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405화 (405/774)

405화. 새로운 그림자를 드리우다 (5)

"여기도 오랜만이군.”

판마정(判魔亭)으로 들어온 서량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참 신기한 곳이야.'

온통 새하얗다.

예전처럼 주변 풍경이 달라지지 않았다. 두 발 딛고 선 땅도, 끝도 없이 뻗은 하늘도 시야에 잡히는 모든 부분이 하얗기만 했다.

'진법의 축이 없으니 당연한가.'

판마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이천상에게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어제, 무담에게 판마정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도 들었다.

"거참, 할 일 무지하게 많군.”

아직 정식으로 교주의 대관을 치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교주로서 할 일은 태산처럼 많았다. 교내 안정이나 중원 정세에 대해 분석하는 것은 당연하고, 교주로서 갖춰야 할 능력과 소양도 있었다.

하나하나 천천히 밟아 가고 싶었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판마정이었다.

“동필아.”

“부르셨습니까, 교주님.”

깍듯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마동필은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멀끔해 보였다.

머리카락은 물론 수염도 깔끔하게 정리했고, 교주 최측근 호위답게 복식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실용적이었다.

“대호법은 지금 뭐 하고 있지?"

"오늘 아침 호법원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한참 호법원을 정비 중일 것입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군.”

“그리 예상됩니다.”

“그럼 뭐, 내가 알아서 해야겠군.”

서량이 품에서 얇은 서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서책 표면에는 유진도형결(幽陣圖形)'이라는 다섯 글자가 웅장한 필치로 쓰여 있었다.

‘아직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공부들이 많군.”

유진도형결은 교주와 판마정을 이어 주는 일종의 길목이었다.

운기(運氣)가 필수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내공심법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군림마황기로 이곳을 교주가 원하는 환상의 세계로 만든다는 면에서 보면 술가축기(術家畜氣)의 일종이기도 했다.

무공과 술법의 조화다. 고죽림을 본떠 만들어진 세상을 사람과 이으니, 이는 곧 고죽림과 시랑의 관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인위적으로 만든 환상의 세계를 사람과 연결한다...... 최소한 구유마공급의 마기가 아니면 시도조차 할 수 없겠군.'

본디 천마불패요, 천마불사라고는 하지만 세상사 이치는 독보천하를 허락하지 않는다.

항상 천적(天敵)을 내리기 마련이며, 그래서 천하제일도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천도(天道)를 역행한 유일한 사람이 이천상이었다.

천적 없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천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땅에는 대적할 자가 없어 하늘이 직접 그를 데려가 버렸으니, 진정한 의미로 천하를 오시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판마정에서는 다르다.

판마정과 연결될 시, 그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교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말하자면 판마정은 오롯이 천마신교 주인의 영역이란 뜻이다.

즉, 판마정이라는 국소적인 영역 내에서만큼은 천마가 무적이 확실했다.

그것은 극에 이른 술법가도, 세상 이치에 통달한 도불의 수행자도 바꿀 수 없는, 말하자면 하나의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사부님께서 십 년이 넘도록 하늘의 부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판마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서량이 가장 먼저 무담을 찾고, 판마정에 들어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판마정부터 내 것으로 만들어야 일이 편해져.'

판마정은 오로지 교주의 것이다. 교주의 상징 중 하나로고도 볼 수 있겠다.

제아무리 정통성 운운한다 한들, 이미 판마정을 제압해 버린 교주에게 왈가왈부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문밖을 지켜라.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예, 교주님.”

그렇게 판마정 안에는 서량 홀로 남았다.

맨바닥에 앉아 유진도형결을 편 그가 구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

*

*

"벌써 들어가셨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무담의 얼굴에 작은 긴장이 드리워졌다.

“홀로 판마정을 제 것으로 만드시겠다니, 과연.”

마동필이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음?”

"아, 왠지 대호법님의 말씀을 들어 보니 판마정과 연동(連動)되는 것이 꽤 어려운 일인 듯하여.......”

“당연히 그렇다네.”

마동필이 서량의 개인 호위가 되기 전까지, 무담은 마동필의 직속상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치가 다른바, 무담은 예전처럼 마동필을 부하 대하듯 하지 않았다.

아닌 듯하면서도 그는 그런 부분에 대해 세심할 줄 알았다.

“판마정은 본교의 역사와 함께해 왔네. 그곳은 오로지 교주님의 영역이야.

나아가 신교 최강자가 아니고선 감히 다룰 시도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까다로운 진법이기도 하네.”

“까다롭다......?”

"해서 세대가 교체되면, 전대 대호법이 새 교주님을 도와 판마정의 연결을 구축했다네.

물론 주체가 되는 것은 교주님이며, 대호법은 그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작은 오류나 힘의 파편을 정리해 주는 정도였지만."

마동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교주님 혼자서는 무리라는 말씀인지요?"

“그렇지는 않네. 판마정을 홀로 제압할 힘과, 무공과 술법 양면에 대한 이해도가 지극히 뛰어나다면 단신으로도 연동시킬 수 있지. 하나.......”

무담의 얼굴에 걱정의 빛이 떠올랐다.

항상 무뚝뚝하기만 했던 평소의 그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역대 교주님 중 홀로 판마정과 연동한, 다소 과격하게 말하면 제압해 버린 분은 다섯이 넘지 않네.”

“......”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네. 제아무리 신(神)으로서 군림한다지만 교주라는 자리는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

혼자서 판마정을 제압하느니, 대호법의 도움을 받아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이득이니까.”

