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십대천마(十代天魔) (3)
과거의 이공자이자 자신의 사형이었던 관평을 보는 서량의 눈빛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진짜 서량이 아니기도 했고, 관평과는 생사를 다투던 사이였다.
물론 그 싸움은 싸움이라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지만, 그가 관평에게 호의를 가질 이유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는 삼공자가 아니었다. 후계자 쟁탈전에서 승리한 서량은 천마신교의 정점인 교주가 되었고, 관평은 죄인으로서 뇌옥에 수감되었다.
한 사람은 신(神)이 되었고, 한 사람은 패배자로 남은 것이다. 이제와 이 건조한 관계를 붙들고 있는 것은 해묵은 약속뿐이었다.
그래서 서량은 관평을 불렀다. 그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이런 고약한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흥이 날 수가 없다.
“상단전은 쪼그라들었고, 중단전은 불안정하며, 하단전은 말라붙은 진흙처럼 볼품없구나."
"⋯⋯."
“차라리 삼단전이 완전히 파괴되어 폐인이 되었더라면, 머리채를 잡고 끌어 올려서라도 새 사람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을.
네놈이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꼴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관평의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나는!”
“⋯⋯.”
“⋯⋯저는, 지쳤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이 악물고 뱉어 낸다.
서량이 코웃음을 쳤다.
“지쳤다고? 고작 그 잠깐 새에? 십 년이 됐든, 이십 년이 됐든 이 악물고 버텼어야지.”
“그건⋯⋯!”
“스승님께서는 저 중원 땅에서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하셨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분께서 원하셨던 결말이지. 그러나 누구도 스승님이 그리 가실 줄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관평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교주님이 돌아가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분은 신(神)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정 사람으로 태어나 신이 된 남자다. 그런 사람을 뉘라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충격을 받은 그의 귀로 권태로운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놀랍나? 그래, 놀랍겠지. 스승님은 그런 분이셨다. 십 년이 아니라 백 년이 지난들 그 자리에 계셔도 이상하지 않을 분이셨지.
한데 넌 고작 일 년도 되지 않아 포기해 버렸구나.”
“⋯⋯.”
“대체 내가 언제 교주가 될 거라 예상했던 것이냐?
정녕 그때의 약속이 거짓일 거라 믿었다고, 목숨만이라도 붙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말할 셈이냐?"
"⋯⋯."
“네놈에게 고생했다며 술이라도 한잔 따라 줄까 생각했던 내가 병신이지.”
세상 어떤 비수도 이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파진 못할 것이다.
이천상이 죽었다는 충격 위로 통렬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서량의 목소리는 어떠한 마검보다 무서웠고, 어떠한 극독보다도 치명적이었다.
츠츠츠츠.
관평의 몸에서 마기가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복잡한 심사로 인해 쩍쩍 갈라진 단전에서부터 마기가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상태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관평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갈(喝)!!”
쩌어어어어엉!
관평이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대전을 뒤집어엎을 듯 강렬한 일갈에 마기가 쑥 들어가 버렸다. 혼란으로 가득했던 정신도 빳빳하게 날이 섰다.
"이 내가 그때의 약속을 뭉개 버리길 원하는 것이냐?"
"⋯⋯."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해!”
벼락과도 같은 호통이었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 보이지도 않는 상천(上天)에서부터 들려오는 불호령 같았다. 그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과 권위가 실려 있었다.
'이런⋯⋯!’
관평은 서량이 후계자로 선정된 이후부터 교주가 된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지 못했다. 그에게 서량은 지금도 죽이고 싶은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
목덜미에서 흐른 식은땀이 융단 위로 뚝뚝 떨어졌다.
'무어냐, 이 위압감은?'
억지로 용기를 낸 관평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콰르르릉!
머리 한구석에서 천둥 번개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서량의 번갯불 같은 안광을 마주하는 순간 귀가 멍해졌다. 벌겋게 충혈된 눈은 저도 모르게 질끈 감겼고, 불안정하던 심박이 두 배는 더 빨라진 것 같았다.
'이럴 수가!’
관평이 받은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아무리 쇠약해졌다 해도, 한때나마 그는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는 경지를 구축한 고수였다.
그런 자신이 눈빛 한 번에 심혼(心魂)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은 것이다.
서량이 상위의 마공을 익혀서가 아니었다. 그가 기파를 발산해 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수법으로 심신을 옭아매서도 아니었다.
상대는 황제가 되었다. 나아가 황제가 되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신(神)이 되기 위해 천외천(天外天)을 노려보는 초월자가 되어 있었다.
'어느새⋯⋯.’
비로소 관평은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렇게나 죽이고 싶었던 상대는 이미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올라가 있었다.
영원히 쫓는다 한들, 감히 그림자조차 볼 수 없는 영역까지 날아오른 것이다. 자신이 뇌옥에 갇혀 있던 그 잠깐 새에.
관평은 패배감을 느꼈다.
과거 정쟁(政爭)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서량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괴물 같은 놈이었지만, 그래도 쫓아가 따라잡을 수는 있는 상대였다. 즉, 그때의 서량은 천재였지만 인간이었다. 괴물이 아니었다.
그런 서량이 지금은 삼두육비의 괴물이 되어 나타났다. 그 잠깐 사이에 얼마나 지독한 단련과 경험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운 것인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나는?’
뇌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일까?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세상에서 버티는 것은 누구라도 무리가 아닐까?
'빌어먹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결과는 결과일 뿐이다.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든, 그 시간을 충실하게 활용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서량은 인간의 상식을 무너트릴 만큼의 성장을 이뤄 냈고, 자신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뇌옥에서 썩어 문드러지다 반송장이 되어 버렸다.
