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부조리의 교차 (4)
세상은 끊임없는 사건 사고의 연속이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 건씩 일어나는 사건들 중 세상에 알려지는 일은 많지 않다. 당사자들에게는 아픔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비슷한 일들은 지나치게 많았다.
그러나 여기, 중원 역사에 아로새겨질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났다.
수천 년 무림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대 사건, 호사가들은 천여 년 전, 잠시나마 무림이 마도천하(魔道天下)로 물들었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인 사건이라고도 하였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낙정혈사(落正血事), 혹은 천마범정대전(天魔犯正大戰)이라 불렀다.
세상에 무림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후, 무수히 많은 고수가 나타났다.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사람은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우며, 고금제일을 넘볼 수 있다며 찬양을 받던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하지만 이번 낙정혈사, 천마범정대전을 일으킨 단 한 명의 절대자만큼 고금제일이란 호칭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폭설이 내리던 연말, 한 해의 마지막을 열흘 남겨 둔 날.
정파 무림 연맹, 의천맹이 한 인물에 의해 반파되었다.
말이 반파지, 실상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고 봐도 옳았다.
의천맹에 대기하던 고수 중 칠 할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내성 안의 건각들 대부분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이었다.
한 자루 휘황찬란한 보검을 들고, 어둠을 두른 것처럼 새까만 곤룡포 한 벌을 입은 거구의 사내 한 명이 만들어 낸 결과물은
그야말로 끔찍한 재앙이 되어 무림을 강타했다.
물론 의천맹에, 정파 무림의 기둥이라는 구대문파의 고수들이 총집결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의천무제 담사영의 치세 아래 구파에 비견될 만한, 혹은 그 이상을 넘볼 수 있는 고수들이 대거 포진한 집단이 의천맹이었다.
굳이 구파의 고수들이 집결하지 않아도, 의천맹 본부의 힘만으로도 강호삼세의 일익으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중 칠 할이 한 사내의 힘에 증발해 버렸다.
이 믿기 어려운 소문은 사흘도 채 되지 않아 온 천하를 강타했다.
무림의 반응은 그야말로 뜨겁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단 한 명에게 의천맹이라는 초거대연합체가 반파될 수 있는지, 그저 과장된 소문이 분명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나 의천맹이 유례없는 피해를 본 것은 확실했다.
심지어 의천맹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인 천마(天魔)는 검은 곤룡포만을 남기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말도 들렸다.
거대한 여우 요괴가 천마를 물고 승천했다는 다소 허황된 소문도 들려왔다.
분명한 진실의 흔적 위로 온갖 소문들이 들불처럼 번졌다. 그 정도로 사태는 충격적이었다.
천하가 요동쳤다.
그동안 솥의 세 다리처럼 견고하게 뻗어 흔들리지 않았던 천하 정세가 순식간에 불안정해졌다. 이러다 전쟁이 나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렇게 반신반의로 물든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한 해의 마지막 날, 의천맹이 반파된 날과 비슷하게 폭설이 내리던 그 밤.
훗날 사람들이 공포에 젖어 부르짖게 될 일대 사건, 광마혈사(狂魔血事)라는 사태가 일어났다.
지닌바 무위가 화경에 달했다는 천마의 후계자, 염라마군이 이끄는 마교의 일천 병력이 철혈성의 주요 거점을 모조리 파괴해 버린 사건을 말함이다.
철혈성, 의천맹 정도가 되면 천하 각지에 온갖 지부와 거점을 만들게 마련이었다.
그를 통해 세상을 보고,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좋은 정보와 자금력을 확보할 수 있기에,
본진의 크기가 클수록 필연적으로 지부의 숫자를 늘릴 수밖에 없다.
염라마군은 무적의 부대를 대동, 철혈성의 지부들이 밀집한 안휘와 절강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철혈성의 거점인 강소성까지 밀고 들어가, 그들의 주력 부대 세 개까지 완파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고작 보름만의 일이었다.
