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부조리의 교차 (2)
담사영이 입을 열었다.
이천상은 볼 수 있었다. 담사영이 무언가를 외치기 위해 입을 열려 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동시에 그의 표정도 볼 수 있었다.
죽음의 위기에 닥친 한 인간의 다급함과 묘한 자신감을.
'자신감이라.”
그렇다. 담사영은 지금 자신이 있는 것이다.
두려움도 있지만, 애초에 그런 감정은 의미가 없어서 배제한 것처럼 보였다. 죽으면 어차피 그것으로 끝이니까.
대신 이 도박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승리할 자신이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
이천상의 사고 속도는 무림의 절대자라는 맹성의 수장들보다 훨씬 빨랐다.
'모조리 날려 버리면 그뿐..........'
순간 이천상은 머리 한구석이 콕콕 찔리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다?
중단전과 하단전의 흩어짐을 봉인했지만, 상단전을 꽉 채울 만큼 크게 키운 양신의 흩어짐은 막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그는 불안정했다. 실수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만일 저 자신감을 무시하고 놈을 죽이게 되었을 때, 천마신교가 어떻게 뒤집힐지 모른다.
물론 이천상은 그 광경을 보진 못할 것이다. 그 전에 사라져 버릴 테니까.
하지만 후손들은? 서량은?
어떤 일에 있어서는 이유가 중요치 않은 것을 몸소 깨달은 그가, 이 경지에 이른 후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 교를 나와 북상했다.
그때의 결정이, 그가 그렸던 미래가,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려 했던 무대가 끝나지 않는 광기의 난장판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천상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모호해진 신안(神眼).
마치 이 경지에 오르기 전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무작위로 난입하던 세상의 정보를 제어하지 못했던 이십 년 전으로,
'안타깝군.
이 검으로 놈의 목을, 의천맹을, 천하를 불태워 후계자의 삶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건만,
'역천의 길을 걸었던 삶....... 그러나 이번만큼은 순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겠군.’
인간으로서의 순리.
신선지도의 길 위에서 추방당하기 직전에, 그는 잠시나마 인간 이천상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쉬이익!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던 마황보검이 우뚝 멈추었다.
“나를 죽이면!”
그제야 담사영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그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자신의 목젖 한 치 앞에 멈춰 선 대검을 본 것이다.
'실로 빠르군.”
담사영의 눈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이천상이 나른한 얼굴로 물었다.
“네놈을 죽이면, 그리고?"
당장이라도 목을 날려 버릴 기세다. 담사영은 이천상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진심을 읽었다.
‘다급한가? 아니다. 여유가 없는 게 아니라, 그저 작심을 했을 뿐이다.'
맹주가 되기 전, 아니 되고 나서도 몇 년은 하루하루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살았다.
그 후 편안하게 권력을 누리며 사는 동안 잊고 있던 그때의 기분이, 그때의 육감이 무섭도록 확장되었다.
담사영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헛소리를 지껄이다간 무조건 목이 달아나리라는 것을.
“귀교는 무사치 못할 것이오! 황태자 전하가 나와 함께하고 있으니까!"
“황태자?”
“그렇소. 만약 내가 죽으면, 그분은 귀교를 관부의 적이자 역적 무리로 선포할 것이오!"
황태자니 역적이니 하는 말에도 이천상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렇겠지.'
담사영은 이천상의 그러한 반응을 이해했다. 아니, 예측했다.
이천상은 천하 만물을 조종할 위치에 있어 본 자다.
하늘이 그의 힘을 거두어 가고 있는지, 아니면 뭔가 실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힘이 사라지는 지금도 자신은 일초지적조차 될 수 없었다.
당연히 황태자라고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신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자에게 역적이란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도 담사영은 자신이 있었다.
"당신에게는 시간이 없소.”
기실 얼마나 촉박한지는 모른다. 그래도 담사영은 그렇게 말했다.
의천맹과 철혈성을 날려 버릴 시간이 없다면, 황실도 날려 버릴 수 없다.
즉, 이천상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촉박한 시간 내에 후계자와 신교가 안전할 수 있는 길을.
심지어 그 폭도 좁았다. 자신을 죽이고 천마신교가 망하거나 자신을 죽이지 않고 얌전히 물러가는 것, 두 개의 선택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끄러미 담사영을 보던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런 관계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죽으면 본교는 역적의 무리가 될 것이고, 명분과 관군의 힘을 등에 업은 맹성이 본교를 공격할 것이란 말이로군.”
“.......”
"하물며 내 후계자는 이립도 안 된 나이에 극마를 깨달은 천고의 기재. 또 다른 이천상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짓누르려 들겠지.”
담사영은 섬뜩함을 느꼈다.
무상의 힘을 갖춘 자는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다. 귀찮으면 다 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런 힘을 품은 것도 모자라, 이천상은 엄청나게 예리한 안목을 갖고 있었다.
보아하니 그 말도 안 되는 신안(神眼)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간단한 말 몇 마디로도 훗날의 미래를 순식간에 그려 낼 줄 안다.
담사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다행이다.
오히려 깨달음이 지극하기에 다행이다. 만약 저자가 자신보다 한두 수 더 강한 무인이었다면 지금보다 백배는 더 위험했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모든 수를 다 써서라도 맹성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쟁취했을 테니까.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느냐?”
