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집결하는 거인들 (5)
중원 땅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그 안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중 무림에 몸담은 이는 채 한 줌도 되지 않았고, 그보다 백 배는 더 많은 양민이 천하 각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양민에게 무림의 세계란 보이지 않는 별나라 속 얘기일 뿐이었다.
그러나 또한 무림계는 양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나 관부(官府)가 제 역할을 못 하는 이 시대에, 무림은 양민에게 있어 어떤 단체보다 큰 도움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이 세상에 나왔을 때, 천하는 한 차례 요동을 쳤다.
그러나 염라마군이라 불리는 소교주는 무림의 일을 철저하게 무림 안에서만 해결했다. 그 어떤 양민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공손세가를 벌하여 그 지역 양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천마신교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를 단숨에 희석시킨 사건이기도 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말로만 협(俠)을 부르짖을 뿐, 체면 때문에 아무 일도 안 하는 정파 무림인보다 염라마군의 이름을 칭송하기 바빴다.
지금은 또 달랐다.
분명 염라마군은 천마신교를 대표하는 자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차기 교주가 될 인물이 직접 중원에 뛰어들어 천마신교의 인상을 상당히 유하게 바꾼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교주는 다르다.
천마(天魔)는 곧 불교의 조종 석가불(釋迦佛)의 깨달음을 마지막까지 방해했다는 악귀이자 번뇌의 상징이다. 그러한 상징을 신(神)으로 숭배하는 단체의 수장이 직접 세상에 나왔다.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천마신교는 수백 년 동안 중원 무림과 칼을 겨누며 무수히 많은 전쟁을 일으켰던 공포의 조직이었다.
그러한 조직의 수장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이들을 날려 버리면서 북상 중이란다.
무림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양민들 역시 불안에 떨었다. 마교주가 어떤 인물인지를 떠나, 혹시라도 전쟁이 벌어지면 결국 그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이들은 무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양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교주의 북상은 시작일 뿐이었다.
“철혈성주가 움직이고 있다고?!”
“그렇다니까!”
“어디로?”
“섬서로 오고 있다더군. 게다가 철혈성의 비밀 부대가 소림의 백팔나한과 싸웠다는 얘기도 들려오고 있어.”
“배, 백팔나한?!”
“그뿐만이 아니야. 그동안 대외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현천진인께서도 세상에 나오셨다는군.”
“현천진인이라면…… 검신 노사?!”
“그래.”
“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비리의 온상이 된 의천맹을 청소하겠다며 북숭남존(北崇南尊)이 들고일어난 것도 놀라운데, 거기에 마교주의 북상도 모자라 철혈성주까지?”
“그래서 지금 정사지간(正邪之間)의 군소 문파들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있지 않은가. 조만간 전쟁이 터질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
“그리 생각할 만도 하지. 아니, 애초에 정사마(正邪魔)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적은 역사에 몇 번 없었네. 하물며 마교주의 북상 중에 기다렸다는 듯 철혈성주까지 섬서로 오고 있으니…….”
“더 놀라운 소문도 있네.”
“이보다 더 놀라운 소문이 있다고? 그게 뭔가?”
“아직 정확히 확인된 사항은 아닌데…….”
“도대체 뭐길래 그러나? 전쟁 운운한 것도 소문에 불과했잖나?”
“아니, 그건 충분한 가능성이 있어서 퍼진 소문이지. 하지만 지금 들은 소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빙성이…….”
“답답하구먼. 대체 무슨 소문인데?”
“마교군이 무당의 도사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소문일세.”
“헉?!”
“거보게. 믿기 힘든 소문이라고 했잖은가.”
“마, 마교군과 무당이 어찌…… 가당치도 않은 조합인데.”
“어쨌든 자네도 몸 사리는 게 좋을 걸세. 나 같은 봇짐장수 귀에도 들릴 정도라면 그냥 나는 소문은 아닐 거야.”
“자네 말이 맞네. 어후, 이거 또 애들 데리고 처가 신세를 져야 하나…….”
