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패왕(鬪王)의 면모 (6)
서량의 앞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무담이었다.
그가 연무장 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대호법이 교주님을 뵙습니다.”
“응.”
서량이 상체를 세웠다.
광마존과의 대담에서 분노를 느꼈고, 그 분노로 인해 자극받은 마공이 심각한 상처 대부분을 치료했다. 그러나 아직 내상은 다 낫지 않았다.
무담의 얼굴에 걱정의 기색이 깃들었다.
“존체(尊體)가 상하실까 걱정됩니다. 이만 궁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괜찮네. 침 바르면 나아.”
침 바른다고 나을 상처였다면 이렇게 힘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걸 떠나서 내상을 입은 곳에 어떻게 침을 바를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할 일 많은 사람이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왔어?"
무담이 고개를 조아렸다.
“죽여 주시옵소서.”
호법원 전통인가.
마동필도 처음에 뭐만 하면 그렇게 죽여 달라 외쳤더랬다. 이놈들은 못 죽어서 안달이라도 난 걸까? 죽일 생각도 없는 사람더러 자꾸 죽여 달래.
“또 왜?”
“원로원주의 의도를 떠나, 그의 행보를 더 신경 써서 살폈어야만 합니다.
비록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용서를 받았지만, 원로원주는 신교 역사에 다시 없을 대죄를 저지른 죄인이옵니다.
그가 죄를 짓도록 방치한 저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책임이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광마존은 마신궁에 허가도 없이 발을 들인 중죄인이다.
신교 역사상, 반역자를 제외하곤 누구도 허가 없이 마신궁에 강제로 진입한 자가 없었다. 말하자면 신성 모독이나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이는 당연히 죽을죄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전에 막지 못한 대호법에게도 분명한 책임이 있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다 용서했으니 됐네.”
“하오나 교주님.”
"자네나 총군사나, 본래 이런 실수를 저지를 사람들은 아니지.”
“.........”
“확실히 자네들은 지나치게 안일했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네.
외세의 침략과 공략에는 완벽히 대응할 수 있지만, 내부의 잡음을 막기란 누구나 힘든 법이네.
하물며 자네들은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아예 없애 버린 분의 치세하에 살아오지 않았던가.”
이천상은 무력과 정치력뿐 아니라, 태생적으로 가진 위엄 또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위엄을 힘과 지혜가 받쳐 주니, 누구도 반역을 저지를 생각 따윈 못 했다. 천마 대다수가 비슷하겠지만 이천상은 유독 강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자연히 그의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이런 쪽에서의 경험이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 일이 벌어졌을 때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서량은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마음 깊숙이 인정했다. 그래서 용서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라면 백 년을 산들 천 년을 산들, 세상 모든 일에 통달할 수 없네. 그래서 처음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야.”
"....."
“하지만 말했듯, 나는 아량 좋은 사람은 못 돼. 한 번은 봐주겠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겠지."
“송구하옵니다.”
“그러니 그리 죽여 달라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
중요한 건 그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 능력을 갖추는 것일세.”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신경을 쓰게.”
무담이 더욱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성은을 미천한 소인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는 교주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지금도 실망하진 않았어. 말이야 바른말이지, 사람이 실수도 하면서 사는 거 아니겠나.”
무담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진정 자결할 각오로 쫓아온 길인데 묘하게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참으로 다르구나.'
전대 교주님과는 성격이 너무나도 달랐다.
이천상은 구름마저 뚫고 우뚝 솟은 이름 모를 봉우리와 같았다. 정상이 보이지 않아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철저히 명령하에 움직였다.
지금의 교주님은 마치 뭉실뭉실한 구름과 같다. 당신께서는 아량이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상대를 용서함에 일말의 고민도 없는 분이다.
그러나.
'그래서 더 무서워질 수 있는 분.'
소나기와 벼락은 구름에서 쏟아져 내리는 법이다.
무담은 조금 전, 판마정의 입구 앞에서 터트린 교주님의 무시무시한 일갈을 떠올렸다.
- 나는 새로운 세대의 주인이며, 신교의 열 번째 천마다.
나의 다음 세대에, 또 다른 신(神)의 숙주가 등장하기 전까지 너희의 목숨은 내 것이다. 오직 교주만의 것이란 말이다.
- 너희의 웃기지도 않는 충신 놀이는 여기까지다. 앞으로 다시 한번 이따위 난장을 피운다면, 너희의 의도가 숭고할지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전신 가득 벼락처럼 위험한 마기를 피워 내며 무지막지한 위엄을 보여 주신 교주님. 그 앞에서 무담은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의 두려움을 맛보았다.
이길 수 없는 상대라서가 아니었다. 부드럽고 장난기 넘쳐 보였던 교주님이라서, 도리어 분노를 쏟아 낼 때의 충격이 배가 된 것이다.
마치 풍요롭던 대자연이 때에 따라 막을 수 없는 재해를 일으키며 일대를 죽음의 지대로 만드는 것처럼.
당대 교주님은 그런 분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전대 교주님보다도 위험하고 무서운 분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또 뭔가?”
“예?”
“보아하니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안목이었다.
이 또한 두려웠지만, 동시에 안심이 된다. 모신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으나, 교주님의 능력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광활했다.
이런 분을 모실 수 있는 운명이라면, 이 또한 축복받은 삶이 아닐는지.
"본래는 죄를 여쭙기 전에 말씀드릴 사항이었습니다.”
“그래, 뭔데?”
“비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무담은 훗날 회고했다. 바로 이 순간, 완전히 다르게 변모한 교주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자네에게 따로 연락이 온 건가?"
