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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389화 (389/774)

389화. 천하를 논하다 (1)

멀어지는 이천상을 보던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대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마군과 진마대, 광마대가 자리에서 일어나 좌우로 흩어졌다.

진마대와 광마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천마군까지 서량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아직 두 부대만큼 유연하지는 못했다. 서량을 진심으로 천마로 모신다기보다는, 이천상의 명령 때문에 움직인다는 기색이 강했다.

서량 역시 천마군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온전히 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지금 당장 마음 깊이 따르지 않는다 하여 그들을 책망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후우.”

뭐랄까.

괜히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한차례 광풍이 몰아치고 지나간 기분이랄까.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서량에겐 이천상과 만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이 십 년처럼 느껴졌다.

천마도를 놓고 땅에 앉은 그가 다시 이천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의천맹 본성 인근까지 도달한 이천상은 점처럼 작아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그의 위엄은 아직 잔영처럼 남아 가슴이 두근거리게 했다.

‘교주님.’

왜일까?

괜히 불안했다. 당금 천하에 이천상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홀로 의천맹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채웠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겠지. 설령 의천맹을 혼자 감당할 수 없을지라도, 빠져나오려 한다면 언제든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이야.’

게다가 금호도 이천상을 따라가지 않았는가.

혹여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면, 서량 역시 즉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때 의천맹으로 가면 된다.

‘아니지. 애초에 그런 생각을 말자.’

이천상은 무적이다. 중원 천하, 유일하게 독보천하를 할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 사람을 걱정하는 것 자체가 그에 대한 모욕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서량의 얼굴에 한결 여유가 깃들었다.

그때였다.

“걱정이 많으신가 봐요.”

서량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 줄기 미소에 넘치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등 뒤에 걸린 한 자루 백색 보검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여검수가 거기에 있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

위홍련이 씨익 웃으며 서량 옆에 털썩 앉았다.

아무리 격의 없는 사이라 해도 상하 관계에선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위홍련의 작태에 가장 놀란 이들은 다름 아닌 천마군이었다.

사아아악.

흩어져 있던 천마군에게서 강렬한 마기가 치솟았다.

차마 소교주 앞이라 고성을 지르진 못하지만, 충분히 살벌한 기세였다. 그 기세가 얼마나 무지막지했는지 고루마존과 철검마존조차 움찔할 정도였다.

하지만 위홍련은 그들의 기세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심장이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내 얼굴 삭은 것 좀 봐라. 잘 지낸 것 같냐? 아주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다녔다.”

“그러길래 왜 고생을 사서 하세요.”

“별수 있나. 원하는 게 있으면 이 악물고 달려야지. 대개 과정이 고통스러우면 결과도 만족스럽더라고.”

서량이 팔꿈치로 위홍련을 툭툭 건드렸다.

“너도 그렇잖아? 모르긴 몰라도 아주 지옥 같았겠는걸?”

“칭찬이죠?”

“칭찬이다. 설마하니 그리 빨리 한계를 뚫었을 줄은 몰랐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는데?”

위홍련의 성장세는 그야말로 놀라웠다.

서량이 신교를 나와 중원을 주유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사이에 오만 사건들이 있었을 뿐, 절정고수가 벽을 깨고 신세계로 진입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걸 위홍련이 해냈다.

그녀는 이제 잔뜩 날이 섰던 기세를 완벽하게 갈무리하고 있었다. 잘 동여맨 호포검, 백호신검의 범상치 않은 예기조차도 전혀 드러나지 않을 정도였다.

신병이기의 기운까지도 자신의 의지하에 통제한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로, 마동필조차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가 마동필보다 강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검에 대한 이해도가 마동필보다 한층 뛰어나다는 것을 뜻했다.

‘확실히 좋은 스승에게 배워야 해.’

만약 위홍련이 서량에게 배웠다면, 이보다 더 강해질 순 있었을지언정 무인으로서 완성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마동필은 알아서 완성을 찾아갈 놈이지만 위홍련은 아니었다. 철검마존은 필시 위홍련의 경지를 높이기보다,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 무도(武道)부터 정립시켜 준 것이 분명했다.

서량이 한 부대가 있어도 가르쳐 주지 못할 귀한 가르침이었으리라.

“축하드려요.”

“뭘?”

“교주님께 정식으로 천마로 공인받으신 거요.”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마냥 축하받을 일은 아니지.”

“하긴, 그렇겠어요. 그만큼 책임질 게 많아질 테니까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성장하긴 성장했어. 거기까지 생각할 줄 아는구나.”

“전에도 바보는 아니었거든요?”

“가지고 있는 것도 써먹지 못했으니 바보보다 더하지.”

“여전하시네요.”

으르렁대면서도 눈은 웃는다. 반가움에 예전처럼 대화를 이어 가고 있지만, 위홍련은 정말 많이 바뀌었다.

“얼마나 지셨어요?”

“지다니? 중원에서?”

“네.”

“글쎄다? 만약 졌다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여전히 자신감 하나는 신화경급입니다.”

“아! 한 번은 졌지. 생사결은 아니고 비무였는데, 그분의 검은 정말 무서웠어. 실력도 실력이지만 깨달음의 격이 달랐지.”

위홍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한테요?”

“검왕 어르신.”

“남궁언!”

