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부조리의 교차 (6)
정상에 올라 커다란 바위 쪽으로 다가간 적송은 그제야 철검마존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휘이이이이잉!
한 청년이 차갑고 거센 겨울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얼마 전 숭산에서 보았던 그 청년이 분명했다. 이천상을 연상케 하는 출중한 체격에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바람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는데, 그 모습이 몹시 슬프고도 자유분방해 보였다.
왜일까? 적송은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청년의 모습이 우스워서가 아니었다.
뒷짐을 진 채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 저 청년의 뒷모습이 삼십여 년 전에 보았던 이천상의 모습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때도 그랬지.”
주조한 지 얼마 안 된 탁주를 들고 왔을 때, 이천상 역시 산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시 이천상의 분위기와 지금 서량의 분위기는 분명히 달랐다. 그러나 저 널찍한 어깨와 강인한 존재감만큼은 쌍둥이처럼 똑 닮았다.
'역시나 너는 이천상, 그 녀석의 제자가 맞는 모양이다.'
조금은 아련한 눈으로, 조금은 씁쓸한 눈으로 청년을 보던 적송.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철검마존의 말을.
교주직은 서량에게로 넘어갔다.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량의 뒷모습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등에 업고 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적송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어린 마룡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겠구나.”
서량이 몸을 돌렸다.
“오셨습니까.”
적송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깊은 생각에 빠져 있기라도 했던 양, 이제야 정신을 차린 기색이었다. 저 정도 경지에 오른 절대자라면 오히려 주변을 잊기가 더 어려울 텐데도,
“고민이 깊은 모양일세.”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적송은 상상도 못 했다. 서량이 저리도 쓸쓸하게 웃을 수 있을 줄은.
“뭐, 이런저런.”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보던 적송이 한숨을 쉬었다.
“유감일세.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괜찮아 보이기도 했다.
뭔가 더 말하려던 적송은 이내 생각을 바꿔 입을 닫았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위로의 말을 더 해 봤자 서량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희대의 난적인 소림의 승려가 위로를 건넨다면, 그처럼 우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적송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서량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원망도 많았습니다. 언질도 없이 떠나 버린 그분께 화도 났지요. 하지만 그분이라고 본인의 미래를 알고 계셨겠습니까?"
“그는.....”
“제가 아는 것은 하납니다. 그분은 제가, 우리가 슬픔에 빠져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걸 싫어하신다는 것이지요.”
서량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건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극한 슬픔은 가눌 길이 없지만, 쪽팔리게 질질 짜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적송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쪽팔리게? 질질 짜? 참으로 방정맞은 말투다. 하지만 저리 가볍게 말하니 오히려 상대인 자신이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래, 아마 자네의 스승도 그걸 원치는 않을 것이네.”
“그래서 노선배에게 연락한 겁니다. 앞으로 헤쳐 갈 일이 많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처음 서량의 서신을 받은 반정회의 수뇌부들은, 불신을 떠나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무쌍신은 이름부터가 전설이었고 반정회의 회주들이기도 하다.
그러한 대선배에게 찾아오지는 못할망정 찾아오라고 했으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물론 적송은 그들과는 달랐다. 튼튼한 다리가 있고, 지고한 무공이 있는데, 기분 상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다만 지금에야 이해했다. 서량이라면 직접 찾아오거나 혹은 중간에 접점이 되는 곳에서 만나자고 할 녀석인데도 자신더러 예까지 오라고 했던 이유를.
'신교가 새로운 신을 맞이했으니, 신은 신다운 위용을 보여야 하는 법이지.”
이제 서량은 교주다.
교주는 신이고, 신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상대가 적송이 아니라 달마대사라도 찾아오라 서신을 보냈을 것이다.
그것이 천마신교의 주인, 세상 사람들이 마교주라 부르는 마신의 위치인 것이다.
“탁자는 없느냐?”
“예?”
"그래, 없을 것 같구나. 하면 저기 저 자리로 가자.”
적송이 가리킨 곳은 낮고 편편한 바위 위였다. 널찍한 바위는 둘이 앉기에 상당히 넓었다.
이내,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적송이 허리춤에서 호리병 두 개를 꺼내 들었다.
“탁주는 온도가 생명이거늘.”
“직접 담그신 겁니까?"
“오냐.”
호리병 하나를 서량에게 던진 적송이 마개를 땄다.
“향은 괜찮구먼.”
가만히 호리병을 보던 서량도 이내 마개를 따고는 그대로 입에 쏟아부었다.
적송이 혀를 찼다.
“향을 음미하라 했거늘, 참으로 변한 게 없구나.”
“크으, 위장으로 들어가면 다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그럴 거면 똥도 먹지 그러느냐.”
“사람은 똥 안 먹습니다.”
서량이 웃으며 호리병을 내려놓았다.
“맛이 아주 좋습니다. 전에 마시던 것보다 훨씬요.”
“그럴 수밖에. 내 역작 중의 역작이니라.”
이천상을 위해 빚은 술이었다. 비록 그는 세상에 없지만, 그의 후계자가 마셔 주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술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적송이 물었다.
"그래, 이 다 늙어 빠진 땡중을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이 저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음?”
서량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휙 바뀌어 버린 그의 표정에서, 놀랍게도 적송은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알고 계시지요? 의천맹이 반파된 것.”
“그래, 알고 있다.”
적송은 지금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천상 정도가 되면 누군가를 공격한다는 '생각'에 이르는 것 자체가 힘겨울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이르러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그보다 훨씬 힘들 것이다.
세상에 관여할 수 없는 영육으로, 의천맹의 본진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천도(天道)를 포기하고 인간으로 내려왔다.
