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집결하는 거인들 (6)
죽립을 벗고 일어난 여상린의 미모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천상의 선녀가 실재한다면 바로 이와 같을지 모르겠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는 고혹미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만약 미모로 명성을 겨룬다면 틀림없이 천하제일미에 가깝다는 소리가 나올 외양이었다. 그저 화사하기만 한 것이 아닌,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움도 간직한 그녀의 미모는 그 자체로 무공과 같은 힘을 안겨 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백발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여상린의 미모는 그것대로 충격적이었지만, 청년의 얼굴 역시 대단했다. 어떤 의미로는 여상린보다도 놀라웠는데, 저것이 과연 남자의 얼굴인가 싶을 정도로 고왔기 때문이었다.
전설의 미남이라는 송옥이나 반안이라도 청년에게 비할 순 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깨달았다. 백발 청년과 여인의 얼굴이 묘하게 닮았다는 걸.
‘잠깐, 오라버니라고 하지 않았나?’
여상린이 용위를 밀치고 달려 나갔다.
“오라버니!”
청년, 여강휘가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오랜만…….”
퍽!
“꺽!”
괴상한 신음과 함께 여강휘가 비틀거렸다.
여상린이 콧방귀를 뀌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이제야 와요! 게다가 손님도 계시는데!”
“쿨럭! 아, 아니 나도 나름대로 달린다고 달렸…….”
“시끄러워욧!”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지만 여상린의 얼굴에도 감격이 넘쳐흘렀다.
얼마 만에 보는 혈육인가. 본인 성격도 활기차고 서량 일행 역시 그녀를 잘 대해 주었지만, 가족과는 또 다른 법이었다. 외지에서 가족과 상봉한 감격은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여강휘가 배를 문지르며 혀를 찼다.
“옛날부터 너의 백타(白打) 실력은 발군이었지. 설마하니 그 실력을 이 오라비에게 쓸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흥! 흥흥!”
“쩝, 화났느냐?”
“화 안 났거든요!”
“그런 것치곤 목소리가 지나치게 우렁찬데.”
“시끄러워욧!”
여강휘가 머리를 긁적였다. 새외 북방의 최강이라는 빙궁의 작은 주인이었지만, 혈육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동생 앞에서 쩔쩔매는 여강휘를 보며, 죽립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소?”
“아, 대협은?”
사내, 고구가 죽립을 벗었다.
“천마신교 형법당주외다.”
여강휘가 곧바로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었지요?”
“기억하시는구려.”
“물론입니다.”
“나 역시 빙궁의 소궁주를 다시 뵙게 되어 영광이오.”
순수한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객잔 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끔찍한 공포로 물들었다. 그중 용위의 표정은 실로 압권이었다.
천마신교와 북해빙궁.
강호삼세의 일익이자 무림의 영원한 공포라는 천마신교의 형법당주와, 새외사궁 중 최고라는 북해빙궁의 작은 주인이 나타났다. 그들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사람들인 것이다.
여강휘가 웃으며 말했다.
“그간 이 사고뭉치를 돌봐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상린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고구가 고개를 저었다.
“형법당 뇌옥에 수감된 죄수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외다.”
“하하하! 그것 참 다행입니다. 사실 동생이라서 버텼지, 남이었으면 저도 학을…….”
여강휘는 문득 느껴지는 살기에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여상린이 도끼눈을 하고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농담도 못 하느냐? 눈에 힘 좀 풀어라.”
“못 본 새에 성격이 아주 나빠졌는데요?”
“허험! 어쨌든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자.”
“말을 돌리다니, 비겁해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 비법이지.”
농담처럼 뱉은 한마디지만 여상린은 대꾸할 수 없었다.
오라비는 빙궁으로 돌아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다. 그 상대가 같은 빙궁 사람들이기에 더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오라비가 겪었을 고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여상린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오라비와 괜히 우울한 대화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무공이 엄청나게 성장하셨네요?”