멀리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죽립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기이하군.”
“뭐가요?”
똑같이 죽립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언뜻 보아도 대단한 미녀인 듯했다. 실제로 객잔 안의 여러 사람이 매 순간 여인을 힐끔거릴 정도였다.
“우리야 따로 정보를 받고 있으니 돌아가는 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일반 양민들은 달라. 한데 이곳까지 저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 그것도 그저 뜬소문이 아니야. 저들이 나눈 대화의 대부분이 사실이니, 확실히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지.”
“본래 세상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알아채는 이들이 민초들이라고 배웠어요.”
“네 말이 맞다. 그러나 그것은 육감에 가까워. 상세한 내용까지 알 정도라면, 분명 누군가가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하긴,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리고 그 일을 가능하게 한 자라면…….”
“하오문.”
“혹은 의천맹이겠지.”
“어쩌면 철혈성일 수도 있고요.”
“철혈성일 확률은 낮아.”
“확률은 낮지만, 이 판에 껴 있는 이상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죠. 철혈성주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무척이나 호탕해 보였지만, 심중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괜히 강호삼세의 일익을 담당하겠어요?”
“그래, 그건 네 말이 맞군.”
“의천맹과 철혈성이 손을 잡은 이상, 두 집단은 일정 부분 공동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물론 정보가 확산되는 속도를 보면 하오문일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의천맹이 타격을 받는다?”
“맞아요. 하오문이 의천맹주의 휘하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건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반면 철혈성은 위험 부담이랄 게 거의 없죠. 오히려 그들이 당당하게 나왔을 때 더 긴장해야 해요. 그들은 사파니까요.”
확실히 똑똑하긴 한 것 같았다.
경험이 부족할 뿐, 돌아가는 머리와 안목만큼은 타고났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여기서 경험만 더 쌓으면, 무공이 아닌 지략(智略)으로 천하를 넘볼 인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손님은 언제쯤 오시는 거지?”
“모르겠어요.”
“따로 연락을 받은 건 없나?”
“오늘 이곳, 정오 이후라고만 했어요.”
“답답한 노릇이군.”
“그나저나 의외네요?”
“뭐가?”
“오늘따라 유독 말이 많으신 것 같아서요.”
“…….”
“키킥, 평소에도 이러면 오죽 좋겠어요?”
“시끄럽다.”
“어머, 그 무슨 무례하신 말씀.”
그때였다.
어두운 그림자가 일남 일녀의 시야를 가렸다.
“안녕하시오?”
두 남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무척이나 화려하게 치장한 젊은 청년과 칠 척 거구의 무사가 서 있었다.
젊은 청년의 얼굴에서는 귀티가 흘렀다. 피부가 어찌나 좋은지 여인의 그것처럼 매끈했고,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은 붉었으며 멋스럽게 귀걸이와 팔찌까지 찼다.
게다가 허리춤에는 보석 박힌 패검까지 차고 있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외관이었다.
반면 그 뒤에 시립한 거구의 무사는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처럼 무서운 생김새였다. 말이 호걸이지, 길 가다가 마주쳤으면 산적이라고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험상궂은 외양이었다. 특히나 어깨에 턱 하니 걸친 불그죽죽한 낭아봉(狼牙棒)이 압권이었다.
전형적인 명문의 자제와 그 자제를 지키는 호위무사 조합이었다. 여인은 그 두 사람을 보며 마치 야화(野話) 속에 등장하는 못된 악인 조합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생각은 정확했다.
“용검보(龍劍堡)의 용위라 하오.”
“네, 그런데요?”
청년이 주춤했다.
여인은 여전히 죽립을 쓴 채로 청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죽립이 코 위를 몽땅 가렸지만, 용케도 죽립 너머로 청년을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청년, 용위가 웃으며 물었다.
“실례지만 소저의 방명을 들어 봐도 괜찮겠소?”
“아뇨.”
“…….”
“됐죠? 반가웠어요.”