숙식은 어떻게 해결한 것인지 철혈성 안휘지부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대담하게 강소로 들어가 주요 거점을 날려 버렸으며,
절강을 통해 유유히 빠져나가며 마지막 파괴 행위를 일으켰다. 그 시간이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진군 속도요, 상상을 초월하는 전력이었다.
마도 무림에겐 가히 위업이라 할 만한 일이지만, 피해 당사자에게 있어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재앙이었다.
특히나 유명한 것은 당시 보여 준 염라마군의 살기였다.
마치 무언가에 쓰인 것처럼, 그간 중원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악마와도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이 생존자들의 주장이었다.
괜히 그 사태를 광마(狂魔)의 혈사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대의 선봉에 서서 미쳐 날뛰던 염라마군의 신위는 실로 또 다른 천마의 재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간 염라마군의 무공을 구파 장문인급이라 낮춰 보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얕잡아 볼 수가 없었다.
천하가 혼돈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왜 선조들이 천마신교를 그리도 경계하고 또 경계했는지.
정파 무림 연합인 의천맹을 초토화시킨 것은 교주였고, 철혈성의 손발을 잘라 내어 그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해 버린 것은 소교주였다.
두 괴물이 각자 정파와 사파에게 안겨 준 피해는 천문학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특히나 염라마군 쪽은 절대고수들을 피해 철저하게 파괴를 일으켰지만, 구대천마는 홀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연맹체를 와해시켰다.
이것이 바로 천마신교의 힘이었다. 그들이 지닌 저력이었다.
어찌하여 선조들이 만나 보지도 않은 마교주를 두고 천하제일인이 분명할 것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마교는, 천마파순을 신봉하는 그들에게는 그러한 믿을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가자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혈풍.
기울어지다가도 세워지고, 무너지다가도 재차 일어나는 세력들 간의 혼란 속에서.
새해의 두 번째 달이 찾아왔다.
*
*
*
흘러가는 구름은 괜스레 아련하게 보였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 서늘한 바람이 몰아치는 그곳에 선 노승은 깊고 깊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게서 어인 청승이신가.”
노승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가 찾아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보고 있네.”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잊고 싶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곤 하지. 그러나 자네가 망각조차 뜻대로 못하는 경지는 아니니, 뭔가 심란한 일이 있는가 보구먼.”
“허허.”
"확실히 자네는 부처가 될 운명은 아니야. 번뇌가 그리 많아서야 어찌 열반에 들 수 있을꼬.”
“내 비록 직접 피를 보지는 않았으나, 소림의 제자들이 나와 방장의 묵인하에 무수한 살상을 저질렀다네. 내 어찌 열반에 들기를 바라겠는가.”
“적이었다네.”
“적의 피는 푸르기라도 하다던가.”
“어쩔 수 없는 일은 아니었네만, 분명 필요한 일이기도 했네.”
“필요한 일일 수는 있었을지언정 과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네.”
“나 역시 등선은 꿈도 못 꿀 말코가 분명한 모양이네. 우리가 했던 일이 그리 과하다고는 생각지 않는 걸 보니.”
“과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다만 과해질 가능성이 충분한 일이었지.”
“그건 또 재미있는 말이로군. 과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네. 하나 우리가 더 피를 보기 전에, 하늘이 내린 마(魔)의 화신이 그 피를 모두 마시고 올라가 버렸네.”
“.......”
“일 년이 지난들, 십 년이 지난들 어찌 그를 잊겠는가. 의도가 어찌 되었든 수행자의 몸으로 그에게 빚을 진 것이 분명하거늘.”
현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친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고뇌하고 슬퍼했을지도 모른다.
한 세기를 살아온 깨달음 깊은 도사라도 사람은 사람인바. 현천은 자신이 말년에 이리도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혼란을 받아들였고, 나아가 떨쳐 냈다.
하지만 저 친구는 아직 떨쳐 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리도 슬퍼하는 것을 보면,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하늘에 이르렀음에도, 천도(天道)를 거부하고 다시 인간의 삶을 택했네.”
“아네.”
“역천도 그런 역천이 없지. 하나 나는 그의 마지막 선택이, 어찌 그리도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네.”