“그래 보이느냐?”
“네. 뭐, 정확히는 봉인을 제법 많이 푼 것이겠지만요.”
“완전히 봉인된 힘으로는 그들과 맞설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꽤 무리를 하셨어.”
“……아버지는 어떠세요?”
“기력을 제법 되찾으셨다. 소교주님 덕을 크게 봤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강휘가 눈을 끔뻑였다.
“모르고 있었느냐?”
“뭘요?”
“소교주님께서 신교 분타를 통해 본궁에 여러 영약을 보내 주셨다. 물론 그중 절반 이상은 아버지께 쓸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나머지는 큰 효험이 있었어.”
“그, 그랬어요?”
“말씀을 안 해 주셨더냐? 나는 너도 다 아는 줄 알았다.”
여상린은 당황했다. 설마하니 서량이 중원 활동을 하면서도 그런 일을 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여강휘가 왼쪽 눈을 찡긋거렸다.
“아버지께서는 괜찮다고 하시더구나.”
“다행이네요.”
“…….”
“……왜 그러세요?”
“괜찮다고 하시더라니깐.”
“네, 들었잖아요. 그래서 다행이라고 했…….”
순간 여상린이 입을 쩍 벌렸다.
여강휘가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사실 아버지께서 네게 서신을 보낼 때 내가 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뭐, 굳이 막을 이유가 없을 것 같았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천마신교가 업은 악명을 제외하면 그만한 사람도 없지 않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그게…….”
“그래서, 소교주님께는 말씀드렸느냐? 아버지께서 소교주님을 사…….”
“크아아압!”
퍼어억!
여강휘의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이번에는 제법 강하게 맞았는지 신음도 흘리지 못했다.
여상린이 어색한 얼굴로 그의 등을 두들겼다.
“자자, 그런 소리는 나중에 하고 이만 나가 볼까요?”
비틀거리는 여강휘를 끌고 억지로 나가려던 여상린은 문득 용위를 바라보았다.
용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신이 건드린 사람들이 천마신교의 형법당주요, 빙궁의 소궁주와 남매지간이었다는 걸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상린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퍼억!
“크악!”
용위가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눈앞이 번쩍! 하는 순간 얼굴에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코뼈가 부러지고 앞니 두어 개가 날아간 것 같았다.
“착하게, 얌전하게, 겸손하게 살아라. 엉?”
그 말을 끝으로 여 씨 남매들이 객잔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고구가 뒤따랐다.
그들이 나가자 얼어붙어 있던 객잔 안의 분위기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이, 이럴 수가! 정말인가?!”
“너도 봤잖아! 저 거한이 순식간에 얼어 버리는 거! 빙궁의 무공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게 가능해?”
“하, 하지만 마교의 형법당주에게서는 딱히 마기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너 마인 본 적 있냐?”
“없지……?”
“세상에, 마교와 빙궁이 손을 잡고 있었다니!”
왁자지껄해진 객잔.
그때, 용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닥치지 못해!”
신경질적으로 울린 목소리에 객잔은 다시 침묵을 되찾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용위는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몰골이 무척이나 참혹해 보였다.
“으아아아!”
가눌 길 없는 울분을 괴성을 내지르며 푼다.
평소라면 당장 용검보에 알려 저들을 쫓으라 했겠지만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설령 저들이 진짜 마교와 빙궁의 인물들이 아니더라도, 백발의 청년이 보여 준 무공은 가히 신기(神技)라 불릴 만했다. 순식간에 사람을 얼려 죽인 괴물을 어찌 잡으라 하겠는가.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저들이 들을까 그조차도 못했다. 내공 고수들의 귀는 수십 장 밖에서 속삭이는 소리도 잡아챈다고 하지 않는가.
한참이나 고성을 질러 대던 용위가 거양을 바라보았다.
선 채로 꽝꽝 얼어 버린 거양은 이미 숨이 멈춘 것 같았다. 하기야 산 채로 얼음이 되어 버렸으니, 기사회생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 개자식!”
