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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414화 (414/774)

414화. 신(神)은 하나다 (2)

대전에서 물러난 서량이 찾은 곳은 판마정이었다.

사아아아아.

바람이 불어왔다.

판마정이 보여 주고 있는 환상은 어느 이름 모를 산의 정상이었다.

예전 이천상과 만났을 때의 황량한 절벽은 아니지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산 아래가 홀로 정상에 선 그를 외로이 보이게 했다.

한참 아래를 내려다보던 서량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음.”

츠츠츠츠.

조금씩, 조금씩 세상이 바뀌었다.

구름을 뚫고 솟은 산봉우리가 흩어지고, 그 자리에 기화요초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정자가 나타났다. 서량이 앉은 자리는 바로 그 정자 위였다.

“처음이라 그런가, 후딱 바뀌진 않는구먼."

정자 난간에 등을 기댄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착잡해 보이는 미소였다.

“너무 바쁘게 살았나? 시간이 참 많이도 흘렀네.”

지금 그가 만들어 낸 광경은 처음 이전상을 만났을 때 판마정이 보여 준 모습이었다.

'그때는 잔뜩 긴장했었는데 말이지.'

판마정의 정체도 모른 채 들어온 길이었다. 이곳이 고도의 진법으로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건 알았지만,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는 알지 못했다.

유진도형결을 익힌 지금, 서량은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판마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이 진법 안 공간은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곳이다.

단순히 상대의 마음을 읽어 내거나 죽이는 건 물론이요, 운용이 극에 이르면 먹고 마실 것까지도 구현해 낼 수 있다.

물론 실제 음식은 아니지만, 당사자가 그렇게 믿으면 몸은 속는다. 위장에 든 건 없어도 식사를 한 것처럼 체내 활동이 왕성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영역. 신(神)으로서 자신의 통치력을 발휘해 볼 수 있는 연습의 장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교내 상황은 물론 중원 정세에 대한 충분한 분석이 된 상태라면, 자신의 판단이 불러올 미래를 보여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신을 신답게 만들어 주는 가상의 장소. 궁극에 이르면 미래 예지까지도 가능케 만들어 주는 신지(神地).

그래서 교주는 반드시 판마정을 제압해야만 한다. 애초에 상대를 꿰뚫어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정치와 삶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어려웠지.”

서량은 홀로 판마정을 제압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주인을 잃은 판마정은 입정한 자를 가만두지 않았다.

실제 위력과 다르지 않은 벼락을 뿌리기도 했고, 끓어오르는 용암의 파도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수천 고수의 검풍(劍風)보다 강한 폭풍으로 입정자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자연재해와 같다. 천하제일고수라도 버틸 수 있는 압력이 아니었다.

서량은 그 막을 수 없는 재해를 믿음과 분석으로 버텨 냈다.

이미 판마정에 여러 번 들어와 봤고, 이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강한 자신(自信)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스스로 암시를 걸었음에도 힘들었어.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거지? 판마정이 이 정도인데, 그 본바탕이라는 고죽림은 대체 누가 어떻게 만든 거야?'

판마정의 기를 접해 본 경험, 자신이 필요하다는 지식, 진기에 대한 극한의 이해도와 압력을 버텨 낼 만한 체력과 무공.

그중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절대 성공하지 못했다.

고죽림에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럽게 금호가 떠올랐다.

“넌 지금 어디에 있냐? 살아는 있지?"

물론 금호가 생존해 있음은 알고 있었다. 비록 금호의 전투력이 자신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금호는 싸우기 위해 태어난 생물이 아니다.

그저 존재함으로써 운명을 뒤흔드는 영물.

세상의 운명에 관여할 정도로 왕성한 기를 품고 있다면, 사람의 손에 생사(生死)가 결정될 리 없다.

애초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길 끊임없이 반복하는 존재 아니던가.

