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신(神)은 하나다 (8)
위이이잉!
서량의 눈이 빛났다.
복부에서 터진 구유마기가 일순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먹에 확실한 감촉이 전해졌는데도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오감은 공요요가 진체라고 느꼈지만, 육감은 그녀가 멀쩡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서량이 마기의 출력을 올렸다.
화르르륵! 휘이이잉!!
거대한 화벽이 서서히 돌아가며 온도를 높였다.
불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화기(火氣)보다 살기를 담아 상대의 육감을 봉쇄했던 구유마공이 진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퍼어엉!
서량의 주먹에 맞은 공요요의 육신이 폭음과 함께 사라졌다.
"대단하군.”
서량이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종열화벽에 닿을 듯 물러난 공요요가 자신의 복부를 매만졌다.
복부의 의복이 동그랗게 타들어 가 있었다. 하지만 드러난 맨살은 벌건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나의 원영(元靈)은 극마의 고수라도 허실(虛實)을 구분해 내지 못해. 하물며 마인이면 더하지.
너는 내 원영을 알아채진 못했지만, 실제 몸까지 타격을 주었어.”
공요요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확실히 위험한 놈이구나.”
원영이란 술사(術士)의 영기(靈氣)와 술력으로, 허상을 실체로 만들어 내는 비술이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의 분신술(分身術)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량은 그 분신을 가격하면서 시전자의 몸에도 피해를 준 것이다. 그의 마기가 실체와 원영의 통로인 영기까지 타고 흘러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확실히 네놈의 무공은 예상 이상이지만 내 법력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일보(一步)를 안 쓰는군.”
“뭐?”
서량이 피식 웃었다.
도저히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웃는다. 공요요의 표정은 그와 반대로 미미하게 굳어졌다.
“원영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시전하기까지 아주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굳이 내게 술법을 자랑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원영이란 걸 구사하기 전에 피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
“나의 보법이 축지(縮地)의 영역에 이르렀으니 너의 경신술도 화공일보(化空一步)에 달했음이 분명할 터. 한데도 굳이 피하질 않는구나.”
“네 말대로다. 네놈에게 술법의 위대함을 알려 주기 위함이지.”
“그런 것치고는 네년의 법력이 지나치게 긴장해 있군.”
화르르륵.
서량의 양손에서 재차 불꽃이 피어올랐다.
“예상대로야. 지종열화벽에 다가갈 수는 있어도, 그것을 넘어설 수는 없어.”
술사가 되기 위해선 상단전, 즉 정신력을 강하게 연마해야 한다. 그래서 경지에 오른 술사는 대부분이 부동심을 갖추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정신력이 흐트러진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술법을 구현해 낼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서량의 살기는 그 이천상조차도 놀랄 만큼 무지막지했다.
하물며 공요요는 평생 이러한 살기를 접해 본 적이 없는바, 구유마화(九幽魔火)에 닿으면 제대로 된 술법을 쓸 수 없다.
공요요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네놈의 패배는 변함이 없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나?"
화르르륵! 화르륵!
서량의 양손에서 뿜어지는 불꽃이 점차 화력을 올렸다.
거대한 원형 화벽 안에서, 그보다 훨씬 뜨거운 초고온의 불꽃을 피워 내는 서량의 모습은 지옥을 다스리는 염왕(王)과 같았다.
군림마황기가 주는 절대적인 위엄은 어디로 갔는지, 당장이라도 상대의 목을 물어뜯을 듯한 흉포한 살기만이 그득했다.
“뭐, 말이 길었군. 멀리 갈 것도 없으니 바로 끝내 볼까?”
"이놈!”
공요요가 양손을 쫙 펼쳤다.
섬섬옥수에서 누런 연기가 쏟아져 나오더니, 이내 수백 마리의 실뱀으로 화했다.
자그마한 실뱀이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고, 뿜어내는 독기(毒氣) 역시 엄청났다. 극마의 고수라도 쉽사리 접근하기 힘들 정도의 독기였다.
서량이 코웃음을 쳤다.
