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집결하는 거인들 (8)
“…….”
“…….”
담사영은 말없이 상대를 노려보았다.
당대 정파 무림 정점에 오른 이의 살벌한 안광을 받아 내면서도 상대는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홀짝이며 차를 마시는 모습에서도 기품이 넘쳤다.
잠시 후, 담사영이 물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요?”
“무슨 문제라도 있소?”
“내 분명 반정회를 상대해 달라 요청을…….”
“그렇소. 그것은 요청이었소. 하나 결코 쉽지 않은 요청이지.”
“힘들면 힘들다고 말이라도 하지 그랬소이까?”
“힘들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지 않소?”
“말장난이나 하자고 그 먼 길을 온 게요? 그것도 내게 아무런 기별도 없이?”
송금백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건 아니지.”
“하면 어디 말씀해 보시오. 한참 반정회를 상대하고 있어야 할 성주가 어찌하여 직접 본맹까지 찾아오셨는지.”
“그 말은 잘못된 것 같소. 반정회를 상대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본성이오. 그리고 본성은 지금도 반정회를 상대로 잘 싸워 주고 있소이다.”
담사영의 눈이 깊어졌다.
“동맹을 파기하고 싶은 거요?”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동맹을 파기하고 싶었다면 소리 소문도 없이 의천맹을 쳤겠지.”
물론 그랬겠지.
담사영은 대화를 함에 있어 쓸모없는 내용으로 시간 낭비하는 걸 싫어했다. 그럼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물어보는 것은, 송금백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송금백이 말없이 서신을 내밀었다.
담사영이 서신을 힐끔거렸다.
“이게 무엇이오?”
“읽어 보시오.”
가만히 송금백을 노려보던 담사영이 서신을 펼쳤다.
담사영의 눈이 빛났다.
“섬서로 와라?”
“누구에게서 온 서신인 것 같소?”
담사영이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서신을 내려놓았다.
“그때도 느꼈지만, 성주께서는 마교주를 지독히도 높이 평가하는구려.”
송금백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맹주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오?”
“…….”
“들어서 알고 있소. 정파 무림 최후의 비기가 마교주의 손에 깨졌다고?”
담사영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어지간하면 남들 앞에서 표정 변화가 없는 그였다. 하물며 상대가 자신과 같은 삼세의 주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의 표정에서 송금백은 느꼈다. 담사영이 무척이나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성주의 정보력이 놀랍소이다. 그 비기를 아는 자는 정파에도 많지 않거늘.”
“맹주도 알겠지만, 이만한 자리에 오르면 듣기 싫어도 듣게 되는 정보들이 많은 법이외다.”
“해서, 마교주가 오라 해서 예까지 오신 게요?”
제법 공격적인 어조였다.
송금백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소.”
“사파의 총수라는 성주께서 어찌 그리 가볍게 움직이시오?”
“감당하실 수 있겠소?”
“무슨 말씀이오?”
“나 없이 홀로, 마교주를 감당할 수 있냔 말이오.”
“…….”
“난 마교주를 본 적이 있소. 물론 과거에 한 번 봤을 뿐이니 지금의 마교주는 또 다르겠지.”
“…….”
“소문의 절반만 사실이더라도 마교주는 인간이 아니오. 나와 맹주가 힘을 합친다고 누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듯하오.”
과연 그럴까?
이제 와 담사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마교주에 대한 소문들은 결코 허황된 게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허황된 소문이기에 오히려 낮게 보았지만, 멸마금진을 홀로 박살 낸 시점에서 그간의 소문은 모두 진실이 되었다.
멸마금진은 십대고수 모두가 덤벼들어도 깨기 힘든 진법이었다.
그것도 천문으로 넘어가기 전에 공략해야 약간의 승산이라도 얻을 수 있다. 천문으로 넘어가 버리면 십대고수 모두가 덤벼도 절대 무너트릴 수 없다.
그걸 마교주는 홀로 무너트렸다.
담사영은 열흘 전에 받은 보고서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나 흉흉한 내용인지, 보고서를 떠올릴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록 정보력에선 하오문에 밀리지만, 천지각 산하 정보원들은 하나같이 일류라 할 만한 고수였다. 그런 이들이 이백 장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겁에 질려 실신해 버렸다고 한다.
천지각에서 올라온 정보이니만큼 어떠한 과장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담사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먼 거리에서 일류고수를 공포에 젖게 할 만한 위용을 갖춘 자가 천하에 누가 있겠는가.
