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패왕(覇王)의 면모 (3)
“총군사!”
늦었지만 움직임은 신속했다.
순식간에 마신궁 안으로 들어온 무담이 호요성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뭐 하는 것이오?"
호요성은 말없이 쓰러진 호위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무담이 표정을 굳혔다.
“호 군사!”
"아무래도 제 판단이 옳았던 모양입니다.”
“........?!”
호요성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노회하기가 구렁이 찜 쪄 먹을 사람인 줄 알았더니만, 이렇게도 단순 무식할 줄이야.”
“무슨 말이오?”
"하긴, 평생을 충성하면서 살아왔으니 본인이 해야 할 일에 있어서만큼은 어설플 수밖에 없었겠지.
하물며 신교를 적으로 돌린다는 상상은 해 본 적도 없었을 테니.”
“총군사!”
“안 죽었습니다.”
“뭐라고?”
호요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위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한 명도요. 죄다 혈이 짚여 기절했을 뿐, 목숨을 잃은 자는 하나도 없어요.”
무담의 눈에 마기가 스쳤다.
“그게 무슨 상관이요? 이럴 것이 아니라 어서 들어갑시다! 마 호위와 대치 중인 듯한데, 마 호위의 무공으로는.........!”
“광마존이 어떻게 판마정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겠습니까?”
“........?”
“마신궁의 호위들은 마존 셋이 돌파하려 해도 불가능할 만큼 대단한 실력자들입니다.
제아무리 최강의 마존이라는 원로원주라도 단신으로 돌파는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손속에 자비까지 둔 무공으로는 더더욱.”
“하지만 원로원주는 그리했잖소!”
“호위들이 물러난 겁니다.”
무담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뭐라?!”
“누군가의 명령으로 인해 물러난 겁니다.
호위들 역시 혼란스러워 즉각 반응하지는 못했겠지요. 그럴 만도 합니다.
마신궁에 침입한 자를 막지 말라니, 전대 교주님 정도가 아니면 그런 명령을 내리기 힘들지요.”
"대체 누가 호위들을 물렸단 말이오?!"
“누가 또 있겠습니까? 궁의 호위를 물릴 수 있는 분이?"
“......설마?”
호요성이 부서진 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노친네 같으니. 당신이 그리하지 않아도 교주님께선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거늘.”
*
*
*
우웅!
광마존의 주먹이 마동필의 가슴 반 치 앞에서 멈추었다.
주르륵.
마동필의 흑혈마검이 광마존의 쇄골을 반 치쯤 파고들다가 멈추었다.
화르르르륵!
두 사람의 마기가 얽히고설켜 매서운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마신궁을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력한 기세였다. 마동필의 기가 빠른 속도로 눌리고 있었지만,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듯 끝까지 버텨 내고 있었다.
츠츠츠츠츠。
판마정의 부서진 문 안쪽에서 어두운 안개가 흘러나왔다.
파지지직!
어두운 안개 곳곳에서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느끼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지독한 마기였다.
일류 고수라도 대하는 순간 정신이 나가 버릴 만큼 끔찍한 마기는 인세(人世)의 그것이 아니었다.
후우우웅.
두 사람의 마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툭.
큼직한 손이 벽을 짚었다. 손등을 가로지른 핏물은 진득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서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그의 행색은 처참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었다.
질 좋은 무복은 비렁뱅이의 누더기보다도 못해 보일 만큼 너덜거리고 있었고, 겉에 걸쳤던 장포는 증발이라도 했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었고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심하게 다쳤는지 왼쪽 다리를 절룩거리는데, 자세히 보면 정강이가 부러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파지지지직! 파직!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의 몸 곳곳에서 시퍼런 번갯불이 번뜩였다. 통제되지 않는 군림마황기가 제멋대로 방출되고 있는 것이다.
후우욱!
수습되지 않는 군림마황기 때문에 오히려 방 안의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졌다.
당장이라도 방 전체를 태워 버릴 듯 막강한 마기였다.
잔존하는 마기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혼신의 힘을 다해 출력을 올리면 마신궁이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쿨럭! 시파, 더럽게 힘드네.”
천마신교의 교주란 작자의 말투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 낸 서량이 억지로 허리를 폈다.
화르륵!
전신이 위험천만한 번개로 가득 찬 가운데, 하단전에서 솟은 붉은 마기가 부러진 정강이 쪽으로 몰려갔다.
우둑! 우두두둑!
“크윽!”
살벌한 소리와 함께 부러진 정강이가 저절로 맞춰졌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한나절 안에 나을 만한 상처였다. 다 낫지 않은 상태여도, 당장 싸움이 벌어지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광대무변한 절대마공의 치유력으로도 뼈를 맞추고 단단하게 경화(硬化)시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 구유마공까지 익혔기에 손상된 신경까지도 동시에 치료할 수 있었다.
서량이 왼발을 크게 내디뎠다.
쿵!
지독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러나 뼈는 제대로 맞춰졌다. 이제 붙는 일만 남았다.
그제야 서량이 편하게 벽에 몸을 기대었다.
“어느 정도 힘들 줄은 알았지만, 진짜로 목숨을 걸어야 할 줄은 몰랐구만. 이래서 무턱대고 덤비면 안 된다니까.”
스르륵.
반가움에 마공을 거둔 마동필은, 문득 광마존을 보았다.
주먹을 내리고 자세를 푼 광마존이 멍한 눈으로 서량을 보고 있었다. 이만저만 충격을 받은 게 아닌 듯했다.
마동필의 눈이 빛났다.
'지금!’
절호의 기회였다. 이 무도한 작자를 제압할 수 있는 시기는.
