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새로운 그림자를 드리우다 (4)
서량이 향한 곳은 바로 고죽림(孤竹林)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와 보는 곳이었다. 여강휘를 보러 올 때도 들어왔었지만, 그때는 이곳을 둘러볼 생각이나 여유가 없었다.
"여전하군.”
휘이이잉.
댓잎을 스치며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서량의 옷깃을 건드렸다.
서량은 눈을 감았다.
'정말 힘들었지.’
고죽림에 들어와 난장을 피웠을 때가 떠올랐다.
기괴한 영물, 아니 귀물들과 피 튀기는 생사전을 벌였던 때였다. 아직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은 몸으로 용케 살아남았더랬다.
만약 마동필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더하여, 이천상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다.
서량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때? 옛날 생각나지?"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교주님.”
“그때 정말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마동필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서량 말마따나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겪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다시 찾은 이곳에서, 더 이상 과거의 섬뜩함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호요성이 조심스레 물었다.
“교주님.”
"음?”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여기는 어찌?"
“만날 사람이 있어서.
"예? 여기에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교주의 명령 없이 고죽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한 명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대호법님.”
호요성이 엄태경을 바라보았다.
엄태경은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죽림 깊숙한 곳을 쏘아보고 있었다.
“대호법님이 계신다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엄태경은 그저 한없이 깊은 눈으로 숲속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분이 여기는 왜?!"
그렇지 않아도 왜 대전에 오지 않았나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적어도 호요성이 보는 무담은 그런 자리에 빠질 사람이 아니었다.
믿고 따랐던 주군의 죽음에 거동도 못 할 지경이다? 그건 무담이라는 남자를 지나치게 얕보는 처사다.
설령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제 할 일은 다 하고 갈 남자가 바로 무담이었다.
한데 그가 고죽림에 있었다니?
“이곳이 자신의 마지막 자리라고 생각하니까.”
퍼뜩 놀란 그들이 서량을 보았다.
놀랄 만한 말을 뱉었음에도 정작 그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같이 들어가지.”
“아, 예!”
일행이 고죽림 안으로 들어섰다.
마동필은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멀리서 고죽림을 봤을 때, 께름직함보다는 추억을 느꼈다. 당시에는 위험했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처럼 강해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안으로 들어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고죽림의 귀물 중에는 초절정고수에게도 위험한 것들이 널리고 널렸다.
물론 느닷없이 습격을 해 온다 해도 서량이 있으니 별문제는 없겠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긴장 안 해도 된다, 동필아.”
“예?”
“어차피 놈들은 날 건드릴 수 없어. 아니, 오히려 피하려 들겠지.”
피하려 들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던 서량은 자신의 가슴을 매만졌다.
'여기에 있어.’
지금껏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고죽림의 핵.
금호를 처음 만났을 때 취했던 그 영죽이 자신의 체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도 의식하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흐릿했지만,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풍성한 야생의 기운이었다.
‘그 영죽의 핵 때문에 귀물들은 날 공격하지 못해.'
그 생각을 하자 금호가 떠올랐다.
'넌 지금 어디에 있냐.'
수천 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금호와의 유대는 끈끈했다.
그러나 이천상이 사라진 이후, 더 이상 금호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물론 금호가 죽었다거나 영기(靈氣)의 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서량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직 금호가 세상에 남아 있다는 것을.
'언젠가 돌아오겠지.'
금호가 크게 다쳤거나, 영성(靈性)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서량은 그 의문을 가볍게 흘려보냈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츠츠츠츠.
널찍한 공터 가운데 작은 평상 위에, 건장한 체구의 노인이 등을 돌린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마기는 완벽하게 정제되어 있었다.
호요성 역시 나름의 무공을 익힌 고수임에도 느끼지 못했을 만큼 자신의 기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서량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호요성, 마동필, 엄태경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대호법.”
우우웅.
희미하게 피어오르던 마기가 싹 사라졌다.
노인, 무담이 평상에서 일어나 땅으로 내려왔다.
“군림성교, 천마불사. 신교의 죄인이 교주님을 뵙습니다.”
스스럼없이 서량을 교주로 인정하는 그였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게.”
“예, 교주님.”
조심스레 일어난 무담이 고개를 숙이고 섰다. 무척이나 공손한 자세였다.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나를 교주라 불러 준 건 고맙지만, 그리 딱딱하게 서 있을 필요는 없네.”
“신교의 주인을 향한 당연한 예입니다.”
딱딱한 양반 같으니.
서량은 평상으로 가서 앉았다.
“옆에 앉게.”
“하오나 교주님.”
"명령이야.”
무담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그가 조심스럽게 서량의 옆에 앉았다.
“내게 전해 줄 것이 있지?"
“그렇사옵니다.”
“그래, 사부님께 들었지.”
멀리서 그 말을 들은 호요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해 줄 것이라니, 그게 대체 무엇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마동필과 엄태경도 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서량이 물었다.
“전해 받을 것은 받아야지. 하나, 굳이 그걸 전해 주자고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었어.”
“송구하옵니다만, 교주님. 본디 저는 이 자리에도 있을 자격이 없는 대역죄인입니다.
당장 형법당의 가장 깊은 뇌옥에 갇혀서 억겁의 고통을 받아도 모자랄 위인입니다.”
