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새로운 그림자를 드리우다 (2)
쾅!
탁자를 내리치는 손길이 무척이나 신경질적이었다.
"자네가 누군가? 바로 천마군의 총대장인 천마대군장이야!
천마군의 존재 의의는 오로지 교주과 본교를 지키는 것! 교주님께서 적들이 득실거리는 중원 땅으로 향했다면, 마땅히 목숨 걸고 그분을 지켜 드렸어야지!"
마치 불을 뿜는 듯하다.
열화마존은 극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나마 그가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참을 수 있었던 건 주변 마존들 덕분이었다.
하지만 다른 마존들이라고 화가 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열화마존보다도 더 화가 난 상태였다.
열화마존은 이천상이 중원으로 진출하고 나서도 병력을 더 파견해야 한다느니, 마존 중 절반은 하산해야 한다느니 난장을 쳐 댔다.
그의 불같은 요구를 무마한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마음 같아선 열화마존의 말대로 하고 싶었지만, 천마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설령 이러한 결과를 미리 알았다 한들, 그들은 이천상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회와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었다.
열화마존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엄태경을 노려보았다.
“자네가 아직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
“......"
“대답해 보라니까!”
엄태경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뒷짐을 지고 전방을 주시할 뿐, 어떠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놈이......!”
화르르륵!
열화마존의 어깨 위로 시뻘건 불꽃이 치솟았다. 천하에서도 양강(陽强)한 무공으로는 첫손에 꼽힌다는 불의 마존다운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열화.”
마존들 중 가운데 앉은 노인이 손을 들자 열화마존이 주춤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게.”
"하지만 원주!”
“여기는 대전일세. 신성한 대전에서 어찌 그리 경망스레 행동하는가.”
“이익!"
“앉게.”
열화마존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연신 씩씩대는 모양새가 그야말로 불덩이를 보는 듯했다.
노인, 원로원주(元老院主) 광마존(光魔尊)이 호요성에게 말했다.
“소교주님께서는 언제 오신다고 하던가.”
호요성이 고개를 저었다.
"호칭부터 정정해야겠습니다. 소교주님이 아니라 교주님입니다.”
“상황은 알고 있네. 그러나 아직 정식 대관을 거치지 않은 분을 교주님으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원주님의 말씀은 일견 타당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주님은 방금 불경죄를 저지르셨습니다.”
광마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경죄라?”
“상황을 다 전해 들으셨다면, 전대 교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교주님께 교주직을 이양하셨음을 분명 알고 계실 겁니다.
제게는 십대천마로서의 마위를 준비하라 명하셨고, 천마군 역시 전대 교주님의 명에 따라 교주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
“대관을 치르지 않았다고 하여 교주님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은 대단히 편협한 시각이며,
또한 욕계로 가신 전대 교주님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총군사.”
“교내 분위기가 워낙 뒤숭숭하고, 어르신들도 경황이 없음을 이해합니다. 해서 한 번은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나 두 번은 없습니다. 또다시 그런 불경한 발언을 하실 경우, 이 일을 그대로 형법당에 올릴 것입니다.”
평온한 얼굴로 무섭도록 날 선 말을 내뱉는다. 대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쿵!
호요성이 시선을 돌렸다.
광마존의 우측, 굉장한 덩치를 자랑하는 노인이었다. 덩치에 맞지 않는 음영(陰影) 무공의 달인, 바로 음야마존(陰夜魔尊)이었다.
“총군사는 예의를 지키지 못하겠는가! 어찌 원주님께 그런 망발을 지껄인단 말인가!”
호요성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하면 음야마존께서도 교주님을 교주로 인정하지 않으신단 말씀이십니까?”
"물론이네!”
음야마존의 눈에서 마광이 치솟았다.
“교주님께서 정녕 그러한 뜻을 보이셨다면 당연히 인정할 수 있어! 그러나 자네들이 말하는 것이 진정 사실인지 어찌 안단 말인가!"
“즉, 음야 어르신의 말씀은 전대 교주님을 믿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전대 교주님과 함께한 이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이로군요.”
“교주님의 안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이들이야! 저들이 화를 면키 위해 거짓을 입에 담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네!"
고루마존의 볼이 꿈틀거렸다.
음야마존은 일부러 그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천마군부터 광마대, 진마대까지 전부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네!"
호요성이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내놔야 할 분은 음야 어르신입니다.”
“뭣이?!”
“잊으셨습니까? 전대 교주님께서 돌아가신 그 자리에는 교주님도 계셨습니다.”
“......!”
“설마하니 교주님께서 거짓말이라도 하셨다는 겁니까? 전대 교주님께서, 십대천마라 명명하신 교주님께서?
가만히 있어도 차후 교주의 위(位)에 오를 것이 분명한 그분이?"
음야마존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호요성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어르신. 잊으신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상관을 향한 항명은 때에 따라 즉참으로 다스립니다.
교주님을 향한 불손한 언행과 불신은 말할 것도 없지요. 즉결 처형은 물론이요, 삼족을 멸합니다.”
수백 자루의 비수가 대전 곳곳에서 춤을 추는 듯하다.
가만히 있어도 목이 베일 듯한 섬뜩한 분위기가 대전을 감돌았다. 음야마존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때, 광마존이 손을 들었다.
"그만들 하게.”
모두의 시선이 광마존에게 향했다.
“총군사의 말은 잘 알아들었네. 이쯤 하세.”
물끄러미 광마존을 보던 호요성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도록 하지요.”
“일단은.....”
“호칭은 꼭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광마존은 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호요성은 그런 광마존을 보며, 내심 답답함을 금할 수 없었다.
