일세.”

담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상대 역시 마주 미소를 지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로 사람 복장 두들겨 대는 그 화술은 여전하외다.”

“자네의 그 역병 같은 욕심은 어째 더 심해진 것 같네.”

“하나는 바뀌었군. 몇 년을 앓다가 깨어나더니 입은 좀 더러워진 것 같소.”

“내 혓바닥은 옛날에도 제법 독했다네. 상대가 악인일 경우에는 말이지.”

현천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군.”

담사영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보이시오?”

“그렇다네.”

“일이 바빠서 수련할 시간도 없었소이다. 영약이나 좀 주워 먹고 말았지.”

“그 또한 자네의 욕심 때문이네. 자네의 무재(武才)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네. 만일 자네가 권력욕 따위에 젖지 않고 무(武)에 정진했다면, 지금쯤 우리를 넘어섰을 것이네.”

“만일이라는 전제가 붙은 미래 따위에 목을 매고 싶진 않소만.”

“그런가.”

“무공의 성장은 느려졌어도, 그보다 훨씬 더 커다란 것을 쥐고 있소이다.”

“무공의 성장이 느려졌다…… 이미 말했네만, 자네가 끊임없이 정진했다면 진정 천하제일이 될 수 있었을 걸세.”

“딱히 가슴 뛰는 말은 아니로군.”

“자네가 숨긴 그 비술(祕術) 따위, 필요치 않다는 얘기야.”

찻잔을 들려던 담사영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다시 찻잔을 입가에 댔다.

“비술이라?”

현천의 눈이 깊어졌다.

담사영이라는 존재를 꿰뚫어 보는 그의 눈은 겨울 산에 사는 산신(山神)처럼 맑고 서늘했다.

“천룡궁(天龍宮)의 것인가?”

“…….”

“역시나 그렇군. 어디선가 몇 번 느껴 본 적이 있는 비술인가 싶더니만, 천룡의 것을 빼앗은 게야.”

담사영은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교의 소교주 놈을 죽여야 할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정무쌍신(正武雙神)의 무공은 명실공히 천하제일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담사영은 처음 현천진인을 보았을 때, 그 무공보다 저 선안(仙眼)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세상 만물을 꿰뚫어 보는 눈. 단순히 선도비기(仙道秘技)의 무공을 익혀서가 아니라, 도사로서의 깨달음이 지극하여 육통(六通)의 신이한 능력까지 발휘하는 이가 현천진인이었다.

물론 그 육통지법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육통지법을 자유자재로 썼다면 본인이 혈고에 중독되리라는 것도 알아차렸을 것이며, 끔찍한 미래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통제되지 않는다.

내 권속 안에 들어올 사람도 아니요, 고독(蠱毒)이나 사술로도 강제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묻어 버리는 게 낫다.

그러나 현천진인이 죽으면 무당파의 힘과 명성이 타격을 받는다. 그래서 그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내버려 둔 것이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얻은 것이 많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차라리 당신을 죽였어야 했소이다.”

“그래, 차라리 죽었다면 후회는 남았을지언정 이런 참담한 현실을 볼 일은 없었겠지.”

담사영이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이라도 죽여 드리리까?”

무서운 발언이었다.

그리고 그 발언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묘한 기세가 담사영의 몸에서 번져 나오고 있었다.

스스스스스.

눈에 보이는 듯, 혹은 투명한 듯 괴이한 기운이 안개처럼 번져 나온다.

마치 천룡궁의 호법, 혈목(血木)의 호법이 목기(木氣)를 다룰 때처럼.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거대한 생명의 씨앗을 품에 안고 있는 것처럼.

나무뿌리처럼 이리저리 휘어지며 다가오는 기묘한 기세는 소름 돋도록 차갑고 이질적이었다.

‘굉장하도다.’

현천은 나직이 탄식했다.

‘사이한 무공임이 분명하나 사공(邪功)은 아니고, 마도비학(魔道祕學)과 비슷하면서도 마공은 아니다. 마땅히 천리(天理)를 따르는 힘을 빼앗아 이만한 힘을 응축해 두다니.’

놀라웠다.

담사영이 아무도 몰래 숨겨 놓은 한 수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리도 흉포한 힘을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힘의 크기나 농도를 떠나, 종류가 다른 일곱 가지의 힘을 감추고도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칠요(七曜)의 기(氣). 음양(陰陽)의 일월(日月)과 오행(五行)의 수목화토금(水木火土金)을 제 것으로 담았다…….’

현천이 눈을 감았다.

“천룡궁주를 죽였는가?”

“그럴 리가. 그리 좋은 괴뢰(傀儡)를 내 손으로 부숴서는 안 되지.”