하여 서량 역시 금호가 살아 있음은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수천 리 떨어져 있어도 버젓이 상태를 알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금호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든 돌아올 놈이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금호가 보고 싶었다.

금호를 생각하던 서량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거야 원, 애가 따로 없군.”

아직 대관을 치르진 않았어도 그는 교주였다. 누구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한데 정작 교주가 되니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었다.

마동필도, 앵화도, 위홍련은 물론 마존들의 얼굴도 평소처럼 보는데 자신만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만들어 내는 무수히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책임감이었다.

군권을 휘두를 수 있는 소교주 때도 나름의 책임을 느꼈지만, 지금은 뒤를 받쳐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제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불패의 군단, 천마신교는 오로지 자신의 결정하에 생사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독이 싫었다. 이 책임을 함께 지고 갈 사람이 있었으면 싶었다.

그 생각이 들자, 서량은 또다시 변해 버린 자신을 느꼈다.

“고작 몇 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살왕 시절만 해도 자신의 고독을 해치는 자를 싫어했는데, 지금은 외로움이 싫다.

비단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니, 이제 혼자가 어색했다.

서량은 눈을 감았다.

“이제 잊을 때도 됐는데, 어째 자꾸 한 번씩 그립습니다그려.”

이천상이 떠올랐다.

천마신교의 교주로서, 이미 떠나 버린 스승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서량은 물론 교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전대의 교주가 자꾸 떠오른다는 것은, 당대 교주의 통치가 썩 훌륭하다고 보기 힘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 극단적인 예가 바로 광마존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가 그리 행동하도록 만든 시발점은 바로 이천상이었으니까.

아마 지금 신교를 운영하는 수뇌부 모두가 그러할 터였다. 그들 마음에는 아직 이천상이라는 절대자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하늘로 가셨는데 아직도 이만한 영향력을 보여 주시는군요. 참 대단도 하십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징징거리지 말라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어쩌겠습니까? 사부가 이뤄 놓은 업적이 어지간했어야지요.

참나, 다음 대 교주는 어떻게 하라고 그리 부담스러운 삶을 사셨습니까.”

생각해 보니, 이제 자신도 이천상을 스스럼없이 사부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큰 변화였다.

동시에 아쉬웠다.

'결국 한 번도 못 불러 드렸군.'

단 한 번도 이천상에게 사부님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그가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이 되어서야 구배지례를 올렸을 뿐 입을 열어 사부라 부르진 못했다.

그것이 한(恨)이었다. 이심전심이라 욕계문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알았다지만, 입이 괜히 달려 있는 건 아니다.

사부라 부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푸근하게 불러 드리지 못했는지, 이제 와 후회가 됐다.

“후우, 어수선하다.”

혼자서 생각에 잠기고, 투덜거리고.

며칠 안 됐는데 벌써 몹쓸 습관이 들었다. 그러나 서량은 그런 자신이 싫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나른함으로 젖어 있던 서량의 눈이 다시 힘을 되찾았다.

“하루빨리 교를 재정비하긴 해야 하는데, 이거야 원 비궁부터 작살내도 되는 건가?”

교주로서 자각을 한 이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바로 판마정의 제압과 비궁의 처리 문제였다. 그중 하나는 완수했으니, 이제 비궁을 처리할 차례였다.

'다소 급하긴 했어.'

기실 급하게 처리해야만 하는 일이긴 하다. 진짜로 비궁을 없애려면.

교주로서 지지 기반을 다지고 그에 걸맞은 위엄을 모두에게 보여 준 후에는 반드시 대관을 치러야만 한다.

교도들은 비궁에 대해 모르지만, 대관이 지닌 상징성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비궁이 주관하는 대관을 받으면 차후 비궁을 공략하는 데에 문제가 생길 거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닌 정통성이다.

모두가 믿고 따르기에 정통성은 더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비궁부터 처리하려는 것이다.

문득 서량은, 의천맹으로 향하기 전 이천상과 나누었던 대화 한 자락을 떠올렸다.