용위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용검보는 이 지역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의 문파였다. 구파일방, 오대세가에 비빌 만한 세력은 아니지만, 작은 지역의 패주 노릇을 하기에는 충분한 문파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쪽 지역에선 용검보의 비위를 거스르는 자도, 무시하는 자도, 몰라보는 자도 없었다. 그래서 용위는 당황했고 화가 났다.
“용검보를 모르시오?”
“알아야 하나요?”
“뭐, 뭐라고?”
“저는 머리가 나빠서 중원에 산재한 문파들을 속속들이 알진 못해요. 근데 그게 뭐 어떻다고요?”
“…….”
“이만 비켜 주실래요? 옆에 사람 세워 놓고 차 마시는 취미는 없거든요.”
쿵!
객잔 바닥에 강한 진동이 일었다. 그러자 왁자지껄하던 객잔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소리는 거구의 사내가 낭아봉으로 바닥을 내리찍은 소리였다. 표정엔 변화가 없었지만, 상대를 위압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용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용검보를 모른다…… 뭐, 그럴 수 있지.”
수긍이라고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용위가 고개를 쳐들었다.
마냥 귀티만 가득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오만함으로 물들었다.
“모르면 지금부터 가르쳐 주면 되지. 안 그런가?”
“……?”
“일단 그 죽립부터 벗어 봐라, 계집.”
“못 벗겠다, 새꺄.”
“……뭐?”
“뭐 이 새꺄.”
“너 지금 나한테…….”
“귀 먹었냐, 새꺄?”
“……?”
“쓸데없이 소란 만들지 말고 저리 꺼져, 새꺄. 확 불알 두 쪽을 뽑아 버릴라.”
용위가 입을 쩍 벌렸다. 그 뒤에 선 거구의 무사도, 나아가 객잔 안에 손님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여인을 보았다.
여인이 툴툴거렸다.
“진짜 신기하다니까. 꼭 어중간한 새끼들이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설쳐요. 진짜 잘난 놈들은 오히려 주변에 무신경하다는 걸 죽어도 모를 놈들이지. 이 정도면 공식 아닌가?”
“…….”
“야! 그만 짖고 이만 꺼져! 안 그래도 심사가 복잡하단 말이다. 발정 난 똥개 새끼랑 놀아 줄 상태가 아냐.”
용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개 같은 년이……!”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니 극도로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용위를 보며 피식 웃은 여인이 맞은편 사내에게 물었다.
“그냥 넘어갈 상황은 아닌 것 같죠?”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에 일가견이 있군.”
“혹시 몰라서 바로 날려 버리진 않았죠. 말귀 알아들을 머리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대개의 경우 그렇지 않지.”
“하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붉게 달아올랐던 용위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차라리 잘 되었다. 본보로 끌고 가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홀라당 벗겨 주마.”
“그런 취미 없어, 새꺄.”
“이년이!”
용위가 몸을 돌렸다.
“거양! 저 계집을 끌고 따라와라.”
그때였다.
‘어?’
용위가 눈을 부릅떴다.
“……거양?”
낭아봉을 쥔 칠 척 거한, 거양이 멍하니 용위를 보고 있었다.
스으으으으.
용위는 왠지 객잔 안이 추워졌다고 생각했다. 물론 겨울이니 쌀쌀한 건 당연하지만, 잠깐 새에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간 것 같았다.
그리고.
까드드드득!
멍하니 서 있던 거양의 몸이 순식간에 얼음으로 뒤덮였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눈 몇 번 깜빡이는 순간, 정수리부터 내려온 한기가 거양의 몸을 통째로 얼려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얼음 인간이 되어 버린 호위무사를 본 용위가 얼이 빠졌을 때.
“안 본 새에 많이 늘었구나. 무공도, 언변도.”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여인이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하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려 묶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청년이 있었다.
어찌하여 진즉에 발견치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사내임이 분명하지만 여인보다도 아름다운 미모(美貌)의 소유자였다.
청년이 씨익 웃었다.
“잘 지냈느냐?”
여인, 여상린이 죽립을 벗고 일어났다.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