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패왕(鬪王)의 면모 (1)
“후우.”
깊게 뿜어내는 연기에 은은한 푸른 기가 돌았다.
일반 연초(煙草)는 아니었다. 게다가 푸른 기가 감도는 연기는 묘하게 무거워 보였다.
“이제는 이것도 못 피겠군.”
광마존이 곰방대를 툭툭 털었다. 탁탁 불꽃이 튀는 화로에 재를 털었지만, 제법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에 도리어 재가 날아갔다.
그때였다.
“원주!”
음야마존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큰일 났소!”
“어찌 그러시는가.”
“금일 부로 환희원에서 본원에 들어오는 식자재 및 생활 물품 전반을 모조리 끊겠다 하오! 또한 호법원에서도 본원의 경비를 모두 거두어 갔소!”
광마존의 눈이 빛났다.
“환희원과 호법원에서?"
음야마존의 두 눈에 살기가 맺혔다.
“당장 찾아가서 따져야 하오! 이 요망한 것들이 어디 감히 본원을......”
“왜 그리 흥분하시는가?"
“그게 무슨 말씀이오?”
“생활 물품이 끊겼으면 밖에서 구하면 될 것이고, 경비야 어차피 의미도 없지 않나? 우리 한 명, 한 명이 만부부당의 고수이거늘.”
“그런 말이 아니잖소. 이것은 명백한 도전이외다!”
“도전이라...... 맞는 말이군.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네.”
“틀리다니?”
광마존은 여유롭게 곰방대를 물었다.
무거운 연기가 코와 입 사이로 슬슬 흘러나왔다.
“저쪽에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 거란 뜻일세. 우리가 먼저 건드렸으니, 제대로 대응해 주겠다고 선전 포고를 날린 것이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것은 너무 치졸하지 않소이까!”
“그래서 그런 걸세.”
“그래서 그렇다니? 나는 원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천마군을 대동하여 본원을 급습하면 속 편할 일이라네. 그러나 그리하면 소교주의 정통성 문제가 부각될 수 있어.
더하여 교내에 도는 소문에도 힘이 실리게 되겠지.”
“그들은 지금 우리의 생활 편의에 오물을 던진 게 아닐세.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야.”
광마존이 피식 웃었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추해져. 인내심도 없어지고, 사소한 일에도 욱하게 되지.
호요성, 그놈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다네 필경 환희원주를 부채질한 것은 그놈일 게야.”
츠츠츠츠
음야마존의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당장 손봐 줄 수는 없다는 뜻이오?"
“손이야 봐 줄 수 있네만, 그리하면 우리의 앞날이 제법 꿉꿉해지지 않겠나?"
“호요성, 이 망할 놈이.......!”
“천마군을 대동하지 않은 이유 중 또 하나가 바로 이것이네. 우리가 힘으로 뒤엎으려 든다면, 우린 빼도 박도 못한 반역자가 되네.”
광마존은 호요성이 입교한 첫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 속, 수천 마리의 구렁이와 늑대 같은 포악함을 감추고 있는 젊은 잠룡을 기억했다.
"힘겨루기를 머리싸움으로 끌고 갔어. 여기서 섣불리 반응했다가는 파국을 면치 못하겠지.
그놈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네. 놈은 싸움판을 제 입맛대로 바꿀 줄 아는 놈이야.”
"하면 이대로 당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오?!"
“물론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
몇 번 곰방대를 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루와 철검은 뭐 하고 있나?"
“거처에 틀어박혀 있소.”
“역시 똑똑하구먼.”
“똑똑한 것이 아니라 바보 같은 것 아니겠소? 시류를 제때 읽지 못하니 골방 늙은이로 죽기에 딱이외다.”
음야마존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애초에 그는 고루마존과 철검마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쉬고 있게나.”
"어딜 가려 하시오?”
“마신궁.”
음야마존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원주.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신궁은....”
