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패왕(覇王)의 면모 (4)
말은 거칠었지만 목소리에선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그 안타까움은 풍상을 겪어 스러져 버린 지난 역사를 향해 있었다.
새로움이라는 단어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러나 누구도 잘못 살았다 평가할 수 없는 위대한 전 세대를 향한 존경과 아쉬움이 묻어났다.
“이미 교주님과 여러 대화를 나누셨겠지만, 저도 묻고 싶습니다.”
“꼭 이래야만 했느냐고?"
“그렇습니다.”
광마존이 감았던 눈을 뜨고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교주님.”
그는 서량을 교주라 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누구도 미소 지을 수 없었다.
광마존이 절을 올렸다.
"교주님을 앞에 두고 저희끼리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바라옵건대 허락해 주신다면, 그간 이 불충한 늙은이가 죄를 저지른 이유를 진실하게 들려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이전과는 상반된 태도.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서량은 깨달았다.
바로 지금 이 모습이 광마존의 진짜 모습이라는 걸. 유들유들하고 노회한 겉모습으로 포장된 그의 심장은, 오로지 교주를 향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네.”
“성신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광마존이 자세를 바로 했다.
호요성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겁니까?"
“총군사, 자네가 궁금한 것은 이유가 아닐 것이네.”
“.....”
“마신궁 앞에서 말했듯, 자네는 칭찬받아 마땅할 천재일세.
자네처럼 명민한 사람이 내가 이런 짓을 벌인 이유를 모르진 않을 것이네.
다만 자네가 알고 싶은 것은, 다른 길이 있었음에도 끝끝내 삶을 포기한 나의 선택에 있겠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생각합니다. 똑똑한 머리로 진실을 더듬어 볼 수는 있지만, 진심을 느낄 수는 없다는 것을요.”
"....."
“부디 들려주십시오.”
“자네는 참으로 고약한 사람일세."
광마존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을 닮아 있었다.
“전대 교주님께서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이 무엇인 줄 아나?"
“슬픔이 아닐는지요.”
"틀렸네. 나는 화가 났었네.”
화가 났다.
평생을 모셨던 주군이자 신에게 화가 났단다. 불충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지만, 그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전대 교주님께서는 신교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분이시네.”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그분의 힘이나 정치력 때문이 아니야.
그분은 과거,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본교를 수습하고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이끄신 분일세.
전전대 교주와 수뇌부들의 폭정에 지친 우리에게 그분은, 그야말로 한 줄기 빛과도 같았네.”
광마존의 목소리는 알 수 없는 아련함을 담고 있었다.
“나는 말일세, 그저 그분이 다스리는 시대의 한 축으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무한한 영광을 느꼈다네.
그분과 함께 출정하여 그간 익히고 쌓아 둔 마도의 힘을 분출하는 것은 너무나도 영광된 일이겠으나,
그리하지 않아도 난 하루하루를 충만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네.”
“......"
"그분은 그런 분이었네.
젊은 시절, 신교를 뜯어고치기 위해 애를 썼으나 결국 실패하고 뇌옥에 갇혀 버린 한 마인의 가슴을 다시 두근거리게 한 분이며,
몽상이라고 치부해도 이상하지 않을 미래를 수년 만에 개척해 낸 진정한 신(神)일세."
격정적인 목소리가 아님에도 듣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천상이란 존재의 빈 자리를. 그가 얼마나 위대한 마인이요, 훌륭한 교주였는지를.
“그런 그분이 저 중원 땅, 서늘한 북부의 적지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네.
말했듯,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한 분노를 느꼈다네. 그 분노는 달리 배신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네.”
“전대 교주님께 배신감을 느꼈다는 겁니까.”
“나는 알고 있네. 전대 교주님은 중원 놈들에게 당하신 게 아니라는 것을.”
광마존의 목소리에 짙은 확신이 어렸다.
“어떤 고수가 있어 감히 그분을 해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천하가 통째로 덤벼든다 한들 그분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할 걸세.”
그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가리키는 곳은 천장이었지만 하늘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분은 저 하늘의 명조차도 거부하신 분.
즉, 그분은 당신께서 귀천(歸天)하실 장소를 스스로 정하실 수 있는 분일세.
그분이 출교하신 것은 교주님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께서 죽을 자리를 찾아가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네.”
누구도 이천상의 속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욕계문으로 연결된 서량만이 이천상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서량은 놀랐다. 이 늙은 충신은 욕계문으로 이천상의 마음을 들여다본 자신만큼이나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았네. 그분이 왜 나를, 우리를 데려가지 않으셨는지.
그리 돌아가실 것이었다면 우리와 함께 한바탕 시원하게 날뛰고 가셔도 되었을 것을, 어찌하여 홀로 가신 것인지 궁금했네."
무담은 광마존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아마 광마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일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네. 그분께서 당신의 후계자를 얼마나 믿고 계시는지. 동시에 또 하나 깨달았네.
그분이 나를 필두로 한 원로들에게 원하신 것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원하셨던 겁니까.”
“거름.”
호요성의 눈이 깊어졌다.
광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교주님께서 대전에서 말씀하셨지. 그분은 더 줄 것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시고는,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던지셨다고.”
