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신(神)은 하나다 (4)
광마존의 말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술법의 연성을 위해 정신력을 갈고닦은 비궁의 술사들조차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 정도의 폭언이었다.
쿠구구궁!
비궁을 둘러싼 무릉의 진법이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 갔다.
이 진법은 그들 모두의 법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보유하고 있는 법력 자체를 소진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법을 형성하는 데에 쓰이던 정신력을 해제하니 이전보다 더 강력한 기파를 발산할 수 있었다.
광마존의 눈이 번뜩였다.
'놀랍군.'
괘씸한 것은 둘째치고, 이들의 법력이 참으로 무섭다.
특히나 비궁주의 법력은 가히 압권이었다. 극마, 화경에 오르면 기가 선천(先天)에 가까워지기 마련인데 비궁주의 법력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결국은 기(氣)다. 무공이나 술법이나, 방법과 효율이 다를 뿐 극에 이르도록 익히면 종국에는 하나로 향하는 법이다.
즉, 비궁주의 무공은 마존에 필적한다. 게다가 자신은 물론 마존들 모두 술법에는 그리 깊은 지식이 없었다.
만약 비궁주가 작정하고 습격한다면 고전이 예상될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공요요가 차갑게 말했다.
"어쩔 수 없구나. 교주가 이리 막무가내로 나오니 비궁의 존재 의의를 그 몸에 직접 새겨 줄 수밖에. 물론 너희부터 처리한 후에 말이다.”
“네깟 놈들의 능력으로는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우릴 죽인다 해도 네놈들 역시 무사치 못할 것이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술법을 전개하려던 공요요는,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잠시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며 광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술법가들의 육감은 남다르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로다.”
“......뭘 숨겨 두고 있는 것이냐?"
“보여 줄 수 없느니라. 그러나 우리의 준비성이 얼마나 투철한지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지.”
광마존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나이쯤 되면, 사람들이 모르는 여러 전설이나 신화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되느니라.
그리고 그러한 전설과 신화 중, 허구의 소산이 아닌 진짜가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지.”
“........?”
“우리에게 화신보옥(禍神寶玉)이란 물건이 있다.”
“....!!”
공요요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중팔부중은 물론 그들의 뒤를 받쳐 주고 있던 술사들의 얼굴도 충격으로 물들었다.
"교주님이 말씀하시길, 본교가 보유하고 있는 화신보옥은 최하급품이라고 하셨지.
그러나 최하급의 화신보옥이라도 정도 이상의 진기를 불어넣어 개방할 경우, 반경 삼백 장 내에 존재하는 고밀도의 기(氣)를 영구적으로 빨아들인다고 하더군.”
"......"
"마음 같아선 정정당당하게 싸워 주고 싶다만, 송구하게도 교주님께선 우리 늙은이들을 매우 아끼셔서 말이다.
너희가 공격을 감행할 경우, 곧바로 화신보옥이 개방될 것이다.”
"......”
“우리야 살 만큼 살았고, 교주님의 명을 수행하다 죽는 것이니 아무런 미련이 없느니라. 그러나 너희도 그러겠느냐?"
공요요가 입술을 깨물었다.
“화신보옥이 너희에게 있다는 걸 어찌 믿으란 말이냐?"
“믿고 말고는 너희 자유다.”
“설령 너희에게 있다 한들, 그것이 가진 마력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래 봤자 죽음뿐이겠지.”
“......개죽음을 택하겠다고?”
“귀가 어두운 여아로다. 하기야, 그러니 교주님께서 친히 서신까지 보냈는데도 못 알아먹고 예서 뭉그적거리고 있었겠지.”
공요요는 기어이 분노에 찬 목소리를 터트렸다. 더는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화신보옥은 단순히 기를 빨아들이는 기물이 아니야!
한 번 발동된 화신보옥은 기를 다 채우지 못하면 영기(靈氣)까지 빨아들인단 말이다! 죽어서도 안식에 들지 못한다는 뜻이야!”