그게 현실이다. 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 자신은, 과거의 그때보다 더 지독하게 꺾여 버린 패배자가 된 것이다.
“나는 너와의 약속을 파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를 아느냐?"
"⋯⋯."
“내가 약속을 파기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어떠하냐?”
“저는⋯⋯.”
"너는 너에게 유리한 약속조차도 내던질 만큼 무너져 버렸느냐?”
순간 관평의 눈이 번쩍였다.
유리한 약속? 헛소리다. 애초에 그 약속은 강제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을 선택한 것은 자신임을.
죽음과 맞바꾼 수치였다. 그 선택을 내린 것이 자신이라면, 약속 하나만 보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량의 말은 옳았다. 그는 선택했고, 또다시 나아갈 기회를 얻었다.
이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될 위치에 선 상대는 얻을 것이 없지만, 자신은 아직 얻을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바로 생존과 성장이다.
쿵!
관평이 융단에 이마를 박았다. 융단은 푹신했지만 마치 맨땅에 박은 것처럼 소리가 컸다.
“부디 그 약속을 지켜 주시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상대의 말투가 바뀌었다. 처음 대전에 들어왔을 때와는 말투도,
목소리에 실린 힘도 달라졌다.
"네놈의 상태가 그따위인데?"
“사흘을 주시오. 사흘 안에 약속이 이뤄질 수 있도록 몸을 가꾸겠소.”
“숨만 쉬고 있는 시체가 다 된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네놈은 내게 그따위 요구를 할 처지가 아니야.”
"⋯⋯."
“해서 나 역시 조건을 걸겠다.”
“말씀하시오.”
“사흘 뒤, 네게 극마에 이를 방법을 알려 주겠다. 영약이든 무공이든, 필요한 만큼의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
“단, 반년 안에 극마에 이르지 못한다면 네놈의 힘을 모조리 빼앗아 다시 뇌옥에 처넣을 것이다.”
관평의 눈이 흔들렸다.
조화경, 극마지경은 선택받은 자들만이 올라갈 수 있는 정상의 경지다.
노력은 당연하고, 뛰어난 재능은 물론 운까지 따라야만 밟을 수 있는 지고한 경지란 뜻이다.
그러한 경지를 반년 안에 오르라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서량이 무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흘 뒤, 네놈이 내게 오지 않는다면 더는 네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본교를 나가 자유로이 살든, 다시 뇌옥으로 기어 들어가 평생을 저주하며 살든 네 마음대로 해라."
“⋯⋯.”
“다만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사흘 뒤에 내게 찾아와라."
자유의 길, 그리고 죽을 확률이 거의 십 할에 가까운 길.
관평이 땅에 닿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사흘 뒤에 오겠소.”
“가라. 사흘 동안 과거 네놈이 쓰던 숙소에서 생활하라.”
자리에서 일어난 관평은 그대로 대전을 나갔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웃기는 놈이로군. 나라면 세상에 나가 밭을 일구며 살겠거늘.”
스르륵.
태사의 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마동필이 나타났다.
“정녕 저자를 살려 둘 생각이십니까?"
"문제라도 있나?”
“무엄하게도 교주님께 살의(殺意)를 품었던 자입니다.”
“과거의 원한이야. 내가 교주가 되었다 한들 사그라질 만큼 가벼운 증오는 아니었지.”
“만약⋯⋯ 혹시라도 그가 정말 극마에 오른다면⋯⋯.”
마동필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서량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 내 목숨을 노릴까 봐 그런가?”
"⋯⋯."
“그때는 네가 지켜 주면 되잖아?”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서량 개인의 무력은 둘째치고, 마동필은 물론 호천마황단이 언제나 서량을 호위하고 있었다. 극마에 오른다 한들 서량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동필은, 호위무사로서 아주 작은 위험의 불씨라도 사전에 차단하고 싶었다. 그가 이리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더하여.
“저는 저자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서량의 얼굴에 뜻밖의 기색이 떠올랐다.
마동필은 사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쉬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나 서량이 교주가 된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 말 자체가 무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무너져 버린 자입니다.”
“무너져 버린 자?”
“그렇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누군가는 마(魔)가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러나 제 마음속의 마는 언제나 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마의 품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서량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품격이라?”
"그렇습니다. 저자는 마의 품격을 상실한 자입니다.”
“혹시, 관평이 자신의 수하를 이용해서 강해졌기 때문인가?"
관평은 수많은 수하를 두었다. 그리고 그 수하들 하나하나의 내공을 빼앗아 제 성장의 양분으로 삼았다.
혹시 그래서 품격을 상실했다고 생각한 건가 싶어 물었지만, 마동필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그럼 왜 품격을 상실했다고 생각하지?”
“사냥감을 농락했기 때문입니다.”
마동필의 마안이 번뜩였다.
“맹수는 먹잇감을 잡기 위해 온 힘을 다합니다. 그것이 생존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강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냥을 위해 혼을 불사르는 맹수는 일견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지요.”
“즉, 맹수는 먹잇감을 농락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강해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상대를 농락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의 마(魔)는 저열합니다.”
먹어 치울 대상이라면 마음을 주지 말고 환상을 심어 주지 마라. 그것은 먹잇감에 대한 실례이며, 저열하고 비열한 짓에 불과하다.
마동필의 말은 그러했다. 상대를 농락하는 것도 승자의 권리라고 항변하던 수많은 마인들의 행태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로 교주님의 심기를 흐트러트린 것 같습니다.”
"아냐. 아주 흥미로운 대화였어.”
마동필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곤 다시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서량을 호위하기 위함이었다.
“마의 품격이라⋯⋯.”
서량이 씁쓸하게 읊조렸다.
“너는 너만의 마(魔)를 품고 있구나. 네가 나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