“그렇군요.”

"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어려운 건 매한가지일세. 실제로 역대 교주님 중 몇몇 분이 단신으로 도전했지만 대부분이 실패하셨다네.”

“교주님은 다르실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야. 실패하신 분 중에는 오대천마(五代天魔)도 계셨으니까."

마동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마신교 역사상 천마의 칭호를 받은 이는 전대 교주님까지 아홉 분밖에 되지 않는다. 당대 교주님까지 쳐도 열 명이다.

천 년의 역사를 헤아리는 신교에서 그간 얼마나 많은 교주가 배출되었는가. 그중 열 명밖에 없을 정도로 천마라는 칭호를 받기란 지난(至難)한 일이다.

한데 역사상 열 명밖에 되지 않는 천마 중 한 분께서도 실패하셨단다.

'대체 판마정이 무엇이기에?'

가만히 문을 바라보던 마동필이 고개를 저었다.

“설령 실패하신다 한들 문제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음?"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지만, 설령 판마정을 제압하지 못하신다 하더라도 다시 대호법님의 도움을 받는다면.......”

“물론 그렇다네. 몸이 다 나으신 후에 그리하시면 되겠지.”

“예?”

"연동된 자의 마음대로 이치를 뒤바꾸는 고난도의 진법일세. 실패할 시, 극심한 내상을 입을 가능성이 크네.”

“.....!”

마동필은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담의 얼굴에 떠오른 걱정의 기색을.

"교주님은 전대 교주님께 이미 천마의 칭호를 받으신 분이야. 그 강함이야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문제는 시간일세."

“시간....”

“내 지금까지 교내 상황을 둘러보니, 교인들이 잔뜩 흥분해 있었다네.

내성이고 외성이고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러했지.

하물며 수뇌부들도 자리가 잡히지 않았는데 교상은커녕 대관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상으로 몸져누우신다면....”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겠군요.”

“바로 그렇다네.”

마동필은 광마존을 떠올렸다.

속내가 어떻든, 대전에서의 그는 분명 선을 넘었다. 하지만 누구도 광마존을 제지하거나 그에게 호통을 치지 못했다.

그가 원로원주라서? 결코 그렇지 않다.

'명분이 없는 것이다.'

전대 교주님의 마지막을 보았고, 그분께서 직접 교주가 되라 말씀도 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실질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 무도하기 짝이 없는 광경을 보고도 왜 호요성이 광마존을 형법당으로 보내지 못했겠는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잠시나마 상대의 기세를 꺾을 수는 있을지언정, 진정 교주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광마존 정도 되는 이를 억누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천마군을.......”

“절대 안 되네.”

“예?”

“천마군을 이용해서 마존들을 억압하고 교주님의 권리를 교내에 알리자는 뜻 아닌가?"

"맞습니다.”

“그래선 안 되네. 그 행위 자체가 교주님 스스로 없는 권리를 위해 애쓴다는 기색으로 보일 위험이 있네.

그리되면 원로원 측에서도 당장은 쓰지 못했던 과격한 방법을 동원하겠지."

“과격한 방법이라 하심은?"

무담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반역.”

츠츠츠.

마동필의 몸에서 지독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들이 반역을 꾀하려 한단 말입니까?"

"아닐세. 오히려 교주님을 반역자로 몰아 버릴 위험이 있네.”

“....!!"

“물론 실제로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수십 년간 웅크린 채 발톱 한번 시원하게 휘둘러 보지 못한 노룡(老龍)들일세.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그렇군요.”

무담이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모두 내 잘못일세. 전대 교주님께서 타계하셨다는 충격에 교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어.

그 불손한 움직임을 미리 간파해 두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흐르진 않았을 것을.”

마동필도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니,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느냐부터 신경을 쓰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자네 말이 맞네. 그러나 그 한 번의 실수가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군.”

무담이 마동필의 어깨를 두들겼다.

“교주님께서 나오시기 전까지 나와 총군사가 어떻게든 교내 상황을 안정시켜 보겠네.

자네는 아무 생각 말고 이곳을 지키게. 호법원에서도 일 조와 이 조를 보내 마신궁 전체를 호위하라 명하겠네.”

“감사합니다.”

"수고하게.”

하지만 상황은 그들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고 과격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소문의 시작은 어디였지?"

호요성의 제일 심복, 천비(天秘)가 말했다.

“정확하게 파악하긴 힘듭니다. 하지만 외성이 아닌 내성에서부터 시작된 소문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호요성의 얼굴에 서리가 내렸다.

“원로원인가.”

그야말로 신속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천천히 대응할 줄 알았는데, 아예 불씨부터 던져 놓고 시작하자는 뜻이 아닌가.

천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교주님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이러나저러나 본교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조직이야.

신을 향한 믿음은 사신(死神)조차 쫓아 버릴 만큼 강력하지만, 반대로 그 믿음이 흔들릴 때는 바늘 하나에도 무너져 내릴 수 있지.

신심(信心)이란 그런 것이니까.”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교주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지금껏 신교를 지탱해 온 충신들입니다.

어찌 이런 사단을 벌이는지.......”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호요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각에서 문건 정리 좀 부탁하겠네.”

"어디 가십니까?”

"환희원주.”

"예? 환희원주요?”

호요성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장단을 맞춰 줄 줄 아는 사람일세. 먼저 치사하게 주먹을 날렸으니, 이쪽도 치사하게 나가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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