“웃기지 마라, 계집.”
“뭐라고?!”
“이미 우리의 혼은 교주님께 바쳤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교주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울 뿐이다.”
공요요은 불신 어린 눈으로 마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는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죽음을 불사한 것이다.
'이런 미친놈들!’
화신보옥이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기를 빨아들여서가 아니었다.
화신보옥의 진짜 능력은 '존재'를 지우는 것이다.
과밀집된 기(氣)를 순환시키지 않고 완전히 빨아들이는 것이 바로 화신보옥이다. 마치 영물의 내단처럼 기를 보옥 안에 가둬 둔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영물이야 죽든 등선을 하든, 언젠가 내단을 풀어 대자연에 환원시키겠지만 화신보옥은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전자가 특수한 방법으로 꺼내지 않는 이상, 한 번 흡수된 진기는 영원히 화신보옥에 갇혀 버린다.
고여서 탁해지는 것도 아니다. 기(氣)의 상태까지 온전히 보존하기 때문에, 기를 해방시키는 방법을 모르면 빨아들인 기는 영구히 갇히고 만다.
만약 그 화신보옥이 영기까지 빨아들이게 된다면?
그럼 그것으로 끝이다. 설령 화신보옥의 기를 추출하는 방법을 아는 자가 있어도, 영기를 뽑아 주지 않는 이상 영혼은 안식을 얻지 못하고 망령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술가(術家)에서는 화신보옥을 가장 위험한 기물 중 하나라고 말하며, 우연히 손에 들어와도 버리라고 권고한다.
혹여 화신보옥을 지닌 채로 정신력이 약해지면, 술사의 법력과 영혼을 몽땅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물건이 그놈 손에 있었다니!'
공요요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긴장해 있었다.
광마존의 눈이 서늘해졌다.
“어찌하겠느냐?”
"....."
“선택하라. 비궁의 멸망이냐, 아니면 충성이냐?"
설마하니 살아생전 이런 부당한 일을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빌어먹을! 제 부하에게 화신보옥까지 쥐여 줘서 여길 보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멸법일마술을 피하려고 수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단 말인가!'
그때였다.
위기의 순간, 공요요의 머리 한구석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였다.
“......진행하지.”
“뭐라고?”
“교주의 대관을 진행하겠다.”
팔부중과 술사들이 깜짝 놀라서 공요요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갑작스레 마음을 바꾼 공요요를 보며 의아해했다.
광마존이 눈살을 찌푸렸다.
"교주님의 대관을 진행하겠다고?"
“그렇다. 본디 교주의 대관과 교상, 마위는 비궁에서 진행해 왔다.”
“갑자기 대관을 진행하겠다는 저의가 무엇이냐.”
“저의라니? 일이 어찌 되었는 대관을 치러야만 교주로 인정된다는 걸 너희라고 모르지 않을 텐데?"
광마존의 눈이 깊어졌다.
'무슨 수작인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날을 세웠던 사람이, 갑자기 교주님의 대관식을 진행하겠다고 한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발언이 아닌가. 그러나 광마존은 공요요의 의도를 간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응했다.
“대관을 받잡으시는 것도 교주님께서 원하실 때 할 것이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아직 비궁이 멀쩡하고, 내가 살아 있는 이상 누구도 본궁의 권한을 침범할 수 없다.
하물며 친히 대관식을 준비하겠다는데 왜 그리 삐딱하게 구는 거지?"
광마존은 굳이 상대를 속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네년에게 다른 꿍꿍이속이 있음을 아니까.”
공요요가 싸늘하게 웃었다.
“교주에게 전해라. 대관을 준비하겠다고.”
“시간을 끌려는 속셈인가?"
“너는 교주를 존경하지 않는 모양이군."
물끄러미 공요요를 보던 광마존이 왼손을 들었다.