“...... ”
"교주님의 말씀은 실로 옳으시네.
그분께서는 교주가 된 이후,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신교와 후계자를 위해서 살다 가셨네. 말하자면, 오직 미래를 위한 삶이었단 말일세."
미소 짓던 광마존이 탄식했다.
“그분은 거름이 되어 가셨거늘, 우리라고 어찌 배 두드리며 살 수 있겠는가.
그분께서 하지 않으신 일을 감히 우리가 할 수는 없다네. 이제 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야.”
“거름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불쾌하고 더러워서 누구도 만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십년 뒤, 백 년 뒤에는 신교를 지금보다도 더 거대한 나무로 성장케 할
진한 거름이 되어야 하네.”
“그래서 교주님께 무례를 저지르셨군요.”
“그렇다네.”
일견 이해하기 쉽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광마존이 무엇을 계획했고, 어떤 최후를 맞이하려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신교의 반역자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교주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권력을 약화시키고 수뇌부들을 분열케 한 반역자가 되어 죽으려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다른 조직들도 비슷하지만, 특히나 신교 같은 종교 세력을 똘똘 뭉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적(敵).
사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이들을 똑같은 감정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은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적을 만드는 것이다.
공동의 적은 아군의 유대를 강하게 만든다.
그 적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악하면 사악할수록 조직은 똘똘 뭉치게 될 것이며,
그 적을 물리친 이후에 얻을 희열과 충성심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고 깊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하는 자는 교주가 될 것이니, 자연 교도들의 신심과 충성이 커질 수밖에 없으리라.
"어쩌면 나도 무의식중에 불신하고 있었을는지 모르겠네. 교주님의 능력을. 그래서 생각보다 간단히 내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광마존이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또 다른 신의 안광은 푸른 번개와 붉은 화염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광마존은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교주님의 모습은 실로 인세의 마인 같지 않았다.
전대 교주님이 하늘조차 억압한 절대무적의 마신이라면, 이분은 언제든지 천하를 손아귀에 쥘 준비가 된 열혈의 패왕이었다.
또 다른 신(神)의 위용이었다. 어쩌면 전대 교주님보다도 더 높은 곳에 오를 가능성이 엿보이는, 차후 신교를 빛으로 이끌 위대한 천마가 거기에 있었다.
“난 지금도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네. 나는 내가 죽을 자리를 잘 찾았다고 생각해.
새로운 시대, 그분께서 인정하신 유일무이한 천마와 함께 살아가지 못함은 아쉽지만 이미 죽어 버린 고목(枯木)이 미련을 품고 있는 것만큼이나
추한 일은 없다네.”
“...... ”
“나의 명성과 육신은 욕을 먹고, 더럽혀져야 하네. 교도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참혹하게 짓이겨져야 마땅하네.”
"......"
"너무나도 사악하고 흉악한 이 늙은이가 저지른 짓을 만천하에 알리고,
교주님께서 그런 죄인을 갈가리 찢어 죽여 오직 하나 된 신임을 알린다면, 불안해진 교도들은 필경.......”
그때였다.
"공포에 벌벌 떨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겠지.”
모두가 서량을 바라보았다. 광마존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더는 안 들어도 되겠어. 어차피 자네의 계획은 실패했으니까.
자네가 진정 교도들의 욕받이가 되어 죽기 위해선 지금보다 훨씬 더 악랄한 짓을 벌여야 하지만, 이미 내가 알아차린 이상 거름으로도 죽을 수 없네.”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광마존이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이 늙은이가 그렇습니다. 죽으려 해도,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머저리지요.”
호요성은 가슴이 아픈 것을 느꼈다.
- 나아가 한 가지 더 알고 있습니다. 힘 있는 머저리들이 대의와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고 날뛰게 될 때, 얼마나 골치 아픈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자신이 그를 비웃었던 것처럼, 광마존은 스스로를 머저리라 말하고 있었다.
방법이 틀렸을지언정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온 호랑이에게 머저리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호요성은 자신이 뱉었던 말을 후회했고, 광마존의 자조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광마존이 호요성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되었네. 부디 현명하게 처신하길 바라네.”
호요성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광마존이 웃으며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자네는 나에 대해 모르네. 내가 무엇 때문에 굽은 허리를 두들기며 이리 돌아다니고 있는지.
- 훗날 나의 뜻을 신교가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네. 그때, 자네는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게야.
현명한 선택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방법이 어떻든, 자신의 충정을 깨달았을지라도 결코 주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천하에 다시없을 죄인으로 만들어, 교도들의 불안과 함께 자신을 묻어 버리란 뜻이었다.
과연 그는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쏟아 냈을 것인가.
교주에게 충성하고 신교를 사랑했던 노고수에게는 생살이 뜯기는 것보다도 극심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호요성은, 감히 광마존이 원하는 것을 이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주님.”
“......”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어찌 되었든 원로원주가 저지른 죄를 제법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판국이니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하니 그의 말마따나..........”
“마음 같아선 정말 신명 나게 북채로 머리를 두들겨 주고 싶구만.”
“예, 그렇...... 예?”
모두가 놀라서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이 피곤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원로원주란 인간이나 총군사란 인간이나, 안 그래도 바빠 죽겠구만 쌍으로 염병을 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