“맞아. 정말 엄청난 분이더군. 실력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싸우시는 분이야. 당금 무림에 그런 분은 찾아보기 어려울 거다. 정무쌍신 노선배들을 제외하면, 아마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

“소교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검사이신 모양이네요.”

“말했잖아,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고. 깨달음이 달라. 지금 생각하면 그분은 검객(劍客)이라기보다, 검도(劍道)를 추구하는 도사에 가까운 분이셨어.”

“한번 싸워 보고 싶네요.”

“아서라. 잇자국 하나 못 내 보고 작살날 거다.”

“그만한 고수니까 싸워 볼 맛도 나는 거 아니겠어요?”

서량이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다 좋은데, 조금 아쉽기도 하네. 옛날의 넌 한없이 피곤하기만 한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거든.”

“욕인지 칭찬인지 분간이 안 가네요.”

“칭찬이다. 넌 더 이상 누군가에게 욕을 먹을 만한 녀석이 아니잖아?”

“…….”

“고생 많았다, 정말.”

위홍련은 순간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철검마존을 스승으로 모셨지만, 살아오며 그녀와 가장 깊게 얽힌 인연을 꼽자면 서량을 들 수 있었다. 서량과의 인연은 한두 문장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서량이 자신의 성장과 인격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위홍련으로 하여금 크나큰 희열을 느끼게 했다.

“잊지 않았지? 내가 널 부하로 삼았다는 거.”

“이제 신교의 모든 마인이 소교주님의 부하일 텐데요, 뭘.”

“그래도 넌 다르지. 앞으로도 죽을힘을 다해 쫓아와라. 이제 꽤 써먹을 만해지긴 했다만, 그 정도에서 멈춰선 안 돼.”

위홍련이 피식 웃었다.

“이 정도에서 멈출 거였다면 그 지옥 같은 훈련을 견디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다소 적적했는데, 그래도 위홍련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때였다.

“호오?”

“왜 그러세요?”

“교주님께서 혼자 가신 탓에 적적해지던 차였는데, 너부터 시작해서 과거의 인연들이 하나둘 찾아오려나 보다.”

서량이 남동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미리 반가워하라는 듯, 잘 갈무리된 내기를 슬금슬금 풀면서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단순히 차갑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氣)였다. 한걸음에 얼음 폭풍을 일으킬 것 같은 강렬한 힘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식이 늦어도 너무 늦었네. 이미 후계자를 넘어 교주 자리가 코앞인데 말이야.”

당금 강호를 좌우하는 이들은 의천맹으로.

차세대 강호를 좌우할 이들은 신교군으로.

힘을 다하기 전 가장 강해질 폭풍과, 이제 막 돌풍이 불기 시작하는 생생한 바람이 각자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사백님.”

“…….”

“부디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지금은 이리 앉아 계실 때가 아닙니다.”

“나는 그저 소림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네. 방장은 사질이거늘, 어찌 나의 거동에 그리 신경을 쓰는 겐가.”

“방장이기 때문입니다. 소림을 이끄는 몸이기에 이러는 것입니다. 사백께서 나서 주셔야 쓸데없는 희생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적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또한 나는 방장에게 명령을 내릴 위치가 아니지. 그래서 잠시만 가만히 있자는 것일세.”

“어찌 이러시는 것입니까?”

“하루도 기다리지 못하겠는가?”

혜심이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는 것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기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부디 못난 사질에게 사백께서 전진을 멈추신 이유를 들려주십시오.”

그때, 한옆에서 허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도 될 것이네, 방장.”

혜심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곳엔 남루한 도복을 입은 한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혜심은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혜심이 무당의 대원로를 뵙습니다.”

“허허, 예는 거두시게. 소림의 방장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인사를 받을 만큼 고아하게 살아온 늙은이가 아닐세.”

노도사는 바로 현천진인이었다.

적송이 물었다.

“대충 알고는 있네만, 맹주와 담판을 짓지는 못했지?”

“그리되었다네.”

“이유가 있었는가?”

“신경전을 좀 벌이기는 했네만, 결국 내가 손을 써야 할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네.”

“하면 이천상이?”

“그건 모르겠네. 다만 교주가 멸마금진을 깨부쉈으니, 맹주도 잔뜩 긴장하고 있겠지.”

혜심은 깜짝 놀랐다. 그 역시 멸마금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송의 눈이 빛났다.

“과연……. 이천상 그 녀석, 진정 ‘그 영역’까지 올라선 것이로군.”

“맞네. 그리고 지금쯤 의천맹에 도달했을 것이네.”

“내 그 녀석이 그럴 이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세상이 두려워하는 마의 군주일세. 자네가 가서 막아 주지 그랬나?”

“내겐 그럴 만한 힘이 없네. 바람이 제아무리 세차게 불어 봤자 태산을 움직이게 할 순 없는 법 아니겠나.”

“그도 그렇군.”

적송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 이천상이 의천맹으로 향하는 걸 두고 보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네. 자네나 나나, 제아무리 높은 경지를 쌓았다 한들 결국 인간일 뿐이야.”

현천진인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어렸다.

“그래서 자네도 예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삼세의 균형이 어떻게 될지를 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 아닌가?”

“맞네.”

“잘했네. 적이 빈틈을 드러냈다고 잘 됐다며 공격을 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할 걸세.”

그때였다.

두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네도 읽었나?”

“그렇다네.”

적송이 눈을 감았다.

“드디어 만났군. 이 세대, 천하를 움직이는 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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