“걱정하지 말게. 그저 들은 게 있어서 확인차 가 보는 것이니까.”
“무슨 말씀이오?”
광마존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지켜보면 안다네.”
*
*
*
“마신궁으로 향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호요성의 눈이 번뜩였다.
“누가 함께하고 있지?"
“원로원주 홀로 가고 있습니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야.”
군사부에서 나온 호요성은 재빨리 마신궁으로 향했다.
여유롭게 마신궁으로 향하는 광마존과 달리, 그의 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 다급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가 마신궁 앞에 도착하자, 때마침 저 멀리서 광마존이 걸어왔다.
"흐음, 과연 대단하구먼.”
광마존의 첫마디는 그러했다.
“자네와 얼굴을 마주한 적은 그리 많지 않지. 하지만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네. 본교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을 꼽으라면 자네는 무조건 첫손에 꼽힐 이라고.”
호요성이 씨익 웃었다.
“역시 원주님께서는 제 가치를 알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제 밑에 애들은 저를 문서에 도장이나 쾅쾅 찍어 낼 줄 아는 문사 나부랭이로만 봐서요.”
“그럴 리가 있겠나? 자네는 교주님께서 직접 뽑으신 인재이거늘.”
“전대 교주님이 뽑으셨지요.”
광마존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호요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만 인정하시지요?"
“무엇을 말인가?”
“빙빙 말 돌려 가면서 상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건 제가 선호하는 방식 중 하나이긴 합니다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허허.”
"교주님은 전대 교주님께서 극찬하신 분입니다.
몇몇 생각 없는 바보들은 교주님의 나이를 두고 불안해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대단하다는 건 인정하지 않지요.”
“그렇기야 하지.”
“어차피 극마에 올라 한 세대는 더 사실 것 같은데, 조금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조만간 본교가 세상에 나서면 그때는 근질근질한 손을 푸실 수 있을 텐데요.”
광마존이 껄껄껄 웃었다.
"다 늙어서 싸움질이라니? 내 젊었을 적에는 제법 열혈이었네만, 이 나이 먹어서까지 피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네.”
“호오? 하기야, 원주님 연배가 되면 직접 손을 쓰는 것보다는 지시를 내리는 게 더 편하고 안락하긴 할 겁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이 난동을 부리는 상대의 무도함을 비웃는 말이었다.
당연히 광마존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구십 년 가까이 살아오며 단련된 그의 노회함은 고작 말 몇 마디로 무너질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뭐가 되었든, 자네는 자네 일을 하게나.”
“물론입니다. 그래서 근래 골치를 썩이고 있잖습니까.”
“과연 자네의 배포는 그 지혜만큼이나 대단하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아닐세. 자네도 본교에서 제법 오래 생활해 봤으니 알 걸세. 정의 없는 힘은 공포와 위압이라도 주지만, 힘없는 정의는 공허한 죄악에 불과하다는 것을."
호요성의 눈이 번뜩였다.
“그 정도야 알고 있지요. 나아가 한 가지 더 알고 있습니다.
힘 있는 머저리들이 대의와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고 날뛰게 될 때, 얼마나 골치 아픈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광마존이 피식 웃었다.
“하기야, 음야가 다소 거친 면이 있지.”
자신을 두고 말하는 걸 알면서도 그리 말한다. 호요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만 포기하십시오.
지금이라도 물러나신다면 편안한 노후를 약속드리는 것은 물론,
훗날 교주님께서 중원에 진출하실 때 결정적인 승부처에 투입되실 수 있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포기라니? 나는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시작해 본 적이 없거늘.”
“정말 그렇게까지 하실 겁니까?"
“자네는 나에 대해 모르네. 내가 무엇 때문에 굽은 허리를 두들기며 이리 돌아다니고 있는지.”
호요성의 얼굴에 조소가 피어올랐다.
“하나는 알겠습니다. 그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추하다는 것을요.”