"어딜!”
콰앙!
강인한 진각에 바닥에서부터 핏빛 화염이 솟구쳤다.
실제로 땅이 갈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공요요는 마치 갈라진 땅에서 지옥의 유황불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 정도로 굉장한 화력이었다.
퍼퍼퍼퍼펑!
서량을 공격하려던 수백의 실뱀들이 모조리 불길에 휩싸였다. 새까맣게 타 버린 실뱀들은 이내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술법으로 만든 허상이었다.
허상이지만 물린다면 실제 독사에 물린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저 독사는 서량이 물려도 무사하기 힘들 만큼 지독한 독물이었다.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허구의 영물과 마물을, 영기를 통해 실체로 구현해 내는 술법. 성녀휘광의 절기, 환비술(幻祕術)이었다.
콰르르르릉!
아무것도 없던 대전 천장에 먹구름이 생기더니, 이내 천둥과 함께 수십 줄기의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이 역시 환비술이었다. 실제 번개는 아니지만, 맞으면 실제와 다르지 않은 충격을 받을 게 분명했다.
서량이 쌍장을 휘둘렀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구유마기가 회오리치듯 솟구치며 벼락을 막았다.
쾅! 파지지지직!
서량의 몸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입을 벌려도 비명이나 신음이 나오지 않는다. 묶지 않은 머리카락이 바늘처럼 사방으로 뻗쳤고, 고운 피부 역시 시커멓게 타들어 가 살갖이 쩍쩍 벌어졌다.
공요요의 얼굴에 웃음이 드리워졌다.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마공을 보여 주었지만 그뿐이다.
멸법일마술을 기반으로 성녀휘광을 쓰니, 제아무리 대단한 마공이라도 환비술을 당해 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푸스스스스!
벼락에 맞은 서량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 곳곳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떻게든 일어나려 하는 것 같았지만, 전격(電擊)에 맞고도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요요의 눈에 쾌감이 어렸다.
육감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화벽을 형성하고,
영기를 타고 흐를 정도로 수준 높은 암경(暗勁)까지 구사한 걸 보면 확실히 교주직에 걸맞은 무력을 갖춘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이길 순 없다. 이천상이 죽은 이상,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마인 따위는 천하에 존재하지 않는다.
짜릿했다. 왜 진즉 교주를 잡으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비궁의 힘이라면 주요 수뇌부들을 휘어잡을 수 있을 테니, 스스로 교주가 되어도 나쁠 게 없지 않겠는가.
'결국 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얻는 법!’
순간 그녀는 떠올렸다. 호요성 앞에서 이천상과 서량의 미래를 점쳤던 그때의 자신을.
그때 그녀는 호요성에게 이리 말했다.
- 좋아요. 십대천마의 마위(魔位)를 준비토록 하죠. 하지만요. 과연 그게 지금 당장 필요할까요?”
천비복술(天秘下術)의 점복(占卜)상에, 이천상의 죽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천상은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인간으로 죽어 신교의 밑거름이 되기를 선택했다.
본래라면 그럴 수가 없다.
미래 예지는 무조건적으로 들어맞진 않지만, 쏟아부은 법력의 양에 비례하여 정확도가 올라간다.
그때 그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거대한 법력을 쏟아부었고, 덕분에 이천상의 생존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천상은 그러한 미래 예지를 벗어나 버렸다. 타고난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생존도 죽음도, 자신의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 점복은 여전히 유효할까?
이천상이 죽었으니, 십대천마의 마위를 준비하는 게 옳다. 하지만 그녀의 점복은 말한다. 여전히 십대천마의 마위는 필요치 않다고.
공요요가 새하얗게 웃었다.
'그래, 여전히 십대천마의 마위가 필요치 않은 것은, 이 녀석이 천마가 될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었어.
이제야 알겠다. 신교의 십대천마가 앞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를.'
자신의 손에서 천마가, 교주가 끝장나 버리기 때문이다.
이미 천마의 경지에 올랐지만 그러한 천마도 타인의 손에 죽을 수 있다. 그러니 마위를 준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좋아, 이대로 죽여 버리는 게 좋겠어!'