단숨에 검을 내리치려던 그때, 서량의 입이 열렸다.
“그만해라, 동필아."
“...교주님.”
“안 그래도 돼. 물러나.”
검을 회수한 마동필이 재빨리 서량의 옆으로 다가왔다.
당장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죄인이지만 그에게는 서량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그가 물러나라면 하늘이 무너져도 물러나야만 했다.
서량이 광마존을 보며 물었다.
“자네는 괜찮나?"
“......”
"중간부터 물리기는 했지만 호천마황단(天魔皇團)을 상대로 그만큼이나 버티다니, 과연 최강의 마존이라 불릴 만하군.”
광마존의 눈이 다시 본래의 색을 찾았다.
마동필은 긴장했다. 교주님의 명령에 물러나긴 했지만, 상대가 수상쩍게 움직이면 즉각 검을 날릴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어떻게........”
“음?”
“설마 판마정을 제압하신 겁니까?"
본래의 신색은 찾았지만, 아직 충격이 남은 모양이었다. 무덤덤한 표정 속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좀 더 여유 있게 상대했다면 오히려 실패했을 거야. 속전속결밖에 답이 없어서 냉큼 처리해 버렸지.”
“......”
“이런 무모한 짓, 앞으로는 하지 말아야겠어.”
“무모한 것이 아니지요.”
"음?”
광마존이 표정을 굳혔다.
“천마(天魔)는 불패입니다. 천마불패의 전설은 사람만을 상대로 하지 않지요.
상대가 이름 모를 진법이든 혹은 수천의 군세(軍勢)는, 천마는 지지 않고 져서도 안 됩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나를 천마로 인정하는가.”
"....."
“굳이 일을 이렇게까지 키울 필요는 없었어. 닷새 뒤에 들르겠다고 했는데, 그걸 못 참고 벌써 왔나.”
“대호법과 함께 신교의 체제를 재정립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따지기 위해서 왔나?”
“그렇습니다.”
불경하기 짝이 없는 언사였다. 마동필은 그렇게 생각했다.
감히 교주님을 똑바로 쳐다보며, 교주님께 무언가를 따지러 왔다는 광마존을 그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량은 달랐다.
“나와 대호법이 신교를 재정비하고 나면 교도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이고,
혹여 빠르게 안정시킨다 한들 여전히 불손한 생각을 지닌 채 따르는 사람도 생긴다.”
“.......”
“그렇게 생각했나?"
"다 알고 계셨습니까?”
“안다기보다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처음엔 말이야.”
“........그러셨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사부님은 마존들에게 눌릴 만큼 어설픈 이를 후계자로 세울 분도 아니지만, 여린 후계자를 괴롭힐 만큼 탐욕스러운 자를 원로원주로 임명할 분도 아니거든.”
“여린 후계자....... 여린 후계자를 둘 분이 아니긴 합니다.”
“그렇지.”
광마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전까지는 속을 알기 어려웠던 그가, 지금은 제법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서량이 표정을 굳혔다.
“아무리 그래도 자네, 너무 심했네.”
“...알고 있습니다. 이 늙은이의 죄는 만 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대죄이지요.”
“대화 한 번 나눠 본 적 없는 사이라지만, 그렇게나 날 믿기 힘들었나.”
“...... ”
“자네에게는 새로운 교주이자 천마를 도울 방법이 있었어. 가만히 있어 주기만 해도 자네는 내게 큰 도움이 되는 존재야. 한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나?”
“전 이미 죽은 몸입니다.”
“죽은 몸이라?”
광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감정을 갖게 했다.
“아마 대호법은 이리 말했을 겁니다. 전대 교주님이 돌아가신 것은 전부 자신의 탓이라고.
자신이 먼저 죽었어야 했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 대역죄인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겠지요.”
잘 알고 있군.
서량은 그가 말한 '전대 교주'란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속내를, 진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소소한 명칭의 변화 따위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저는 대호법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성격상 그와는 도무지 친해질 수 없었지만, 전대 교주님을 향한 충정만큼은 인정하고 있지요.
물론 그가 절 이해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저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뭐?”
“전대 교주님께 충성을 맹세했던 이들 모두가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광마존의 목소리는 묘했다.
어딘지 공허한 듯하면서도 힘이 느껴졌다.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에 강한 확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나친 자학 아닌가?”
“그분이 죽을 때 함께 죽지 않아서, 혹은 그분을 지키지 못해서 죽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교주님께서 그 자리에 앉으셨기 때문에 저희는 죽었습니다.”
서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치 빠른 그조차 광마존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고 보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지.”
“...차세대 신교의 중추가 될 이들은 자비로운 교주님을 모시게 되었군요. 다행입니다.
스르륵.
광마존이 무릎을 꿇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저는 신교의 교도로서 대역죄를 저지른 자입니다. 교주님께서 이미 짐작하고 계셨다고 하니, 제가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 ”
“이만 저를 죽여, 교도들에게 죄인의 죽음을 알리시길 바랍니다.”
그때였다.
"그래서는 안 되지요.”
저 멀리서 호요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줄곧 열려 있던 문 사이로 호요성과 무담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량을 보는 무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기도와 목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가 벌써 판마정을 제압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군림성교, 천마불사! 교주님을 뵙습니다!”
“일어들 나게.”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그래선 안 된다는 말은 또 뭐야? 물론 원주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만.”
“몇 번 반항 좀 했다고 써먹을 데 많은 종마를 벌써 죽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호요성이 광마존을 바라보았다.
모욕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했다.
“대신 혼은 좀 나야겠지요. 주인이 멀쩡히 살아 있거늘, 소유물이 제멋대로 죽으려 들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