광마존이 씨익 웃었다.
지금까지의 웃음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제아무리 노회한 그라도 호요성의 거친 언사에 심사가 뒤틀리고 만 것이다.
“내 감히 한마디 하겠네.”
“말씀하십시오.”
“훗날 나의 뜻을 신교가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네. 그때, 자네는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게야.”
의미를 알기 힘든 말이다.
호요성은 광마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찌푸려진 얼굴은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상당히 복잡한 감정도 엿보이는 듯했다.
그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의미지?'
다소 위험하게 해석될 수 있는 말이라는 건 확실했다.
광마존의 저 말은, 마치 자신의 반역이 성공할 때 아군이 될지 적군이 될지 잘 선택하라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그러나 어조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생각 외로 그리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호요성은 당황했다.
광마존이 표정을 풀고 말했다.
"어쨌거나, 자네는 나를 보러 온 것 같네만 나는 더는 자네와 대화하고 싶지 않네.”
“향 좋은 찻잎을 제법 구비해 두고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제 거처로 가서 한잔하시지요.”
광마존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내 발로 호혈(虎穴)에 들어가란 말인가? 난 그리 멍청한 사람이 아닐세.”
“호혈이라니요? 이거 좀 섭섭합니다. 제가 언감생심 신교의 큰 어른을 상대로 수작질이라도 부릴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자네는 상황에 따라 누구보다도 잔혹해질 수도, 교활해질 수도 있는 사람일세.
내 자네를 칭찬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자네의 대단함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으이.”
“기분이 묘하군요.”
“자네가 내 앞에 이리 나타난 순간, 나는 생각했다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절대 군사부로는 가지 않겠다고 말일세."
다른 걸 떠나서 저 예리한 직감 하나만큼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당대 신교를 떠받들고 있는 중추 세력의 수장들은 하나같이 그런 면모가 있었다.
머리나 무공도 뛰어나지만, 특히나 감이 좋다. 그것은 신교제일의 천재라는 호요성조차 쉽게 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협적인 무기였다.
'안타깝군.’
느낌, 직감, 육감.
지식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강력한 힘이다. 이천상이 처음 호요성에게 내려 준 가르침에도 그러한 부분이 강조되어 있었다.
'노회하다는 평가는 받을지언정, 경험으로 축적된 저 직감만큼은 진짜다. 그런데도 왜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머리를 들이밀려는 것인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역전시킬 만한 한 수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호요성은 인생의 마지막을 불태우려는 자가 선을 넘을 때, 얼마나 무시무시해질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네와의 대화는 이걸로 끝내고 싶네. 돌아가게.”
“마신궁에 들려 하십니까?"
“자네가 알 바 아닐 텐데?"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아야지요.”
“뭐라?”
“저는 호법은 아니지만, 신교의 내외에 누구보다도 깊게 관여하는 총군사입니다. 반역의 위험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마신궁에 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츠츠츠츠,
광마존의 몸에서 섬뜩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천하의 호요성이라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강력한 힘이었다.
“지독한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군. 자네의 그 세 치 혀 말일세.”
“아직까지 단점으로 작용한 적은 없었습니다만.”
"하면 오늘 깨닫게 되겠구먼."
첨예한 대립이 정점에 이를 때였다.
쿠궁!
마신궁 전체가 뒤흔들렸다.
마기로 인한 지진은 아니었다. 거대한 힘과 힘이 부딪치며 발생한, 일종의 충격파와 비슷했다.
호요성의 눈이 흔들렸다.
교주님?’
광마존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판마정.”
“잠깐!”
호요성 앞에서 사라져 버린 광마존이 어느 순간 마신궁의 대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무시무시한 보법, 마황군림보법이었다. 이천상이 후계 후보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전수했다는 수하가 그였다.
광마존의 손이 올라갔다.
마신궁의 문을 지키던 흑백위장들이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멈....”
콰아앙!
마신궁의 대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