“삼 군장은 발 빠른 이를 시켜 교주님께 지금의 대화를 전달하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광마존은 이미 대여섯 명의 마인이 마신궁으로 향했음을 알 수 있었다.
광마존이 코웃음을 쳤다.
“네 말마따나 교주님의 대관을 준비하겠다는데 우리 늙은이들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네년에게 사악한 의도가 있음을 모르지 않으니, 교주님의 답변이 오기까지 예서 대기하겠다.”
공요요가 피식 웃었다.
“좋을 대로.”
너무나도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공요요가 마존들의 진심을 읽었던 것처럼, 광마존 역시 공요요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분명 치명적인 한 수를 선보인 것이다. 대체 무슨 속셈일까?'
*
*
*
“대관을 준비하겠다고?”
“그렇습니다.”
서량은 저도 모르게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무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주님?”
“하하! 나 참, 이 여우 같은 것이 당돌하게 나오는구먼.”
당돌하다니?
무담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요요가 말한 대관 준비는 분명 뜻밖의 제안이긴 했지만, 당돌하다고 여기기에 지나치게 급작스러웠다.
서량은 고개를 저었다.
'편안함에 찌들었지만 머리가 안 돌아가는 위인은 아니라는 것이로군.’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이런 한 수를 떠올리는 것은 보통 사람의 머리로는 불가능하다.
잡아 죽여도 시원찮을 족속이긴 하나, 확실히 한 조직의 수장을 맡을 만한 머리는 있는 모양이었다.
“지혜라고 불러 주긴 뭣하니, 잔머리라고 해야겠군. 여하간 재미있는 사람이야.”
무담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교주님?”
"음?”
“그 상황에서 비궁주가 그리 나온 것은, 필경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그걸 아니까 이리 웃는 것이고.”
“아... 예.”
무담은 그 속셈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교주님께 속속들이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조아리기만 했다.
서량은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대관을 치르기 전에 비궁을 없애 버리려 했네. 이유인즉, 대관을 치른 이상 비궁의 권리와 권한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야.”
“......?!”
“한데 지금 대관을 치르면 어떻게 되겠나? 언제가 되었든 훗날 다시 공략하려 들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비궁을 건드리기 힘들지 않겠나? 보는 눈도 있는데.”
무담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고육지책이로군요.”
“지독한 고육지책이지. 그만큼 밀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러나....”
웃음기 가득했던 서량의 얼굴 위로 한풍이 불어닥쳤다.
“동시에 한바탕하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다네.”
“예?!”
공요요는, 역대 비궁주들은 교주를 억압하고 나아가 죽일 수도 있는 술법을 알고 있다.
기실 그것은 술법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공과 닮아 있었다. 말하자면 유진도형결처럼 무공과 술법의 중간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멸법일마술이라고 불렀다.
공요요는 대관식을 준비하겠다고 하며 시간을 벌었다. 그렇게 대관식을 치르고 나면 마신궁에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멸법일마술을 펼칠 것이다.
'만일 여기서 내가 대관을 치르지 않는다고 하면, 지금 당장 마신궁으로 올 것이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멸법일마술에 모든 걸 걸어 보겠다는 뜻.’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당돌한 계집이로군. 하긴, 본교의 성녀라면 그 정도 악은 보여 줘야지.”
"....."
“대호법.”
“예, 교주님.”
“비궁주에게 전하게. 대관식을 받겠다고.”
“그, 그러시겠습니까?”
“다만, 내 대관식을 준비하는 것은 비궁이 아니라 사제관이어야 하네. 사제관의 관주로서 준비하는 게 아니라면, 그것은 대관이 아니지.”
우우우웅!
서량의 마안이 어두운 청색으로 빛났다.
푸른 동공 속에, 지옥의 겁화를 일으킬 핏빛 화염이 이글거렸다.
“만일 그것도 싫다면 모조리 죽이겠다 전하게. 사제관주가 되겠다고 하면, 충성 맹세를 위해 마신궁으로 오라고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