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집결하는 거인들 (7)
아마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면 이리도 가슴이 두근거리진 않았을 것이다.
이천상이기에.
자신의 한(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그 역시 깊은 한을 가져 본 사람이었기에.
그래서 이천상의 말은 서량의 감정을 크게 흔들 수 있었다. 서량이 유일하게 존경하는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감정적인 공유가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뚜둑.
천마도를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별 동요 없던 감정이 성난 파도에 휩쓸린 듯 출렁거렸다.
츠츠츠츠.
감정의 동요는 마기의 발산으로 이어졌다. 그의 몸에서 유황불 같은 마기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마기. 겁화를 닮은 마화(魔火).
구유마공이 저절로 개방되며 무시무시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가 마공을 개방시키고, 마공의 개방이 흔들린 감정을 더더욱 부채질했다. 그렇게 점점 커져만 가는 마기가 삽시간에 천마군을 넘어 진마대와 광마대에게까지 번졌다.
‘음.’
철검마존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마기다. 우리 마존들과는 격을 달리하고 있어.’
중원에 진출하기 전 소교주의 무공은 마존과 비교해도 큰 모자람이 없었다. 기껏해야 한 수 정도 처지는 수준이었다고 할까.
마공을 제외하고 순수한 실력만 생각한다면, 경험 많은 마존들이 소교주를 쉬이 제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소교주가 절대마공을 익혔기에 상성상 이기기 힘들었을 뿐이다.
지금은 다르다.
‘엄청난 성장세다.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리도 지고(至高)한 경지에 도달하셨을 줄이야. 지금의 나로서는 넘보기도 쉽지 않은 경지…….’
그가 옆에 선 고루마존을 힐끔거렸다.
고루마존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다만 살의 넘치는 마기에 젖어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고루 선배는 이미 소교주님께 진심으로 굴복하셨구나.’
본래 고루마존은 후계 싸움이 한창일 때부터 소교주를 지지한 바 있었다. 다만 그때는 지지한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마음을 다해 존경하는 것 같았다.
‘고루 선배는 우리 중 가장 부드럽지만, 동시에 가장 까다로운 사람이기도 하다. 애초에 누군가를 십 할 믿는 사람이 아니야.’
철검마존이 저 멀리, 거대한 마물에 올라탄 서량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벼락을 뿌리는 제석천(帝釋天)도, 악의 군세를 이끄는 아수라(阿修羅)도 날려 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위압감.
철검마존이 눈을 감았다.
‘새로운 신(神)이 등장했으니, 이제 우리도 슬슬 물러날 준비를 해야겠군.’
그나마 후사를 두어서 다행이었다. 비록 가르치기 쉽지 않은 아이지만, 무공에 한해서는 누구보다도 진지한 아이였다. 그만한 인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줄 수 있었으니, 이제 은퇴를 해도 아쉽진 않았다.
다만.
‘두 신(神)과 함께 마지막으로 내 검을 불태워 봤으면…….’
철검마존만이 아니었다.
서량의 마기를 느낀 모두가 전율과 기대에 빠져들었다.
소교주의 성장은 초대, 칠대와 함께 최고라 평가받는 이천상보다도 빨랐다. 소교주와 함께하는 한, 신교의 다음 세대는 분명 중원에 크나큰 이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렇다. 서량은 어느새 그렇게나 성장해 있었다.
그래서 이런 모습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스르르륵.
폭발하는 화산처럼 솟구치던 구유마기가 어느새 잠잠해졌다.
후우우웅.
뜨거운 지옥의 열풍이 사그라들자, 재차 차디찬 겨울바람이 몰아쳤다.
어느새 서량의 얼굴은 평온을 되찾았다.
“괜찮습니다.”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괜찮다?”
“예.”
“너는 담사영에게 갚아 줄 빚이 있잖으냐. 설령 네가 담사영에게 패배한다 한들, 네 뒤에는 내가 있다.”
“압니다.”
“한데 어찌 달려 나가지 않느냐? 어찌 평소의 너처럼 곧장 한을 풀려 들지 않느냐?”
서량이 몸을 돌렸다.
“보이십니까?”
화르륵!
천마도의 도첨에서 피처럼 붉은 불꽃이 한차례 솟구쳤다가 사라졌다.
“군림마황기와는 달리, 구유마공은 과거의 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를 모르는 자가 들으면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그러나 이천상은 서량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하고 싶은 말도, 그의 상태도 알 수 있었다.
“저는 마음에 아무런 동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주님의 말에 감정이 흔들렸고, 동시에 구유마공이 발동했습니다. 죽이고 싶어졌기 때문이지요. 담사영이라는 원수를.”
원수라는 말에 무당의 도사들이 깜짝 놀라 서량을 보았다.
이천상이 슬쩍 고개를 꼬았다.
“한데?”
“교주님께서는 진정 파순(波旬)이십니다. 제가 부처는 아니지만, 정말이지 이번 번뇌는 심상치 않았어요.”
이천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괜히 천마라 불리는 게 아니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렇다면 네 안에 깃든 한은 어디로 간 것이냐?”
“담사영에 대한 분노와 한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저는 더는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려놓았으니까?”
“아닙니다.”
“너는 이전에 분명 이리 말했다. 한을 내려놓았다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 한은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고. 한은 풀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셨습니다.”
“한을 풀 대상이 눈앞에 있다. 앞뒤를 잴 때가 아니야. 전에 말한 바 있듯, 마도(魔道)란 이유 없이 행하는 것이다.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면 될 것을, 어찌 멈춰 선 것이냐.”
서량이 씨익 웃었다.
