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391화 (391/774)

391화. 천하를 논하다 (3)

"저자가...?"

“그렇습니다.”

천지각주는 전에 없이 공손했다.

담사영에게 보여 주는 예의와는 또 달랐다. 담사영은 그가 충성을 바친

대상이지만, 눈앞의 이 사람은 본시 만인이 따라야 할 위정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저 담사영조차도 이 사람 앞에서는 예의를 지켰다. 권력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무시할 수 있는 핏줄이 아닌 것이다.

“실로 호걸이구먼. 한데........”

삼십 대 장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모르겠네. 체격도 좋고, 뭔가 위압감도 있는 것 같다만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천지각주는 그를 이해했다.

황실의 혈통으로서 나름의 문무(文武)를 닦은 그였다.

하나 학문은 몰라도 무공 방면으로는 무림인의 그것을 따라잡기 힘들다.

일류의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지만, 아직 그의 경지는 일류라 불릴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다. 저 마신의 존재감을.

격차가 너무나도 크기에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마교주의 인간 같지 않은 힘을.

천지각주는 넓은 소맷자락으로 손을 감추었다.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마교주에게 시선을 준 것만으로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저것이 사람인가........'

그는 소위 절대고수라 불릴 만한 사람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당장 담사영만 해도 무림에서 첫손에 꼽히는 고수였고,

지금은 죽었지만 무상(武相) 광혼의 난폭한 기파도 감당키 힘든 수준이었다.

마교주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차원이 달랐다. 이리 멀리 떨어져서,

보는데도 비인(非人)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삼두육비의 괴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또한 대자연에 완벽히 동화된 듯 공기처럼 허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담사영이나 송금백이 힘을 합쳐도 마교주를 이기기란 쉽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한번 보고 싶네.”

“예?”

“직접 대화를 나눠 보고 싶군.”

천지각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 전하. 저자는 무도하다는 마교의 .......”

장한, 주천양(朱天養)이 빙긋 웃었다.

“아네. 자네들이 그리 긴장하는 것으로 보아, 나 정도 무공을 연성한 이들은

느끼지도 못할 만큼 높은 경지의 무인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네.”

“.....예.”

“그래서 더 흥미롭네. 담 맹주의 무공이 실로 천하제일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그에 비견될 만한 이가 철혈성주라고 했거늘, 그들보다 강하다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천지각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중원의 백성으로서 어찌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바꾸려 들겠습니까.

다만 전하의 안위를 생각해서라도 다시 한번 ....”

“아, 당장 보고 싶다는 것은 아닐세.”

“예?”

“저 무림의 절대자들끼리의 대화가 얼추 끝날 기미가 보이면, 그때 한번 보고 싶구먼."

주천양의 눈이 반짝였다.

짙은 호기심과 옅은 긴장으로 범벅된 눈은 무척이나 맑았다.

*

*

*

송금백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그때와 똑같다.”

삼십 년 전, 스치듯 봤던 때의 기억.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보았던 이천상은 그야말로 마왕(魔王)이자 패왕(霸王)이라 할 만했다.

그는 이미 당시에도 무인으로서 완성형에 다다른 희대의 천재였다.

'동시에, 너무나도 달라.”

마치 세월의 흐름을 거부하기라도 한 듯, 외양은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도 무신(武神)이라 불릴 만했지만, 그래도 그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사람이 아니다.

속세의 이치, 세상의 섭리, 이승의 법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멀쩡히 존재하지만, 또한 존재하지 않는 이였다. 대자연의 허허로움과 끝 모를 파괴력이 공존하는데, 진정 사람이 아니라 신(神)을 앞에 두고 서 있는 것 같다.

'대체 어찌하여 이런?!'

담사영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 그였다.

'어찌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천하 무림인 중 자신만큼 도불(道佛)과 먼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해서 등선이니 열반이니,

하는 말 따위는 믿지도 않았다.

이제야 알겠다. 등선과 열반이 뜻하는 진짜 의미를.

동시에 깨달았다. 진정한 등선과 열반에 들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것임을.

그런 불가능을 깨부수고 나타난 전지전능(全知全能)의 마신(魔神)이 눈앞에 있었다.

“오랜만이군.”

송금백은 퍼뜩 놀랐다.

이천상이 무감정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삼십 년도 더 전에 한 번 본 것 같은데.

당시 철혈성의 전투 부대 하나를 이끌고 있지 않았던가.”

송금백이 포권을 취했다.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될 위치에 오른 그가, 성주가 된 이래 처음으로 존경의 예를 취한다.

“신교의 교주를 뵙소, 송금백이라 하외다.”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이 불세출의 마신이 자신을 기억해 주고 있었다.

비록 적이지만 그 사실이 그를 감격에 떨게 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보았던 철혈성의 군세(軍勢)에서, 자네는 전대 성주와 함께 유독 눈에 들어오던

이였네. 언젠가 큰 인물이 될 줄은 알고 있었지.”

“참으로, 감당키 힘든 칭찬이외다.”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온전한 경어는 쓰지 않았다.

하지만 송금백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감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송금백을 보다가 담사영에게로 눈을 돌린 이천상이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앉으시게들.”

눈이 소복소복 쌓인 땅이었다.

언뜻 황량하기까지 한 눈밭은 무림의 절대자들이 앉기에는 지나치게 소박했다.

그러나 담사영과 송금백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명화와 보물로 치장된 방이라고 화려한 게 아니다. 이 세대를 움직이는 최고의 거물들이

자리 잡으니, 황량한 설원도 한순간에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정자가 되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짐승의 몸으로 선계의 문을 연 요선(妖仙)도 있었다.