“자네가 왜 죄인인가?"
“저는 한참이나 부족한 능력만을 지니고도 신교의 대호법이라는 영광된 자리에 앉은 부적합자였습니다.”
"....."
“전대 교주님께서 타계하신 것은 전부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나. 사부님께서는 일부러 자네를 놓고 가셨어.”
“전대 교주님께서 명을 내리셨다 한들, 저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전대 교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먼저 죽었어야 할 몸입니다. 그런 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마신궁에 들 수 있겠습니까.”
지독한 충성심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서량은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천상을 향한 무담의 충성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이천상이 농담으로 죽으라 해도 그 말에 서슴없이 따를 사람이 바로 무담이었다.
"자괴감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내 한마디 하지."
“...... ”
"엄밀히 말하자면 자네는 죄인이 맞네.”
무담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네는 신교의 대호법임에도 신교를 제대로 지키지 아니하였어.
이유야 어찌 되었든, 신교의 분위기와 상황이 심상치 않다면 자네가 나서서 바로잡았어야 했네. 자네는 그것을 못 했어.”
“송구하옵니다.”
“직무 유기. 그것이 자네의 죄일세. 그래서 나는 자네를 석 달 감봉형에 처할 생각이네.”
무담이 놀라서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사부님을 향한 자네의 충성심이 누구 못지않다는 걸 모르지 않아.
그러나 자네는 호법원주야. 교주를 향한 충성은 당연하고, 나아가 호법원주답게 신교를 재정비했어야 했네.”
“.......”
“그러나 사부님이 중원에서 돌아가실 줄은 누구도 상상치 못했겠지.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하고 있네.
그래서 석 달 감봉으로 죄를 축소한 것이니, 나중에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게.”
“교주님. 저는..........”
“자네까지 미망에 빠지지 말게.”
“......”
“자네 목숨이 끊어지는 그 날까지 신교를 지키게.
믿음직한 후계가 있으면 대호법 자리를 물려줘도 상관없지만, 현역에서 물러나서도 신교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
“그것이 자네가 할 일이네.
자네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교주이지 내 스승이 아니며,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신교를 지키는 것이지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야.”
무담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수십 년간 신교의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애쓴 자네의 노고는, 비단 나만이 아니라 모든 마인이 알고 있네.
부디 자네가 이룩한 지금의 신교를 외면하지 말았으면 하네.”
“.......교주님.”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일세."
무담은 서둘러 평상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찌 제게 부탁을 하십니까. 신교의 마인이라면, 그저 교주님의 명령에 절대복종함이 당연합니다.”
“그래. 그래서 자네는 죄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어. 사부님께서 자네더러 따라오지 말라 명하신 것은, 자네가 이런 모습을 보여 주길 바라셔서가 아니야.”
무담이 입술을 깨물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부탁이 부담스럽다면 명령을 내리겠네.”
서량의 두 눈에 강렬한 광채가 깃들었다.
“자네의 남은 인생, 나와 함께 불태워야겠네.”
“교,교주님!”
“힘에 겨워 헐떡여도 봐주지 않을 테니 목숨 걸고 쫓아오게나. 미리 말하지만, 나는 멋대로 떨어져 나간 이들까지 챙겨 줄 정도로 아량이 넓은 이가 아니야.”
무담이 땅에 이마를 박았다.
쿵!
“신(臣), 호법원주 무담이 교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이만 일어나게.”
무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무담의 볼 위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전대 교주의 마지막을 보지 못한 죄책감, 전대 교주와 함께 죽지 못한 슬픔, 그리고 새로운 교주의 격려를 통한 기쁨이 한데 묻어나는 눈물이었다.
“자네를 믿네.”
“목숨을 바쳐 교주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선대 주군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을, 새로운 주군을 향한 충성으로 이겨낸다.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늙은 충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서량이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가 받아야 할 것을 줘, 손 많이 가는 충신 양반.”
*
*
*
다음 날.
“교상을 미루겠다고요?"
“그렇습니다.”
호요성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비궁주는 결코 담담할 수 없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새 교주의 대관, 그리고 교주의 교상은 전적으로 비궁에서 관리합니다. 제아무리 교주라도 이 권한을 넘볼 수는 없어요.”
“정작 마인들은 대관과 교상을 비궁 측에서 관리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지금 뭐라고 했나요?"
호요성이 허리를 세웠다.
“교주님의 전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전언?”
비궁주의 눈이 깊어졌다.
전언이라니? 새 교주, 아니 신임 교주가 될 젊은 청년이 자신에게 전할 말이 무엇일까?
“새로운 시대, 천마신교에는 비궁이 없어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
“교주와 극소수만이 아는 집단인 비궁은 차후 사제관(司祭館)으로 개명될 것이며, 그 존재를 모든 마인에게 알릴 것입니다.”
“.......!!"
“이것이 교주님의 전언입니다.”
비궁주의 눈에서 벼락이 쏟아졌다.
“농담이 심하시군요.”
“농담이 아닌 전언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교주님의.”
"......"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마신궁으로 직접 찾아오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호요성이 그녀에게 인사를 올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을 나섰다.
비궁주의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이천상도 본 적이 없는, 아주 무서운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