“......”
"네놈은 참으로 재미있는 놈이다."
마치 어린아이의 독특한 언행을 보고 품평하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담사영의 기분은 밑창까지 내려가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천상은 말을 이었다.
“내가 보았던 네놈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무슨 수라도 쓴 독사 같은 놈이었다.
또한, 내 후계자가 평가한 네놈은 인망을 얻는 법은 모를지라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굉장한 용인술(用人術)을 발휘할 줄 아는 놈이라고 말하더군.”
“......”
“그런 네놈이, 나라는 재앙을 막기 위해 무슨 준비를 했나 싶었다.
관부를 끌어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황태자와 연을 맺고 있었을 줄은 나조차도 몰랐군.”
반선의 눈으로도 들여다보지 못했던 속내다.
순수하게 기뻐해도 좋을 이 상황에서, 담사영은 다시 한번 서늘함을 느꼈다.
'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이천상의 이 느긋함이, 힘이 사라져 가는데도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이 알 수 없는 섬뜩함을 안겨 주었다.
“네놈은 여러모로 내 제자와 닮았다.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놈이지만, 제법 의외성도 갖추고 있지."
“.......”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도망쳐 훗날을 대비할 줄 알았더니, 선택할 수 없는 패를 들고 와 선택을 강요한다?"
송금백은 담사영이 준비한 패를 보고 지독한 고육지책이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정답이었다. 담사영은 목숨을 걸고 맹주가 되었지만, 이처럼 얻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선(死線)에 섰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이런 도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손 쓸 도리가 없기에 도리어 목숨을 걸고 상대와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네놈이 본교의 교도로 들어왔다면 좋았을 것을."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칠 척에 달하는 거구가 일어나자, 마치 산악이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 움직임을 본 송금백은 생각했다. 확실히 달라졌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이었던 남자는, 이제 인간이 됐다.
그래서 훨씬 더 무서워졌다. 점차 하늘보다 인간에 가까운 기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그 기도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흉포하고 무지막지했다.
화아아아악!
마공을 개방하지 않았는데도 바닥에 쌓인 눈이 모조리 수증기로 화해 날아갔다.
그 영역이 실로 엄청났다. 이천상이 선 곳을 중심으로 반경 삼십여 장에 달한 땅이 점차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송금백이 입을 열었다.
“유감이오. 교주께서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면, 더 쉬운 길을 갈 수도 있었을 게요.”
"대호가 표범이 되었다고 하여 쥐새끼 눈치를 볼 이유가 있겠느냐.”
"당신은 실로 그리 말할 자격이 있소. 그러나 하늘도 당신을 거부했으니, 미련이나마 남기지 않고 떠나셔야 하지 않겠소? 속히 선택을 하시는 것이 어떻소?”
“결정은 진즉에 내렸다.”
두 사람이 긴장한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푸스스스.
이천상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뜨거운 김을 뿜던 땅이 조금씩 붉어졌다.
신의 영역을 넘보던 마신(魔神)이, 천하를 신음케 할 마황(魔皇)이 된 것이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둘을 보던 이천상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과거, 량이가 본교의 삼공자 시절 때 제법 파격적인 수법을 썼더랬지.”
“......?”
"녀석은 대담하게도,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큰애와 둘째가 반란을 일으켰다며 소동을 벌였다. 덕분에 큰애와 둘째가 썼던 계략들은 몽땅 쓸모가 없어졌지.”
이천상의 시선이 이동했다.
그의 눈에 의천맹이 들어왔다.
“차라리 내 말대로, 무림을 강호에서 빼냈으면 좋았을 것을."
"무슨.......?!”
“너희는 실수했느니라.”
콰아아앙!
순간 담사영과 송금백이 의천맹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이천상은 그런 둘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미 의천맹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둘과는 차원이 다른 신속(神速)이었다.
'여기였군.’
이천상이 눈이 빛났다.
담사영의 목에 검을 쏘아 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그때보다는 확연하게 느려진 사고가 그에게 결론을 내려 주었다.
'바로 여기가 내 마지막 무대였어.'
그리 멋들어진 장소는 아니지만, 큰 부족함은 없다. 역대 천마 중 이토록 거대한 무덤에 들어간 자는 단 한 명도 없지 않았던가.
그 사실이, 그 미래가 이천상을 흡족게 했다.
상단전의 빛은 거의 다 흐트러졌고, 중단전과 하단전을 봉인한 군림마황기도 힘을 잃어 가고 있었지만,
천도(天道)에 이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마황보검이 무지막지한 검광을 뿜었다.
번쩍! 콰르르릉!
하단에서 상단으로 치솟는 검결에 따라 성문 바닥부터 성루까지 일직선으로 부서져 날아갔다.
콰앙!
단숨에 의천맹으로 진입한 이천상이 마안을 빛냈다.
마로서 하늘에 이르렀지만, 그것은 진정한 마(魔)가 아니었다. 신선이 되어, 세상의 이치가 되어 흩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마인다운 길이 있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입교하여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가 된 그 순간까지.
딱 거기까지를 자신의 역사로 삼기로 했다. 신선지도니 순리니, 그런 듣기에도 간지러운 성스러운 길에 올라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올 듯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이천상이 외쳤다.
“내가 천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