동시에 이천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으로 무덤덤해 보이는 서량의 얼굴에서, 제자가 자신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량 역시 자각하고 있었다.
“저는 제 한(恨)을 내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언제 풀어야 할지를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바로 그것이다.”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느새 서량의 옆에 나타났다.
‘헉!’
무당의 도사들도, 마존들도.
그리고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천마군 역시 내심 깜짝 놀랐다.
이천상이 서량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이 마치 잘했다며 제자를 칭찬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량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비무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이천상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너는 나를 위해, 네가 세운 계획과 행보를 모두 포기하고 예까지 왔다.”
“…….”
“거기에 ‘서량’은 없었다. 다만 ‘이천상’이 있었을 뿐이지. 그래서 네 한을 풀 장소는 여기가 아니다.”
이천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이 또 어두워지는 듯했다. 이번에는 겨울비가 아니라 눈이 펑펑 쏟아질 것 같았다.
“말하자면 이곳은 나의 무대다.”
그리고 마지막 무대이기도 하지.
이천상은 인간처럼 말했고, 인간처럼 뒷말은 삼켰다. 서량에겐 거침없이 나아가라 말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도 천마가 아닌 한 명의 인간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나의 몫이다. 그 과정도, 결과도 오로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끌 것이다. 그러니 너의 자리라고 볼 수 없다.”
“그렇습니다.”
“돌아갈 때는 마황거에 오르거라.”
권유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명령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럴 자격이 되니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는 것처럼.
너의 권리를 누리라는 말처럼 들렸기에 이천상의 말은 듣기에 편했다.
“교주님은요?”
이천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천마군을 돌아보았다.
“이 앞은 나 홀로 갈 것이다. 천마군과 마존들은 소교주를 지켜라.”
“존명!”
“이곳에 내가 없으니, 소교주가 곧 본교의 책임자다. 당대 소교주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욕계의 선택을 받아 진즉 파순(波旬)의 영역에 올랐다.”
“……!”
“즉, 소교주는 이미 천마다.”
화아악!
천마군 전원에게서 무서운 기파가 일렁였다.
그 무표정하던 천마대군장 엄태경마저도 격동 어린 눈으로 서량을 보고 있었다. 천마라는 칭호를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기에 진정으로 놀란 것이다.
“한 세대에 천마가 둘이었던 적은 없었다. 너희가 앞으로 모실 신은 그렇게나 빠르고 대단하지. 차후 너희는 소교주를 대함에 있어 본교의 십대천마(十代天魔)로 대하도록 하라.”
“성신(聖神)의 명을 받듭니다!”
서량은 눈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바라 마지않던 순간까지는 아니었다. 간절히 열망했던 자리도,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간 투쟁해 온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천상이 자신을 십대천마로 명명하는 순간.
파지지지직.
서량의 몸에서 시퍼런 전광이 피어올랐다.
저 멀리 담사영이 있는데도 구유마공은 타오르지 않았다. 그저 극에 이른 군림마황기가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로서의 위엄을 사방으로 흩뿌릴 뿐이었다.
이것이 지금의 서량이었다.
지독하게 자유를 원했던, 한을 풀기 위해 무턱대고 칼을 뽑아 돌진하던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저 앞에 생애 마지막 목표물이 있음에도.
누구 못지않은 힘을 얻었으매, 모두의 눈을 속이고 홀로 자유를 얻어 천하를 방랑할 수 있음에도.
그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천마신교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각성하고 있었다.
개인의 감정보다도 신교의 새로운 신(神)으로서 자각하는 것을 더 중요히 여기게 되었단 뜻이다.
‘그래.’
이천상은 문득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한을 미혹으로 여길 만큼 성장한 제자에게, 더 이상 담사영 ‘따위’는 생의 일 순위 목표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만약 자신이 북상하지 않았다면 서량은 여전히 자신의 목표를 위해 뚜벅뚜벅 앞만 보고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목표를 뒤로하고, 타인을 위해 움직인 서량은 그 짧은 시간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다.
무당의 도사들을 받아들였을 때는 이제야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잊지 못한 과거의 망령들이 쥐고 흔드는 여한(餘恨)은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고, 비로소 교주를 넘어 천마(天魔)가 된 서량을 보며 이천상은 생각했다.
‘여한이 없구나.’
중원을 가로질러 북상한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는 이유가 필요 없어졌다.
자신의 후계자가 그 짧은 순간 인간으로서 완전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중원 나들이는 성공적이었다. 스스로 무대를 만들었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것으로…….’
우우우우웅.
그때, 이천상이 금호를 바라보았다.
모든 마인이, 무당의 도사들조차 서량만을 보고 있었지만 정작 서량과 영적으로 연결된 금호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특유의 신비로운 눈동자가 은은한 분홍빛을 내뿜었다. 그 눈빛은 마치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가.’
이천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매 속에 가려진 손이, 어느새 절반 가까이 반투명해졌다. 모든 것을 내려놓자 몸이 더 이상 하늘의 유혹을 버텨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서량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일순간 하늘에 가까워지자 사람으로서의 존재감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리우는 사람은 오직 서량뿐이었다.
후욱!
모두의 시선이 일순 이천상에게로 옮겨 갔다.
평온한 미소로 가득하던 그의 얼굴이 특유의 무심함으로 얼룩졌다. 소매 속에 가려졌던 손도 다시 멀쩡해졌다.
“다녀오마.”
호왕에게서 내려온 서량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모든 마인이 서량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다녀오십시오.”
치이이잉!
마황거 안에 놓여 있던 마황보검이 어느새 이천상의 요대에 채워졌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놀랍게도 금호가 따르고 있었다.
이선(二仙)이 의천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