행위의 끔찍함을 떠나, 이천상의 굳건한 의지에 적송은 감탄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꼈다.
인간일 때도, 신선에 경지에 올랐을 때도 끊임없이 상식을 거부한다.
정말이지 그런 사람은 다시 나지 않을 것이다.
“의천맹은 반파되었지만 칠파일방은 남아 있습니다. 그중 개방은 방주가 죽은 뒤 세상에 나서지 않고 있으니, 결국 일곱 문파가 남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데?”
“담사영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살아 있지요.”
“그리 믿느냐?”
“물론입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제 사부님께서는 제자의 한을 강탈해 갈 만큼 경우 없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제자의 한?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수많은 고수들이 죽었으나 세상을 이따위로 만든 놈들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해산하십시오.”
"뭐?"
"반정회를 일시적으로 해산하시란 말입니다.”
적송의 눈이 부릅 뜨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반정회를 해산하라니?"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말이라는 건 이해합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할 말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하겠습니다.”
“......?”
“지금의 반정회는 의천맹과 다를 바 없습니다.”
“뭣이?!”
“의천맹처럼 똘똘 뭉쳐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한데 그것이 왜 문제란 말이냐?"
"반정회가 지금의 위치, 세력을 계속 형성하고 있는 한 반드시 위험해집니다.”
적송의 얼굴에 놀라움이 담겼다.
"위험해지다니? 본회가 말이더냐?"
“담사영의 손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담사영의 손에 증발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겠지요.”
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 길이 없었다.
서량의 음색이 한층 깊어졌다.
"묻겠습니다. 반정회는 그간 철혈성의 숨겨진 고수들과 몇 차례 전투를 벌였지요?"
“그러했다.”
“그 싸움에 두 회주분께서 나서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없었다.”
“철혈성 역시 그렇습니다. 숨기고 있는 패는 꺼냈지만, 진짜 고수들은 나서지 않았습니다. 반정회처럼요. 그래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지요.”
“.....?”
“철혈성은 그 치욕을 당하고서도 침묵 중이고, 담사영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 같습니까?”
“무엇을 뜻하느냐?”
“그들이 인내하고 있다는 겁니다.”
"......?!”
“그간의 행보나 성격을 제외하면, 맹성 주인들의 정치력은 천하에서도 알아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권좌를 차지한 후엔 인내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 자리는 인내의 자리가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니까요.”
서량의 눈이 빛났다.
"묻겠습니다. 의천맹이나 철혈성이 총력을 기울여 반정회를 날려 버리겠다 다짐했다면, 반정회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적송은 감히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무림에서 절대고수가 갖는 위상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은 한 명이지만, 또한 군단이기도 하다.
단 한 명이 수백의 고수들을 어렵지 않게 짓눌러 버릴 수 있는 존재를 절대고수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천맹과 철혈성에 반정회만큼 고수가 없을까? 설령 없다고 한들, 둘이 힘을 합치면 반정회 하나 날려 버리는 게 어려운 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반정회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 반정회가 무림 정세에 한 축을 담당하여 의천맹을 견제하고 철혈성과 싸울 수 있었던 이유는
힘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균형....”
“그렇습니다. 저는 그래서 소림과 무당을 도왔고, 의천맹과 맞서 싸워 달라 한 것입니다.
명분이 있으니 무서울 게 없고, 세상의 눈이 있으니 의천맹도 함부로는 못 할 테니까. 그들은 결코 힘이 없어서 철혈성의 손을 빌린 게 아닙니다.”
"....."
“하지만 지금, 그 균형이 깨졌습니다.”
우우우웅.
서량의 안광에 마기가 서렸다.
"맹성의 주인들이 이전과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그들이 정한 끝은 어디인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그들이 전보다 훨씬 더 신중해졌음은 분명합니다.”
가만히 서량을 보던 적송이 툭 던지듯 물었다.
"네 녀석에게 있느냐?"
“무엇이 말입니까?"
“네가 무엇을 준비했는지는 묻지 않으마. 다만 이것만큼은 묻고 싶다. 네가 정한 끝이 어디인지.”
서량이 서늘하게 웃었다.
적송은 철검마존을 마주했을 때에 이어, 다시 한번 섬뜩함을 느꼈다.
그것은 참으로 낯선 감정이었다. 수십 년 전 천하제일이라 불린 이후 사람에게 공포를 느낀 적이 없었거늘, 오늘은 두 번이나 가슴 시린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이들의 무공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의천맹주, 철혈성주가 정한 끝보다는 훨씬 멀리에 있을 겁니다.”
"......”
"교주님께서 그 둘을 살려 두신 이유가 그것이겠지요. 그분만큼 저를 잘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적송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다독였다.
“그 길은 선혈로 물들어 있느냐?"
“적어도 무관한 사람의 피는 묻지 않을 겁니다.”
"말장난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내 말이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면 대의(大義)를 위해 적도들을 쳐 죽인 귀회의 학살극 역시 오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것 아니겠소?”
한순간에 말투가 달라졌다. 적송은 서량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물끄러미 적송을 바라보던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내 말, 잘 생각해 보길 바라오. 앞으로 자주 만나기 힘들 것이오."
서량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적송이 준 탁주는 절반도 채 비우지 않은 채.
호리병을 내려다보던 적송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집으로 돌아가오.”
“무엇을 보고 가는가.”
"천하를 보고 가오.”
적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보는 천하가, 부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기를 바라네.”
서량이 적송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 미소에서 적송은 이천상의 차가운 미소를 떠올렸다.
“아름다운지는 모르겠지만, 잡아 죽여야 할 놈들이 많은 건 알겠습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