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천하를 논하다 (2)
“그렇군요.”
“…….”
“그렇게 갔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슬슬 준비를 하면 되는 건가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교주님의 전언에 있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저 그분의 말을 전하는 전령에 불과할 뿐입니다. 모든 판단은 궁주님께서 하시는 것이지요.”
스르륵.
반투명한 비단 휘장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숙한 육체, 사내라면 눈을 뗄 수 없는 마력적인 외모를 소유한 미녀였다. 이십 대인지, 삼십 대인지 혹은 사십 대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한없이 아름다웠다. 농염(濃艶)했고, 고혹적이었다.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성숙미를 한계까지 가진 여인이었다.
게다가 방 안에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묘한 방향도 흐르고 있었다. 조금은 어두운 방에 은은한 방향과 절색의 미녀가 있으니, 누구라도 가슴이 뛸 만하다.
그러나 그녀 앞에 부복한 호요성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판단은 그저 나의 몫이다?”
“…….”
“과연 대단하군요. 당대 교주가 그렇게 총애하는 군사라더니, 다 이유가 있었어요. 이곳에 와서, 나와 독대를 하는데도 그리 냉철할 수 있는 사내는 정말 몇 없답니다.”
스르륵.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느리지 않은데도 한없이 느리게만 보였다. 신비로운 여인이었다.
침상에서 일어난 그녀가 천천히 창가 쪽에 놓인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심지어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방 안이라지만 지나치게 격이 없는 모습이었으며, 자칫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여인이나 호요성이나 그런 것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탁자 앞 의자에 앉은 여인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어디까지 간다고 하던가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지만, 호요성은 바로 대답했다.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모른다? 그 사람답지 않은 대답이군요.”
“굳이 무언가를 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니까요.”
“그럴 필요도 없는 사람이 굳이 명분을 얻기 위해 기다리고, 피곤하게 중원 땅까지 가로지를까요.”
“거기까지는 제가 들여다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설령 들여다볼 수 있다 한들, 궁주님께 알려 드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여인의 눈이 빛났다.
눈빛이 미세하게 바뀌는 것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호요성의 등이 순식간에 축축해졌다. 마음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몸이 반응해 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알 수가 없네요. 그런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그대들이.”
“…….”
“하긴, 굳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걸 붙잡고 늘어질 필요는 없겠죠.”
여인이 품에서 노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서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괴황지(槐黃紙)로, 술사(術士)들이 부적을 만들 때 쓰는 종이였다. 실제로 여인이 꺼낸 괴황지에는 주사(朱砂)로 기하학적인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여인의 눈이 번뜩였다.
화르르륵!
부적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타오른 부적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괴황지에 적힌 도형이 희뿌연 연기로 남아 허공에 둥둥 떠오르고 있었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엎드린 호요성은 그 광경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느꼈다.
“호오, 흥미롭네요.”
여인의 얼굴에 뜻밖의 기색이 어렸다.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면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애틋한데요?”
“…….”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본인은 지독하게도 이승에서의 삶을 원했지만, 하늘은 그가 세상에 남는 것을 원치 않았죠. 깨달은 이가 십 년을 버틴 것도 유례가 없는 일, 슬슬 하늘로 올라가도 무방할 생의 끈을 제자가 잡아 주었으니 애틋하지 않을 수 없겠죠.”
천재라는 호요성도 지금 그녀가 하는 말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인이 피식 웃었다.
“재미있네요. 서량이란 아이.”
“아이가 아니라 십대천마이십니다. 경어를 써 주시길.”
“어머, 실수했네요. 어쨌든…….”
사라락.
둥둥 떠다니던 도형의 연기가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참으로 재미난 사제지간이에요. 한쪽이 존재함으로써 다른 한쪽도 존재한다…… 무릇 천륜(天倫)이란 그런 것이겠지요. 하나 이런 끈끈함은 혈연이 아니고서야 얻기 어려운데.”
“……?”
“좋아요. 십대천마의 마위(魔位)를 준비토록 하죠. 하지만요.”
“…….”
“과연 그게 지금 당장 필요할까요?”
“예?”
여인은 아무 말 없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연꽃은 진흙에서 자란다. 더없이 아름다운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어나기에 더더욱 감동적이다.
연꽃은 부처의 자비와 지혜를 상징하기도 한다. 더러운 곳에서 자라지만, 활짝 핀 연꽃은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굳이 연꽃만이 아니었다.
대저 신화에 나오는 신(神)이나 신선, 부처들은 제각기 자연의 한 요소를 상징으로 삼기 마련이었다. 제석천은 번개를, 명왕(明王)은 불을, 용왕(龍王)은 수신(水神)으로서 물을 상징으로 한다.
그러나 바로 이곳, 정파 무림의 성지에 나타난 이는 그와 달랐다. 아직 하늘이 되지 못했기에 존재만으로 재해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세상은 알고 있었다. 그가 사람보다는 하늘에 가까운 이라는 것을.
한 송이, 두 송이 굵은 눈이 쏟아졌다. 바람은 불지 않았고, 차오르는 습기는 적당했다.
세상이 고요해졌다. 땅에 쌓인 눈은 잘 녹지 않았다.
소리 없이 쌓이는 눈, 불지 않는 바람.
그 사이에 그가 나타났다.
일국의 황제라도 된 양, 화려하기 그지없는 곤룡포를 걸쳤다. 비록 그 색이 시커먼 빛이었지만 등에는 황금빛 용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관을 쓰지 않은 머리는 제멋대로 흘러내렸다. 중년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도 그의 머리카락은 몹시 부드러워 보이고 윤기가 흘렀다.
