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신(神)은 하나다 (6)
쿠구궁!
대전의 문이 열렸다.
왜일까? 공요요는 묘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타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삭이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가는 분노에 덩달아 들썩이는 법력까지 다독여야만 했다.
그 분노는 강한 자신에서 기인했다. 분노도 감당키 힘든 상대에게는 퍼붓기 힘든 법이다.
서량이 어떤 짓을 해도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녀의 분노는 더 빠르고 강하게 치솟았다.
그러나 마신궁에 들어서고, 이곳 대전 앞에 이르렀을 때.
지옥의 겁화처럼 타오르던 분노가 한겨울의 동풍을 맞은 듯 빠른 속도로 식어 가기 시작했다.
이내 대전의 문이 열리고, 어두운 대전을 가로지르는 붉은 융단이 눈에 들어오자.
대전 안에서부터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무거운 분위기가 공요요의 긴장을 무서운 속도로 불렸다.
마중팔부중의 일인, 용이 느꼈던 그 감각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 전체가 자신을 굽어보는 듯하다.
'달라.’
이천상을 보러 왔을 때, 이 대전은 한없이 투명하고도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투명함과 서늘함은 사람에게 긴장을 불러일으킬지언정 불편함을 느끼게 하진 않았다.
지금은 달랐다.
붉은 융단은 피로 점철된 길로 보였고,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은 살갖을 베는 삭풍처럼 살벌하게 느껴졌다.
불당에서나 맡을 법한 진한 향내는 머리를 무겁게 했고, 어느새 말라 버린 입에서는 단내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작정을 했다는 건가?'
그럴 수밖에 없겠지.
성녀휘광도 만만치 않을 텐데, 하물며 멸법일마술은 오로지 천마를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술법이다.
상대의 무기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고 있는 이상, 나름대로 힘을 주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공요요는 다시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들어오게.”
공기를 밀어젖히며 다가오는 굵직한 목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공요요가 융단 위를 걸었다. 붉은 융단은 발목까지 파묻힐 정도로 두껍고 푹신했다.
그렇게 신교의 교주 서량과 비궁의 궁주 공요요가 만났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굉장하군.'
겉으로 봐서는 나이를 추측하기 힘들다. 성숙함과 청초함을 동시에 품고 있는 외모는 사내라면 넋을 잃을 정도로 빼어났다.
그야말로 인세의 사람 같지 않다. 선녀라 불리기엔 염기(鄭氣)가 지나쳤지만, 또한 선녀라는 말 외에는 형용하기 힘든 외모였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서량은 상대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본래 저런 외모가 아니었어.'
마공의 극의를 엿본 서량은 알 수 있었다.
공요요의 본래 외모는 저렇지 않다. 그렇다고 인피면구를 쓴 것도 아니다.
지고한 경지에 도달한 술법으로 신체를 바꾼 것이다.
말하자면 술법계의 환골탈태나 마찬가지였다. 정신의 힘이 변화를 거부하는 육체를 뿌리부터 뜯어고친 셈이었다.
서량은 고소를 지었다.
'재능이 좋았든 노력을 했든, 저만한 경지에 오른 사람도 저리 타락할 수 있는 것이로군.'
하기야 본인은 타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그와 같은 환경에 살았으니.
“처음 보는군요.”
공요요는 교주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마동필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은 듯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 자자한 비궁주를 이렇게 보는군.”
“놀랐어요. 서른도 되지 않았다고 듣긴 했지만, 워낙 대단한 업적을 이뤄 놨기에 긴가민가했어요. 막상 이렇게 보니 내 생각보다 훨씬 젊군요.”
“그런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동시에 애석함을 느끼게 되는군요.”
“애석함이라?”
공요요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모든 것을 손쉽게 이뤄 본 사람들이 흔히들 범하는 실수죠. 자신만이 최고라는 착각, 내가 하는 일은 다 성공할 것이라는 오만함 말이죠.”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틀렸어. 나는 생을 살아오며, 단 한 순간도 무언가를 쉽게 손에 넣어 본 적이 없거든.”
"그렇다면 그 오만방자함은 천성인가요?"
“현실을 직시하는 혜안이 있다고 평가해 주면 좋겠군.”
"혜안이 있다면 감히 이따위 짓을 저지를 생각은 안 했겠죠.”
신랄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네 모습을 보니, 새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뭐라고요?”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하에 돌아가지. 생존을 위해서 강자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함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너 정도 위치의 사람에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너는 내 사부에게 이런 당돌함을 보여 주진 못했을 거다.”
공요요의 눈이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내 사부님은 역대 최강이라 불리는 천마이며, 저 무도한 중원 놈들조차 절망 깊은 목소리로 고금제일인이라 인정한 무적자니까.
너는 그런 사부님 앞에서, 감히 고개를 빳빳이 들진 못했어.”
“그분은⋯⋯.”
“교주였지. 천마였고.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공요요는 대놓고 비웃었다.
“애처럼 찡찡대는군요. 억울하면 그분만큼 강해졌어야지요.”
“용이란 얼치기도 그러더니, 너 역시 내 말을 흘려들었군.
나는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해 투덜대는 게 아니야. 난 지금 너의 공정치 못한 행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
“비궁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상대의 강함에 따라 고개를 숙일지 말지를 판단하다니, 너무 격 떨어지지 않나?”
후욱.
공요요의 몸에서 노란 기운이 피어올랐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사부 앞에서도 지금처럼 방자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적어도 널 치졸한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넌 너 자신이 그럴 가치가 없는 자라는 걸 스스로 보여 주고 있다.”
"⋯⋯.”
“실망이다. 공요요.”