이천상이 물었다.

“술은 없나?”

담사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술이 필요하시다면 안으로 드시는 것도 괜찮을 거요. 좋은 술과 불을 잘 지핀 방이.......”

“저기 있군.”

담사영과 송금백이 고개를 돌렸다.

이천상의 시선이 향한 곳은 의천맹의 성루 쪽이었다.

그곳에 도열한 수많은 무사들이 잔뜩 경직된 채 이곳을 보고 있었다.

“어디에......?”

그때였다.

투우웅!

무사들 중 몇몇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수통이 일순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담사영의 눈이 흔들리고 송금백의 낯빛이 변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수통들이 어느 순간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이내 절대자들 앞으로 하나씩 떨어졌다.

이천상이 수통을 열었다.

“싸구려 백주(白酒)라? 나쁘지 않군.”

“드시게.”

그는 거리낌 없이 술을 한 모금 넘겼다.

하지만 두 사람은 술을 마실 만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이럴 수가!'

내가고수는 경지가 깊어질수록 천지자연의 기(氣)를 점점 더 유연하게 다룰 수 있기 마련이다.

단전축기(丹田畜氣)로 개인에게 종속된 기를 다루는 것은 삼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넘어 타인, 혹은 외물을 기로 감싸 조종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바로 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야만 허공섭물(虛空攝物)이라는 기예를 쓸 수 있다. 담사영과 송금백은 천하 무림의 정점에 서 있는 무신(武神)들이니만큼, 남들이 요술(妖術)이라 오해할 만큼 수준 높은 허공섭물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천상이 보여 준 한 수는 격이 달랐다.

족히 칠, 팔십여 장은 떨어진 거리, 그것도 성루에 도열한 무인들의 허리춤에서 원하는 것만 끊어서 끌어왔다.

'말도 안 돼!'

이천상을 보자마자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한 수를 보자, 피부로 깨닫게 되었다.

자신들이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늪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자칫하다간 단 일검에도 죽을 수 있다. 담사영과 송금백은 십대고수로 꼽힌 이래 처음으로 무기력함을 느꼈다.

“의천맹주.”

담사영이 움찔했다.

이천상은 특유의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법 재미있는 선물을 보냈더군.”

“...... "

“그렇게 날 보고 싶었나?"

담사영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재미있는 선물이란 다름 아닌 무색사의 수장 강우창을 말하는 것이리라.

살왕이 사라진 지금, 명실공히 천하제일살수라 불릴 만한 이가 바로 그였다.

“그게 목적이었다면, 소원을 이루었군. 덕분에 내가 세상에 나왔으니.”

“왜 말이 없지?”

무심하기 짝이 없던 이천상의 눈에 은은한 마기가 실렸다.

“자네가 그리도 원했던 상황이 아닌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으니, 이제는 웃어도 좋을텐데.”

담사영은 생각했다. 이런 상황을 바라진 않았다고,

자신은 천마신교의 교주가 세상에 나와 천하를 뒤흔들길 바랐지, 모든 것을 초월한

신을 불러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힘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조차 없고, 심지어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재해(災害)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후우.”

나직이 한숨을 토해 낸 담사영이 한 모금 술을 넘겼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독한 백주가 정신을 깨워 주었다.

"분명 이것은 내가 원하는 상황이었소.”

담사영이 눈을 빛냈다.

“그러나 내가 원했던 것은 교주의 분노였소.”

"알고 있네.”

“한데 이렇게 뵈니, 교주께서는 그리 화가 나진 않으신 모양이오.”

“실망은 했지.”

“실망....?"

“칼 한 번 휘둘러 보기는커녕, 마주하자마자 기절해 버린 풋내기 살수를 보냈다는 것에.”

“!"

“내가 자네였다면, 차라리 전쟁을 벌였을 걸세. 위험 부담은 크지만 진정 난세를 바랐다면 남의 손이 아닌 내 손으로 정국을 주도했을 테니까.”

담사영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전쟁이란 것은.....”

“명분이 중요하다는 말을 할 생각이라면 다시 한번 실망이라는 답변을 주고 싶군.

애초에 본교와 자네들 맹성(盟城)은 평화로이 화합할 수 없는 사이야.

그런 사이에 명분을 따져 가며 일을 벌이고 싶었나?”

“진정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직접 움직였어야 했네. 그래서 자네는 삼류야.”

순간 담사영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혐오의 기색을 드러낸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자신에게 별 감흥이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삼류라 말하는 이천상을 보며, 담사영은 전에 없는 분노와 분노 이상의 두려움을 느꼈다.

천하에서 유일하게 자신더러 삼류라 말할 수 있는 자.

그런 말을 하고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는 자가 있다는 사실이 담사영을 두렵게 했다. 자신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이자 앞에서는 그 모든 노력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절망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어찌 기다리신 것이오?"

이천상이 송금백을 돌아보았다.

송금백 역시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담 맹주가 교주께 살수를 보냈소. 그것은 전쟁은 아니나, 전쟁의 시발(始發)로 부족함이 없는 행위였소."

“그렇지.”

“한데 교주의 말씀을 들어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구려. 만일 교주께서 세상에 나올 생각이 있었다면 살수를 기다릴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그렇지 않네.”

“무슨 말씀이시오?”

“명분이 중요치 않다? 그것은 자네들에게나 통용되는 말이지.”

“교주에게는 아니라는 것이오?"

“물론.”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이천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을 보여 주는 이천상. 그런 그를 본 담사영과 송금백은 등줄기를 훑는 공포를 느꼈다.

“다음 대의 천마는 광기의 학살자가 아닌, 법도를 갖춘 패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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