사내의 체구는 굉장했다.
칠 척에 이르는 체구에 떡 벌어진 어깨는 산악을 연상케 했다. 그리 큰 체구임에도 걸음 하나하나에선 알 수 없는 기품이 느껴졌으며, 언뜻 산뜻해 보이기도 했다.
스르륵.
눈송이가 점점 그 수를 불렸다. 그러나 큰 눈송이도 사내의 몸에는 닿지 않았다.
마치 대자연과 하나가 되기라도 한 듯, 눈은 그대로 사내를 통과해 버렸다. 아니, 그것은 통과가 아니라 융화일지도 모른다. 사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입김 한 번으로 세상을 얼려 버릴 것 같기도 했고, 그대로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릴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이였다.
등 뒤에 거대한 여우 요괴를 데리고 걸어오는 사내는 그처럼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멀리서 그를 내려다보던 노인은 생각했다.
싸워선 안 돼.
아니, 싸워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니라 애초에 싸울 수가 없는 존재였다.
사람이 아무리 강해도 자연과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격의 문제가 아니라 가불가(可不可)의 문제였다. 세상에 난 생명체는 누구라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다.
저런 자를 죽이려 했다니. 저런 자와 싸우려 했다니.
비로소 노인은 깨닫는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불러왔음을.
인간의 상상으로 동원 가능한 모든 수를 써도 어찌할 수 없는 이가 저기에 있다. 스스로 원하지 않아 하늘에 오르지 않았을 뿐,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에 녹아들어 하나의 이치로 화(化)할 수 있는 자였다.
노인은 생각했다.
대체 왜?
지금의 그로서는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경지였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세상에 묶여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멸마금진이라는 천고의 절진 앞에 찰극천(札克天)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찰나지간 하늘을 극복하여 마를 멸하고 봉해 버린다는 이름처럼, 아주 잠시는 존재할 수 있어도 붕괴하는 육신을 끝없이 유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니, 애초에 저 경지에 들어선 이는 속세에서의 삶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노인은 지독한 공포를 느꼈다.
그 의미 없는 세상에서, 저 사내는 유유히 존재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만큼의 욕심과 얼마만큼의 의지가 있어야 저런 것이 가능한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룩한 경지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정신력이었다.
대체 왜 이곳에 남은 거지?
무엇을 얻으려고? 무엇을 보려고?
아니, 애초에 목적이 있기는 한가?
“물론이다.”
노인이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수십 장 밖에서 걸어오던 괴물이, 어느새 성루에 올라 의천맹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제법이야. 그럭저럭 잘 만들었어. 수성전(守城戰)을 불사한다면, 적어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지킬 수 있겠군.”
괴물이 웃었다.
그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웃음에 노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나 위선으로 똘똘 뭉친 녀석들이야. 겉으로는 만민을 위하지만, 속으로는 구더기를 한 바가지 키우고 있어. 그러니 고작 삼십 년 만에 이런 썩은 내를 풍기지.”
괴물이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그대가……?”
“생각보다 멋진 눈을 하고 있군. 듣던 것과는, 멀리서 보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
“……?”
“이래서 탁상공론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지. 하늘이 내게 속삭여 준다 한들, 내 눈으로 직접 본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하늘이 속삭여 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인은 그 말에 또 한 번 섬뜩함을 느꼈다.
“그 욕망이 기껍고, 목적의식이 기특하다. 늙어빠진 육신에 그만한 욕망을 품고 사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은 아니야. 차라리 마도(魔道)로 왔다면 량이만큼이나 멋진 인재가 되었을 것을.”
노인, 담사영이 입을 열었다.
“천마신교의 교주 이천상, 맞소?”
그러자 저 멀리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다.”
깜짝 놀란 담사영이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마치 검은 안개를 끌고 오듯, 시커먼 곤룡포 자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저 무거워 보이는 곤룡포가 제멋대로 휘날리고 있는 것이다.
‘언제?!’
담사영은 재빨리 성루를 둘러보았다.
없다. 조금 전까지 그곳에 서서 자신을 평가했던 마교주가 사라져 버렸다.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진 것도 귀신처럼 해괴하다. 아니, 어쩌면 마교주는 성루에 올랐던 것이 아니라 그곳에 환상 비슷한 것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굳이 돌아가서 다시 걸어올 필요는 없을 테니까.
환상이든 귀신 놀음이든, 혹은 초고차원적인 사술이든 결론은 하나다.
‘이길 수 없다.’
담사영은 인정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의천맹은 저자를 이길 수 없다.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것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고, 의천맹의 모든 힘을 퍼부어도 저 사내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저 사내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요, 또한 대자연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만을 헤아리는 정파 무림의 총전력을 퍼부어도 이길 수 없는 일인(一人).
독보천하는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정면으로 깨부수는 비인외도(非人外道)의 괴물.
천마신교가 낳은, 아니 수천 년 무림사(武林史)가 낳은 최강, 최악의 무적자(無敵者).
“내려본다라…… 이 나를?”
이천상의 마안이 번뜩였다.
“한 번은 봐주겠다. 두 번은 없어.”
“…….”
“송금백과 함께 내려와라.”
담사영은,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쿠구구궁!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의천맹주 담사영과 철혈성주 송금백이 걸어 나왔다.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마신(魔神)의 등장.
두 절대자는, 한 초월자를 만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을 바로잡았다.
휘이이잉!
어느새 거세진 바람과 그 바람결에 따라 춤을 추는 눈발 사이로.
마침내 강호삼세의 주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