- 역대 교주 중 나처럼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자는 흔치 않다.

단순히 믿고 따르는 대상을 넘어, 진심 어린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아.

그런 나조차 이 경지에 오르기 전에는 비궁을 없애는 데에 부담을 느꼈다. 물론, 그래도 쓸어 버리려 했지만.

- 왜 그렇습니까? 비궁이 지닌 그 '힘' 때문은 아니실 테고,

- 그따위 힘, 압도적인 화력으로 날려 버리면 그만이다. 문제는 정통성이었다.

내게 왕관을 씌워 준 자들을 해치는 것은 본교의 천년 역사를 내 손으로 뭉개는 짓이 된다.

차라리 대관을 받기 전이라면 모를까, 훗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

- 그러셨군요.

- 그러니 만일 비궁을 치려거든, 대관을 받기 전에 쳐야 할 것이다.

-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다만 교주님의 속내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구 눈치 볼 분은 아니시니까요.

- 나도 눈치를 본다.

- 예? 누구의 눈치를요?

- 교도.

- 음....

- 믿기지 않는 모양이군.

- 신은 그저 믿고 따르는 대상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교도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을 텐데요?

대가를 바라는 신심은 부정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왜......?

- 그들이 날 믿고 따라야 하는 당연함과는 별개로, 나 역시 그들의 눈치는 봐야만 한다.

-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그들의 믿음과 욕망을 이해해야만 더 나은 신이 될 수 있으니까.

- 설령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한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 그렇다.

-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변화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 아닙니까.

-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없어도 난 변화한다.

끊임없는 자극으로 인해 단 하나의 거대한 가치를 알아 가고 있다.

- 그게 무엇입니까?

- 겸허함.

이천상과의 대화는 직설과 모호함의 연속이었다.

다만 그 대화에 여운이 남는 것은, 말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그의 철학과 가치관 때문일 것이다.

“겸허함이라...... 확실히 아직 모자라긴 한 모양입니다. 지금의 전 그런 걸 느낄 여유가 없거든요.”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다만 달려야 할 때라는 것만큼은 알겠습니다. 힘들고 외롭다고 쉬고 있을 때가 아니지요.”

숲을 보려면 나무부터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서량은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그렇게 또 혼자만의 시간을 마치고 일어나려던 때였다.

[교주님.]

전음이 들려왔다.

마동필도, 무담도 아니었다. 교주의 호위단장, 호천마황단주의 전음이었다.

[환희원주가 뵙기를 청하였사온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서량이 답했다.

“내가 나가지.”

마음이 일자, 어느새 판마정 입구에 서 있다.

쿠궁!

열린 문으로 나오니 저 멀리 소연심이 부복해 있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둘이 보는 건 오랜만이군."

소연심이 고개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군림성교, 천마불사. 환희원주가 교주님의 존안을 뵙사옵니다.”

“낯간지러운 인사는 그만하고 일어나게.”

소연심이 공손한 자세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호의 가득한 미소였다.

“그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어?"

“저는 항상 이렇게 웃었는걸요.”

“그럴 리가? 소교 때는 보지 못한 웃음이야.”

“설령 제 마음이 그때와 같다 한들, 어찌 교주님 앞에서 경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까.”

“청산유수가 따로 없군. 언변은 변한 게 없어.”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야? 단순히 내 얼굴 보자고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아, 예. 다름이 아니라 광마존의 요구 때문에 왔습니다. 교주님께 허가를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음?”

"그...... 비궁으로 향하는 지원을 끊어도 되겠냐는데, 어떻게 할까요?”

“호오?”

서량이 클클클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거 노인네 참, 어지간히 거슬렸었나 보군.”

“네?”

“아니야. 그렇게 해 줘.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가는 모든 지원을 끊도록 해.”

"교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서량이 재미있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당해 본 사람이 안다는 건가? 그렇게 안 봤는데, 제법 사악한 구석이 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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