‘마교주는 인간이 아니다. 당대 천하제일 수준이 아니라 이미 고금을 논하는 위인임이 분명해.’
누군가를 자신의 머리 위에 두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였다. 그런 그조차, 아직 만나 보지도 못한 마교주를 떠올리면 등골이 시려 왔다.
“모든 것을 초월했소.”
담사영이 송금백을 보았다.
송금백의 얼굴도 어느새 침중해졌다.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한 자요. 무력, 지략, 권력 그 무엇으로도 누를 수 없는 존재요.”
“…….”
“그래서 내가 왔소. 말릴 틈도 없이 마교주를 건드려 버린 건 당신이지만, 이미 세상에 나온 마교주가 나란들 봐줄 거라 생각지 않소이다. 그렇다면 맹주 말대로 힘을 합쳐 저항해 보는 수밖에 없소.”
담사영은 송금백이 진심으로 이 동맹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누가 더 이득인가를 떠나, 그가 진심을 다해 손을 잡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데 정작 송금백이 진심으로 다가오는 이 순간, 담사영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패배감을 맛봐야 했다.
마교라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먼저 동맹을 제안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마교는 그저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오직 천마라 이건가.’
담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단을 내려 주어 고맙소.”
“용단이랄 것까지 있겠소? 동맹은 이미 맺었소. 다만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고자 이 자리에 왔을 뿐.”
송금백이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소. 힘을 합쳐 이길 수 있는 적이라면 다행이고, 이길 수 없는 적이라면…….”
더 희망에 차기 전에 마음을 접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송금백은 속에 있는 말까진 내뱉지 않았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끝없는 패배감에 휩싸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담사영 역시 송금백의 마음을 짐작했다. 그래서 분위기를 환기시킬 필요를 느꼈다.
“해서, 성주가 가져온 패는 무엇이오? 수행원 몇을 빼고는 아무것도…….”
“이것이오.”
송금백이 품에서 금낭 하나를 꺼냈다.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구슬이 분명했다. 그것도 제법 큼지막한 크기의 구슬이었다.
“이게 무엇이오?”
“화신보옥(禍神寶玉)이라고 들어 본 적 있소?”
순간 담사영의 눈에 놀라움이 일었다.
“화신보옥? 설마 흡정(吸精)의?”
“맞소.”
“그 보물이 아직 강호에 존재했단 말이오?”
“정확히는 세 개가 남아 있소. 그중 하나는 잃어버렸지만, 다행히도 최하품이었지.”
“하면, 나머지 둘을 성주가 갖고 있다는?”
“그렇소. 이것 말고 다른 하나도 내게 있소. 한참 운용 중이라 그것도 가져올 순 없었지만.”
담사영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화신보옥은 이름부터가 전설인 보물이자 신물(神物)이며, 동시에 마물(魔物)이기도 했다.
특정 조건하에 영역 내 모든 생명체의 원정지기(原精之氣)를 빨아들이는 보물이 바로 화신보옥이었다. 물론 품질에 따라 빨아들이는 힘의 농도가 다르다.
“최상품이오.”
송금백이 구슬이 든 금낭을 쥐고 흔들었다.
“본성의 사학자(邪學者)들도 좀처럼 건드릴 엄두를 못 내더군. 현재 본성에서 운용하고 있는 화신보옥은 중등품으로, 거기에 기(氣)를 싣는 것에도 애를 먹고 있소이다.”
“하면 이것은…….”
“이 물건 하나로 사대천마(四代天魔)가 모든 힘을 빼앗겼고, 마교는 퇴각했소.”
“뭐라?”
“초대천마 이후 최초로 마도천하를 이룩할 뻔했다던 사대천마. 그 마녀를 죽인 것이 바로 이 화신보옥이오.”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거늘.”
“그럴 수밖에. 애초에 당시에도 극비 사항이었소이다.”
송금백이 금낭을 재차 품에 넣었다.
“이 화신보옥은 사대천마의 생명력을 몽땅 빼앗고도 그 여력이 넘치도록 남았소이다. 아직 제대로 써 본 적은 없지만, 족히 수천 고수들의 힘을 빨아들여도 부서지지 않을 물건이오.”
담사영의 눈이 깊어졌다.
화신보옥의 전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아마 신화와 전설에 대해 통달하지 않았더라면, 그도 저 구슬의 힘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화신보옥을 무려 세 개나 구비하고 있었다…… 철혈성이 어찌 세워졌는지 알겠소이다.”
송금백이 미소를 지었다.