쿵!
용위가 거양의 몸에 주먹질을 퍼부었다.
“개새끼! 감히 내가 맞기도 전에 얼어 죽어?! 찢어 죽일 놈 같으니!”
말도 안 되는 욕이었다. 죽은 거양이 불쌍해질 정도로 포악한 짓거리였다.
한참 거양을 후려치던 용위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따끔!
깜짝 놀란 용위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어?!”
바닥에서부터 솟구친 허연 냉기가 빙글빙글 돌며 그의 오른발을 타고 올랐다.
쩌적! 쩌저적!
“허억!”
용위가 재빨리 다리를 뒤로 뺐다.
하지만 늦었다. 냉기는 이미 그의 용천혈을 침투해 오른발, 정강이를 지나 허벅지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한기의 침투 속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빨라졌다. 오른 다리가 통째로 얼어 버리자, 순식간에 왼쪽 다리도 얼었다. 두 다리가 모두 얼어붙기가 무섭게 허리, 상체와 양팔까지도 허옇게 변했다.
허연 냉기가 삽시간에 그의 목까지 타고 올라왔다.
용위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아, 안 돼!”
쩌저저저저적!
순식간에 얼음 동상이 되어 버린 용위의 몸이 기우뚱했다. 거양과는 달리 자세를 잘못 잡아 무게 중심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용위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채애애앵! 푸스스스.
헤아릴 수 없는 얼음 파편이 객잔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기겁한 사람들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객잔을 빠져나갔다.
용위는 그렇게 죽었다.
차기 빙궁의 주인이 될 자의 심기를 거스른 대가는 그렇게 무시무시했다. 혈육에게는 관대하지만, 적에게는 한없이 무정한 여강휘는 상대를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용검보는 사라졌다.
보주는 아들을 잃었지만, 복수보다 생존을 택했다. 언제 마교와 빙궁의 고수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공포가 용검보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짧지만 인상적인 하나의 사건.
그 사건을 시발로, 북천백룡(北天白龍)의 이름이 중원에 퍼져 나갔다.
“한데, 우리는 어디로 가죠?”
“어디로 가기는.”
여강휘의 눈이 서북쪽으로 향했다.
“후계 위에 오를 때까지 뭐 하나 도와 드린 것도 없는데, 지금이라도 한 손 거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씀은?”
“그래, 소교주님께 가자.”
* * *
열흘 후.
‘저기로군.’
서량의 눈에 복잡한 심경이 담겼다.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익숙한 전경이 보였다. 철옹성 같은 지형은 아니지만, 사방 어디에서도 보이는 크고 화려한 성이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아 있었다.
“……의천맹.”
드디어 여기다.
그가 수십 년 동안 드나들었던, 그러나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곳.
살수지왕의 전설이 탄생한 곳이자, 살수지왕의 죽음이 시작된 곳.
언젠가는 꼭 오고 싶었던 이곳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서량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마음이 생각보다 평온했다. 분노가 극에 이르면 손끝이 떨리는 법인데, 손도 떨리지 않았다.
차분했고 담담했다. 담사영을 떠올리면 분노가 일었지만, 왠지 지금은 감정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도착했나.”
모두가 마황거를 바라보았다.
휘리리릭.
마황거의 휘장이 좌우로 열렸다.
“헉!”
허양을 필두로 한 도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사아아아악.
열린 마황거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흉악한 기운이 범람하는 강물이 되어 사방으로 쏟아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마황거 안을 보지 못한 그들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 안에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일말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들의 의심은 옳았다. 마황거 안에 사람은 없었다.
그저 마신(魔神)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의천맹을 바라보던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량아.”
“예, 교주님.”
“한바탕 휘젓고 오겠느냐?”
“……?”
“담사영을 만나고 싶지 않으냐?”
꿈틀.
차분했던 마음이 순간 파랑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