“자네 말마따나 빚을 졌기 때문이겠지.”
노승, 적송이 몸을 돌렸다.
심란함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얼굴은 한 달 전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훗날 녀석에게 좋은 탁주 한 사발을 만들어 주기로 했었다네.”
“약속을 지키지 못했구먼."
“멋대로 약속을 끊고 훨훨 날아가 버린 녀석 잘못이지. 심지어 커다란 빚까지 안겨 두고 훌쩍 떠나 버렸네.”
“참으로 곤란한 녀석이로고.”
적송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서, 예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는가?”
애써 말을 돌리는 기색이었다.
현천은 그런 적송을 이해했다. 마음 같아선 더더욱 고뇌하고 빨리 털어 내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온전히 적송의 몫이었다.
"반정회에 이런저런 정보들이 많이 쌓였네. 어지간하면 자네의 수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회준데 알 건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자네도 회주라네.”
“반쪽이지. 자네나 나나. 그리도 부족한 늙은이들이기에 둘이서 맡고 있지 않나?”
현천의 농에 적송이 피식 웃었다.
“미안하네. 이 부족한 사람 때문에 자네만 고생이 많았구먼. 그래,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현천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대여섯 장은 되어 보였다.
“간단하게 추렸네. 현재 중원의 상황이 기재되어 있네. 그간 오만 일이 있었네만, 일단은 이것만 알면 될 것이네.”
“고맙네.”
"고맙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퇴물에게 남은 유일한 친구인데, 이 정도야.”
"알았네, 알았어. 속히 번뇌를 씻어 내도록 하겠네.”
현천은 저도 모르게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와중에도 번뇌를 씻고 돌아오겠다고 한다. 확실히 반정회는 무인 집단보다 수행자 집단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수행자 집단치고는 지나치게 전투적인 성향을 띄긴 하지만 말이다.
“내, 자네에게 서신을 전해 주는 것 외에 따로 할 말이 있네.”
“말씀하시게.”
“두 가지만 말할 것이네. 시간을 길게 끌진 않을 것이야.”
“고맙네.”
“우선 첫째.”
현천의 눈이 번뜩였다. 인상 좋은 노도사에서 중원제일검객이 되는 순간이었다.
“새외의 동태가 심상치 않네.”
“새외?”
“그렇다네. 북해빙궁은 물론 천룡궁, 그리고 검궁까지 움직이고 있다네. 새외사궁 중 야수궁을 제외한 모두가 중원을 향해 오고 있어.”
적송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시국에 말인가?"
“그렇다네. 그뿐만이 아니야. 여전히 움직이진 않지만, 황실의 첩보 단체가 무림 단체들을 기웃거리고 있다더구먼. 물론 그 움직임은 지극히 은밀하다고 하네.”
"황실? 첩보?!”
“그렇다네. 이 부분은 서신으로 전하기 애매해서 직접 알려 주려 온 것이도기도 하네.”
"허! 새외 무림은 물론 황실의 첩보 단체까지 움직인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나도 모르겠네. 선도의 신안으로도 보이지 않아. 하기야, 내가 원해서 보이는 세상은 아니지만 말일세."
현천이 한숨을 쉬었다.
“의천맹 본진이 무너지고, 철혈성의 손발이 묶인 상황일세.
담 맹주에게서 돌아선 구파의 대부분은 산으로 돌아가 대기 중이고, 철혈성 역시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네.
그런 와중에 새외 무림도 모자라 황실까지 움직이고 있다. 하니, 참으로 심상치가 않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중원에 또 다른 삭풍이 몰아치려 하는가........."
"모르겠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들의 움직임이 그리 빠르지는 않다는 것이야.”
적송이 탄식했다.
“사바세계는 도탄의 연속이라, 부디 별일이 아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겐가.”
현천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 그리고 자네에게 알려 줄 두 번째 소식이 있네. 정확히는 자네에게 선택을 종용하는 것이네만.”
“선택을 종용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신교에서 연락이 왔네.”
"......!”
“서 소교가 자네를 보자고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