“하면 어찌 천룡궁의 비술을 몸에 담았나? 그것도 그리 많이.”

“방법을 알고 싶은 것이오?”

잠시 말이 없던 현천이 다시 물었다.

“자네, 언제 천룡을 손에 넣었나?”

담사영의 미소가 짙어졌다.

“중원 정쟁(政爭)에 뛰어들기 전이었소이다.”

담사영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무림 정상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그를 도와주는 세력이 없지는 않았다. 중원에 어떠한 연고도 없이, 두 주먹만 들고 정파 무림의 수장이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 이유가 있었다는 겐가.’

현천이 눈을 감았다.

‘새외(塞外)라고 어찌 천하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이런 괴물이 나타난 것도 새외를 오랑캐라 부르며 선을 그은 중원의 오만함 때문은 아닐는지.’

지난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조금만 더 그들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두 팔 벌려 그들을 맞이했더라면 중원은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흘러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법이었다.

현천이 눈을 떴다.

눈을 뜬 현천은, 방금의 그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 늙은이를 죽여 보시겠다?”

담사영의 눈이 빛났다.

현천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절대 그리할 수 없을 것이네.”

“내 힘이 부족해 보이시오?”

“부족해 보이지 않네. 그래도 자네는 날 죽이지 못하네.”

“그 잘난 선안(仙眼)에 그리 보이더이까?”

“아니, 그저 내 힘을 믿을 뿐이네.”

현천이 손을 들어 올렸다.

펑퍼짐한 소매가 흘러내리며 늙수그레한 손과 팔뚝이 드러났다.

우우우우우웅.

담사영의 눈이 깊어졌다.

현천의 손이 은은한 백광(白光)으로 물들었다.

흰빛이었지만 눈에 부담을 주진 않는 색이었다. 마치 무당산(武當山) 산마루에 내려앉은 안개처럼, 조금은 탁하면서도 몹시 고운 빛깔이었다.

‘태극진기(太極眞氣)!’

그렇다.

현천의 손에서 피어나는 진기는 무당의 어린 도동(道童)들도 배울 수 있는 태극심법(太極心法)의 진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평범한 기(氣)가 아니었다.

음과 양, 달이 스러지면 해가 떠오르고 해가 지면 다시 달이 떠오르듯 세상의 이치는 차고 비는 순환의 연속이며, 그것은 곧 태극의 원(圓)과 같다.

그 세상의 이치를 무도(武道)에 받아들여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이룬 현천에게 고급의 무공은 필요치 않았다. 무당 최고의 심법이라는 순양무극공(純陽無極功)의 극의(極意)를 깨우친 그가 돌아간 곳은 순수하기 짝이 없는 어린 도학들의 마음속이었다.

잡티 하나 없는 아이들의 순한 마음, 그 순한 마음을 지켜 주는 무당의 기본 심법.

무당 무공의 시작이자 골조인, 아무나 익혀도 쉬이 익힐 수 있는 태극진기(太極眞氣)가 천하제일의 신공으로 화하여 현천의 혈관 전체를 누비고 있었다.

현천이 손을 휘저었다.

사아아아악!

허연빛의 안개가 담사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를 깨끗하게 지워 냈다.

담사영의 눈이 흔들렸다.

현천이 말했다.

“고차원적인 무도(武道)를 익힌 자일수록 기(氣)는 강해지고 초식은 단순해지며, 복잡한 사고가 아닌 직감의 눈으로 최선의 답을 도출해 내는 법.”

후우웅.

듣기 좋은 바람 소리와 함께 현천의 손에 일었던 태극진기가 사라졌다.

“그러한 경지에 오른 이는 손짓 한 번에 만상(萬象)을 허물고, 단순한 일검(一劍)으로 산봉우리도 벨 수 있다네.”

“…….”

“자네가 익힌 힘은 실로 무섭구먼. 그 힘이라면 능히 나나 땡중을 죽일 수 있겠어. 하나, 가능성과 여유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담사영의 얼굴에 재차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보시겠소?”

“그래 볼 텐가?”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쿠르르릉!

마치 하늘 높은 곳에서 한 줄기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그리고 그 벼락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현천의 몸이 일순 턱 하고 굳어졌다.

“허!”

담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늙은이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현천이 탄식했다.

“실로 대단하구나. 어떻게든 이겨 낼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무슨 말이오?”

“굳이 지금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네.”

“무서운 거요?”

“무섭다기보다는, 자네를 혼내 줄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뭐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현천이 시선을 내려 담사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천마(天魔)가 의창을 돌파했네.”

“……?!”

“멸마금진을 부쉈다는 얘기야.”

담사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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