세상의 온갖 고통을 안겨 주고, 꼭두각시처럼 부려 먹을 생각을 했었다.
이제는 필요 없다. 천마를 죽이고, 나 스스로 신이 되리라.
원영의 술법이 있으니 당분간 서량의 환상을 남겨 두면 수뇌부들을 속이는 것도 어렵진 않을 것이다.
공요요가 귀청이 찢어질 듯 요란한 웃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죽어라!!”
번쩍! 콰르르릉! 콰아아앙!
서량의 몸에 수백 줄기의 벼락이 쏟아졌다.
찰극천멸마금진이라는 역천의 진법을 상대할 때의 이천상처럼, 그러나 이천상의 진짜 벼락과는 다른 환상의 전광이 서량의 몸을 어육으로 만들어 놓았다.
공요요의 몸이 환희로 떨려 왔다.
팔다리가 찢어지고, 핏물마저 증발해 버린 서량의 끔찍한 몰골을 본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이놈! 이제야 본녀의 위대함을 알겠느냐!"
빡!
"아악!”
순간 공요요가 우당탕 스러졌다.
'크윽!'
오른쪽 귀에서 위잉 하는 이명이 들려왔다. 고막이 터진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른쪽 턱뼈가 부러졌는지, 턱이 쑥 빠져서 덜렁거렸다.
극심한 고통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고막을 파괴하고 뇌를 흔들어 놓은 충격파 때문에 몸을 일으키기도 벅찼다.
공요요가 비틀거리며 당황할 때.
“재미있더냐?”
그녀의 몸이 덜컥 멈추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서량의 섬뜩한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 묵직한 목소리에, 그녀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주 가관이 따로 없군. 성녀(聖女)라더니, 마녀가 따로 없었잖아?”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든 공요요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곳에는 서량이 서 있었다. 너무나도 멀쩡한 기색으로.
“어, 어떻게⋯⋯?!”
서량이 오른발을 들어 보였다.
"화공일보를 쓰지 못하는 너와는 달리, 나는 마황군림보를 마음대로 쓸 수 있거든.”
순간 공요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황군림보는 군림마황기와 함께 천마의 절학으로 이름 높은 보법이었다.
소림사의 연대구품(蓮臺九品) 정도가 아니면 감히 비빌 만한 보법이 없다는 극상승의 무학이었다.
“서, 설마 대성(大成)을?!”
“판마정을 내 것으로 만들면서 대성했지. 군림보가 아니었다면 나도 판마정을 제압하진 못했을 거야.”
공요요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판마정을 제압했다고? 혼자?'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만약 정말 단신으로 판마정을 제압했다면, 제아무리 자신이라도 그를 이길 수 없다.
이유인즉.
“네년의 술법이 제 아무리 대단해도 판마정의 환상만 할까.”
콰직!
“크아아악!”
공요요가 비명을 질렀다. 서량이 마황군림의 일 보(一步)를 진각으로 밟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부숴 버렸기 때문이다.
극심한 통증이 상단의 영기를 뒤흔들었다. 그녀의 몸에서 이는 법력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서량이 오른손을 들었다.
화르르르륵!
장심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그의 오른손 전체를 휘감았다. 조금 전 공요요에게 일격을 날렸던 구유마공의 기공술, 염혈화룡(染血火龍)이었다.
공요요의 얼굴에 비로소 공포가 어렸다.
초고온의 불꽃으로 만들어 낸 핏빛 화룡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은 구유마공 자체이자, 서량의 의지였다.
“본교의 신은 오직 하나, 천마(天魔)뿐이다. 천마는 누군가에게 제어를 받거나 협상을 하려 들지 않아. 왜인 줄 아나? 신이기 때문이야.”
서량이 하얗게 웃었다.
“이 시대에 신은 하나다. 그리고 네년은 그 신이 아니지.”
“⋯⋯!!”
“내가 바로 당대 천마신교의 유일무이한 신(神)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