“새삼 맹주의 안목에 감탄하게 되는군. 맞소. 화신보옥의 힘이 아니었다면 선조께서 사파를 통합하지도 못하셨을 것이오.”
근본적으로 사파는 한데 뭉치기 어려운 집단이었다. 대저 사파란 이기적이고, 또한 개인의 안위만을 신경 쓰는 족속들이었다. 애초에 협력이라는 걸 모르는 이들이란 말이다.
그 불가능한 일을 이룬 것이 바로 저 화신보옥이었다. 물론 역대 성주들이 원체 걸출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보옥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보옥으로 공포심을 조성한 것이오?”
“그에 더하여, 고수진을 형성할 수 있었지.”
“…….”
“충성심 가득한 이들만 골라서 고수로 만드니, 점차 체계가 잡혔소. 그러한 이들에게 중간층의 관리를 맡기니 그 뒤는 쉬웠지.”
담사영이 송금백을 힐끔거렸다.
“굳이 귀성의 역사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었던 것 같소만.”
“한배를 탔으니 이 정도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이 대수겠소.”
담사영은 송금백의 말을 전부 믿진 않았다.
어찌 되었든 숨통이 좀 트이긴 했다. 송금백이 가져온 화신보옥이 정말 그리 대단한 물건이라면, 못해도 마교주의 발을 묶어 둘 정도는 될 것이다.
“나는 이 물건 하나에 모든 걸 걸었소. 사람의 힘으로 대항키 어려운 괴물을 상대하려면, 자존심이 상해도 외물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지.”
“그렇군.”
“나는 이리 준비를 해 왔는데, 맹주께서는 어떤 준비를 하셨소?”
담사영은 자신이 준비한 수를 꺼내 들었다.
송금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굳은 그 표정에는 감탄과 혐오, 씁쓸함 등이 뒤섞여 있었다.
“정말이지, 맹주는 손을 뻗는 데에 한계가 없는 사람이오.”
“칭찬으로 듣겠소.”
“상대에게 도박을 강요하다니, 참으로 무섭군.”
“성주처럼 옳은 선택을 한다면 모두에게 좋을 것이고, 틀린 선택을 한다면 다 죽게 될 것이오.”
“지독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로고.”
“성주가 가져온 화신보옥이라고 다를 건 없는 것 같소.”
송금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하나 물어봅시다.”
“무엇이오?”
“잃어버렸다는 화신보옥, 그건 대체 어디에 있소? 아니, 어디에서 잃어버린 것이오?”
“허허, 욕심이 나신 것이오?”
“물론 그렇소. 다만 그보다 궁금함이 더 크오. 화신보옥이 강호에 세 개밖에 남지 않았다면 성주 역시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었을 터인데.”
송금백이 고개를 저었다.
“오경화라는 놈이 있었소. 본성의 철위단(鐵威團)을 맡고 있었지.”
“알고 있소. 저 호남 인근에서였던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소만.”
“나 역시 당시, 호남 인근에서 귀맹의 대장로 정일룡이 죽었다는 걸 알고 있소.”
담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정일룡에게?”
“그렇소. 오경화 그놈이 처음이었소. 충성심 넘치던 녀석이 타락하게 된 유일한 사례였지. 설마하니 맡겨 두었던 화신보옥을 귀맹의 대장로에게 팔아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소이다.”
“하면 지금 그 화신보옥은……?”
“모르겠소. 마교는 아닌 것 같고, 야수궁일 확률이 높다고 보긴 했소. 당시 그곳에서, 야수궁이 만든 마물들의 털과 발톱 일부를 발견했으니까.”
“결국 성주께서도 모른다는 것이로군.”
“그렇소.”
송금백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어차피 떠난 물건, 잊기로 했소. 운명이 아니었던 게지. 다만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마교주란 위협 역시 운명이라면, 가만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소. 그래서 화신보옥을 가져온 게요.”
멸마금진은 실로 구파 최후의 비기라는 말에 걸맞은 위용을 보여 주었습니다. 천문을 개방한 멸마금진은 진법을 운용하는 고수들이 죽어도 제멋대로 힘을 불리는 악마의 진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교주는 땅에서 지옥 불을, 하늘에서 흑색 번개 다발을 끌어와 진법을 상대했습니다. 그 광경은, 마치 신화시대의 신선들끼리 지닌바 용력을 겨루는 듯했습니다. 적어도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광경임은 분명했습니다. 이백 장 밖에 떨어져 있던 정보원들 중 절반 이상이 공포에 실신할 정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