'벌써 이빨을 드러내는가.'
신교에서 교주의 명령은 법 위에 있다.
그러나 교주가 아닌 존재는 다르다. 소교주에게는 신교의 무력을 좌우할 수 있는 권한, 즉 군권(軍權)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권한일 뿐, 교주 대행으로서 신교를 다스리는 명확한 권한까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공포와 억압이라는 목줄이 채워져 있던 야수들이 하나둘 고개를 쳐들고 있다.'
원로원, 즉 마존들에게는 딱히 권한이라고 할 것이 없다.
마치 후계자로 내정되지 않은 후계 후보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신교 무력의 상징으로서 마인들의 존경을 받지만, 실질적으로 병력을 운용한다거나 살림에 관여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없다.
그 모든 것이 교주를 위해서였다. 교주는 신이며, 곧 절대권력의 상징이다. 거기에 원로원이 끼어들게 되면 신교라는 괴물이 몇 개의 몸뚱이로 분리되게 된다.
그래선 안 된다.
국가, 혹은 다른 무림 연맹체는 권력이 분산될수록 좋다. 그러나 신교는 아니었다.
'그래서 능력이 있는 자가 교주가 되어야만 한다. 비궁은 물론 원로원, 신장부(神將)까지 휘어잡을 수 있는 절대적인 무력의 상징이 필요해.'
일인 집권이 당연시되는 신교는 반역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기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신교의 체제가 일인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는 한, 반란과 반역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역사상 반역을 일으킨 이들 대다수는 원로원의 마존들이었다.
'힘이 있으나 권력은 없다.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는 위치겠지?'
당대 원로원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다만 이천상이라는 위대한 천마의 힘과 그에 따른 공포가 유례가 없을 만큼 강력했기 때문에 감히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뿐이다.
아니, 도전은커녕 존경을 끌어냈다. 이천상 정도라면, 역사상 최강의 천마라는 초대와 칠대에 비견될 만한 절대자라면 마도천하도 꿈이 아닐 테니까.
그런 이천상이 사라졌다. 이제는 이천상이 극찬을 한, 그러나 본인만큼은 되지 못한 후계자만이 남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
호요성은 광마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노인답지 않게 맑고 깨끗한 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씨 좋은 사람의 눈이라기보다, 속을 알 수 없는 투명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원로원주 광마존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전대 교주님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큼은 진짜였어.
그는 교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충신이었다.'
그런 인물이, 아무리 전대 교주님께서 타계하셨다 해도 이리 빨리 송곳니를 드러내다니?
'그의 충성은 교주라는 직책이 아니라, 오로지 전대 교주님만을 위한 것이었던가.'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호요성조차 광마존의 속내는 알기 힘들었다.
그에 비하면 음야마존은 쉽다. 음야마존은 덩치에 맞지 않게 약삭빠르고 눈치를 보는 위인이었다.
적당히 세속적이고 욕심도 과했지만, 정말 위험하다 싶으면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이였다.
그런 음야마존이 저토록 위험한 발언을 한다?
'위험하지 않다고 믿는다는 뜻. 즉 그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인물은 십중팔구 광마존일 확률이 높았다.
'속내가 어떻든 막는다.'
저들이 역심을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호요성은 총군사로서 원로원을 철저하게 망가트릴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리되면 그 역시 목숨이 위험해지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호요성은 이천상을 생각했다.
신교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아니 어쩌면 무림사 최강이라 불리어도 무방할 무적의 천마를.
'저는 신교를 지키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 신심(身心)을 교주님께 바칠 생각은 없습니다.'
호요성의 얼굴에 악동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만 교주님께서, 전대 교주님만큼이나 저를 휘둘러 줄 수 있으시다면 그때는....’
미소 속에 사무치는 아픔이 깃들었다.
'바로 그때 향을 피우겠습니다.'
과거, 아는 것만 많고 세상을 살아가는 눈은 세 살배기 어린애보다도 못하던 시절.
넘치는 가능성을 썩히고 있던 그 시절의 자신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준 이천상에 대한 감사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천마신교의 총군사가 되어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큰 은혜를 입었기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제 충성의 대상을 옮겨야만 한다. 준비도 확실히 해 두었다.
하나 조직의 후계자와 수장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은 완전히 다른 법.
만일 신임 교주님께서 이천상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인물이라면,
그는 교주가 아닌, 신교 자체에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해서.”
광마존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끼리 탁상공론을 벌여 봐야 별 의미가 없겠지. 그분은 언제 오신다고 하던가?”
끝까지 교주라고 부르기 싫은 모양이었다. 호요성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교주님께선....”
그때였다.
훅!
순간 대전의 문밖에서부터 무시무시한 기파가 전해져 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마력이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 중 고수 아닌 이들이 없었고, 이미 이 마력의 주인과 사선을 넘어 본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깜짝 놀랄 만큼 매서운 마기였다.
호요성이 문으로 눈을 돌렸다.
아직 열리지 않은 문틈 사이로 어둠보다도 시커먼 흑색의 기류가 스며 들어오는 듯했다.
“교....”
파지지직!
합금으로 만든 대전의 철문 표면에 어두운 청색 번갯불이 그물처럼 번지다가 사라졌다.
그 번갯불을 보는 순간, 호요성은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환청인지 뭔지 모를 목소리가 지하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 걱정하지 마라.
'......!'
그것은 이천상의 목소리였을까, 아니면 이미 이곳에 도착한 또 다른 천마의 목소리일까.
호요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대전 밖에서 한 검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께서 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