“그렇습니다.”
“오호라.”
서량의 얼굴에 흥미로운 웃음이 새겨졌다.
“나는 총군사를 보내 비궁 측에 알렸다. 앞으로 비궁이란 존재는 없어질 거라고.
그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면 내게 직접 찾아오라고 하였어. 한데 자네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다?”
“그렇습니다.”
“둘 중 하나로군. 교주의 최측근인 자네에게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묻고 싶었거나, 아니면 자네부터 공략해 들어오려는 수작이거나.”
무담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물론 그럴 상황은 아니었기에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것으로 예측됩니다.”
“예측? 그렇다면 전자는 아니고 후자로군. 자네 반응을 보니 제법 조심스레 공략에 들어온 것 같은데.”
“소신의 굳은 머리로는 비궁 측에서 무엇을 노리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생각하기로, 그들이 맞불을 놓으려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됩니다.”
“맞불?”
“그렇습니다.”
“맞불...... 맞불이라.”
순간 서량의 눈에 마기가 번뜩였다.
“원로원주가 미래를 위해 일부러 죄를 저질렀다면, 비궁 쪽은 작정하고 부딪쳐 보겠다는 건가?"
“그렇다고 보입니다."
무담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교주와 전대 마인들을 제외하고, 비궁의 정체를 아는 두 사람 중 하나였다. 다른 한 명은 당연히 총군사였다.
그러나 비궁의 정체만 알고 있을 뿐 그들이 평소에 무엇을 하고 사는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마신궁의 주인인 교주와 비궁의 주인인 비궁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위치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즉, 서량은 건드려서는 안 될 영역을 건드린 셈이었다.
그것은 아직 정권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현 상황에선 큰 문제로 작용할 위험이 있었다.
"작정하고 부딪치겠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 자네에게 먼저 접선을 했다면, 그래도 한 번은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어.”
대호법은 신교를 지키는 자이며, 신교 최후의 보루라고도 불리는 자였다. 천마신교에서 교주에게 직언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총군사와 대호법뿐이다.
총군사가 교주의 편에 서서 본인들을 공격했으니, 신교를 지키는 대호법에게 압력을 가한 것이리라.
대호법에게는 신교의 평화를 유지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비궁을 내 산하에 두려는 부분에 대해서.”
무담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대호법입니다. 신교를 지키는 자로서, 잠시라도 신교를 위기에 빠트리는 처사를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처지입니다.”
서량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조금은 돌려 말했지만, 결국은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교주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은 채, 본인의 생각을 솔직하게 전달한다.
사려 깊은 신중함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서량은 무담의 발언이 기꺼웠다.
“이보게, 대호법.”
“예, 교주님.”
“나는 사부님께 비궁이 왜 존재하는지, 시간이 흐른 지금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상세하게 들었네.”
"....."
"그래서 난 비궁이 지금과 같은 상태로 계속 존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네. 사실 이 생각에는 사부님도 동의하셨지.”
무담의 눈이 커졌다.
“전대 교주님께서도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하지만 그분은 결국 비궁을 건드리지 않았어. 모든 개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하늘의 경지에 달했기 때문이야.”
“...!!”
"하지만 나는 다르다네. 나는 하늘이 될 생각도, 뒤가 간지러운 걸 참을 생각도 없어. 그래서 말이네.”
“......?!”
“싹 쓸어 버릴 생각이네.”
무담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의 두 눈에 은은한 흉성이 떠올랐다.
“불만이 있으면 직접 오라고 전했거늘, 좀생이처럼 대호법부터 건드렸단 말이지? 아주 재미있는 선택을 했군.”
*
*
*
쾅!
비궁주, 공요요(孔謠妖)의 얼굴이 붉어졌다. 탁자를 내려친 그녀의 주먹에 형편없이 구겨진 서신이 바르르 떨렸다.
“......서량이라?”
그녀의 앞에 선 노인, 마중팔부중(魔仲八部衆)의 하나인 천(天)이 싸늘하게 말했다.
“이대로 둬서는 안 됩니다.”
"....."
“역대 천마 중 최고라는 전대 교주조차도 본궁을 존중했습니다. 희대의 천재라고 떠받듦을 받더니, 이 자가 아주 오만하게 나오는군요.”
“섣불리 건드릴 자는 아니야.”
“궁주님.”
공요요의 얼굴은 분노가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냉철함을 잃지는 않았다.
“그자는 주화입마에서 벗어난 후, 불과 이 년 만에 극마의 경지를 깨달은 괴물이야.
중원에 나가서는 단신으로 무림의 판도를 바꿔 버린 기린아이기도 하지."
“대단한 사람임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일신의 능력이 대단하다 한들, 본궁을 당해 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건 다른 게 아니야. 무공을 떠나, 그자에게는 타인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선천적인 ‘무언가'가 있어.”
“예?”
공요요는 서량의 행보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수개월에 걸쳐 중원을 활보했고, 정파 무림을 분열시킨 후 강호삼세(江湖三勢)의 균형을 완전히 찢어 놓았다.
물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놀라운 일을 홀로 했다는 것이다.
무공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자다. 무공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공요요는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치솟는 분노는 여전했다. 재차 서신에 적힌 내용을 떠올리자, 귀에서 연기가 나는 것 같았다.
서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 번만 더 좀스럽게 나오면 힘으로 밀어 버릴 테니, 괜한 수작 그만 부리고 자리에서 내려오게.
마지막으로 말하네. 할 말이 있으면 직접 마신궁으로 찾아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