공요요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분노를 느꼈다.
상대는 지금 자신을 궁주가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욕을 듣거나 뺨을 맞아도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호칭이 자존심에 강한 상처를 입혔다.
"나 역시 실망이군요, 서 소협.”
서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유치하군.”
“내가 전대 교주에게 무릎을 꿇었던 것은 그가 교주이자 천마이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당신은 아니에요.”
“그래?”
공요요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대관도 받지 못한 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미 수뇌부 대다수가 서량을 교주라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전대 교주 이천상의 후계자였기 때문이고, 나아가 이천상이 유일하게 인정한 또 다른 천마이기 때문이다.
이미 천마가 된 자를 교주로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공요요는 형식을 내세워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때론 형식과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천마로 인정받은 사람에게 형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능력과 결과로 모든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뭐, 너희보다는 낫지 않겠냐? 과거의 영광에 몸을 기댄 채 밥만 축내는 밥버러지들보다야 힘과 능력을 갖춘 반쪽짜리 수장이 만 배는 낫지.”
“⋯⋯당신!”
“이제 그만.”
스르륵.
서량이 손을 들었다.
서서히 움직이는 그의 팔이 마치 꿈틀거리는 거목의 뿌리처럼 보였다.
“피차 서로가 원하는 걸 알고 있지 않나? 쓸데없이 시간 죽이지 말고, 목적에 충실해지자고."
“목적에 충실하자⋯⋯ 좋아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파지지직.
서량의 손끝에서 시퍼런 뇌광이 이글거렸다.
공요요는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대전의 온도가 순식간에 급증했을 만큼 뇌광의 열기는 대단했지만, 그 강력한 힘 앞에서도 별다른 압력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나를 상대로 그 같잖은 술법을 펼치러 온 게 아니었나?"
"같잖은 술법? 글쎄요, 그게 그렇게 궁금하다면 보여 줄 수는 있지만 일단 내 말부터 들어 보는 게 좋을 텐데요?"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네 요구는 뭐가 됐든 들어줄 생각이 없거든.”
“들어줘야 할 거예요.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나의 괴뢰가 되고 싶지 않다면요.”
서량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호탕함이 묻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공요요는 그 웃음에 깃든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대범한 척하는 건가?'
공요요는 생각을 접었다. 상대의 의도가 어떻든 우위에 선 사람은 자신이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래, 어디 마지막으로 네 요언(妖言)을 들어 볼까?”
“간단해요. 비궁을 건드리지 마세요. 앞으로도 영원히."
“거봐. 뻔하잖나.”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서 소협은 신교 역사상 가장 비참한 교주로 후대의 비웃음을 사게 될 텐데요?”
서량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걷혔다.
반대로 공요요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얄미운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것만으로도 쾌감이 느껴졌다.
그 쾌감은, 다음 서량의 말에 뚝 끊어져 버렸다.
“쓰레기 같은 년.”
“뭐, 뭐라고?!”
“처음으로 사부님께 실망하게 되는구나. 악취 가득한 창고를 치울 능력이 있으셨음에도 가만 놔두신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
“이⋯⋯ 이 죽일!”
“괴뢰? 비웃음?”
쿠구구궁!!
대전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서량의 몸 전체에서 어두운 청색 광채가 안개처럼 번져 나왔다. 그 힘이 어찌나 강렬한지 마신궁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공요요의 눈이 커졌다.
서량의 손끝에서 번뜩이는 군림마황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어지간한 마인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내상을 입을 만큼 폭발적인 힘이었다.
대단한 경지를 이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네년은 본교의 사서에 이름을 올리게 될 것이다.
비궁 역사상 가장 어리석고 무능력한 궁주로, 이름만 남은 비궁이란 집단을 실질적으로 끝장낸 암군으로 후대의 조롱을 받게 될 것이다.”
화르르르륵!
공요요도 더는 참지 않았다.
“주둥이를 뭉개 주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지."
번쩍!
한 줄기 광채가 공요요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군림마황기상의 지공(指功), 마선일지(魔仙一指)였다. 대성에 이르면 강철구도 녹여 버린다는 무서운 마공이었다.
그러나.
푸스스스.
대전 전체를 장악했던 군림마황기가 빠른 속도로 수그러들었다. 뇌전이 끌어 올린 온도가 금세 낮아졌고, 악마와도 같은 위압감 역시 봄바람처럼 유순해졌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샛노란 법력을 피워 내던 공요요의 몸에서 시커먼 안개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그 안개가 군림마황기를 모조리 밀어 내고 있었다.
심지어 마선일지에 관통당한 허벅지도 멀쩡했다. 아무런 위력 없는 빛이 그저 스쳐 지나간 듯, 무언가에 맞은 일말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게 멸법일마술인가?”
“이제야 후회되나? 하지만 늦었어.”
쿵! 쿵!
공요요가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대전이 흔들렸다. 마치 군림마황기가 비명을 지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넌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은 건드린 거야.”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천마가 범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력은,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만한 놈!”
공요요가 손을 뻗었다.
"네놈의 몸에서 그 잘난 마황기를 모조리 뽑아내 주마!”
그때였다.
퍼어어엉!
“헉!”
공요요가 화들짝 놀라 십여 걸음을 물러났다.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으려나 싶었건만, 역시 무리였군. 하기야 사부님 정도가 아니면 마황기로 저 술법을 날려 버리긴 힘들겠지.”
태사의에서 일어난 서량의 몸에서 피처럼 붉은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끔찍한 마수의 환상이 일었다.
“제석의 번개로 잡을 수 없음을 알았으니, 어디 지옥의 불길도 통하지 않는지 확인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