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십대천마(十代天魔) (4)
“⋯⋯기 때문에, 예상 금액은 작년보다 소폭 상승할 것으로 보입니다.”
“⋯⋯.”
“원주님?”
"음?”
멍하니 창밖을 주시하던 소연심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런저런 문서들을 한 아름 들고 있는 주화가 있었다.
소연심이 무안한 듯 말했다.
“미안하구나.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 네.”
"너도 바쁠 텐데 괜히 시간을 뺏었구나. 다시 말해 주겠니?”
“아닙니다.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주화는 이전과 똑같은 어조로 보고했다.
소연심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어느새 또 집중을 잃었다.
주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고를 다음에 올릴까요?”
"화아야.”
“네, 원주님.”
“어떻게 생각하니?"
“네?”
“비궁이 사라진 것 말이다.”
“아⋯⋯.”
이제 와 신교의 수뇌부들은 비궁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들이 그간 무슨 일을 해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모두가 놀랐지만, 뜻밖에도 수뇌부들은 서량의 결정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신교의 신(神)은 오직 하나이며, 그 신을 제어할 괴집단이 있다는 것 자체가 화가 났으니까.
소연심은 달랐다.
물론 그녀 역시 분노했고, 서량의 선택에 마음 깊이 찬성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다른 쪽에도 생각이 미쳤다.
“나는 지금껏 비궁의 존재에 대해 잊고 있었어.
매달 비궁 측에 물자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너무나도 당연한 업무의 일환이었지.
애초에 그들이 무슨 집단인지, 그간 어떤 일을 해 왔는지에 대한 고민 따위는 해 본 적이 없었단다.”
"⋯⋯."
“들어 보니,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집단이었더구나.
신이 잘못된 길로 빠지면 그를 제지한다니? 신이 왜 신이라 불리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족속들이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말이다.”
소연심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정작 그들의 존재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무서워지는구나.”
“네?”
“물론 교주님의 선택에 백번 찬성한다. 설령 찬성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교주님께서 그러시겠다고 하면, 마땅히 그리해야만 하니까.”
"아, 네.”
"다만 내가 불안한 것은⋯⋯.”
순간 소연심은 주화를 올려다보았다.
주화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또한 아름다웠다. 그 미모만큼이나 능력도 뛰어나고 눈치도 빠른 후계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주화도 소연심의 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소연심은 애써 뒷말을 삼켰다.
“아니다.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
“보고는 나중에 듣도록 하마. 이만 물러가거라."
“네, 원주님.”
주화 역시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곤 물러갔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해 보이는 소연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집무실에 홀로 남은 소연심은 불안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내 생각이 맞다면⋯⋯.'
그녀는 아주 무서운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일이 지금 당장 터지지 않기를 바랐다. 한참 뒤에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소연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오(蓮五).”
"예, 원주님.”
"군사부에 기별을 넣도록 하게. 총군사께 직접 보잔다고 전해.”
*
*
*
“으라차차! 으, 뜨거워라. 하핫! 죄송합니다. 요새 워낙 바빠서 차를 타는 법도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조금 식혀서 드십시오.”
호요성이 건넨 찻잔을 받아 든 소연심이 무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평소에도 워낙에 바쁘시잖아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새로운 교주님께서 자리에 오르셨으니 우리도 일이 바빠질 수밖에요. 환희원도 그렇지 않습니까?”
“맞아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죠.”
"크흡!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그 말이 지금은 얼마나 무섭게 들리는지 모르실 겁니다.
정말 눈을 끔뻑일 시간도 없고, 코를 벌렁거릴 시간도 없거든요. 하긴, 원주께서도 그러시겠지요?"
서로 바쁜 거 다 알면서 무슨 일로 왔냐는 말이었다. 방문자의 목적을 묻는 호요성식의 농담이었다.
평소라면 소연심 역시 장단에 맞춰 말장난이라도 몇 마디 나눴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도, 상태도 아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요.”
"아, 환영하지요. 단도직입.”
“교주님께서는 중원 정벌에 나서시려는 건가요?"
호요성의 눈이 반짝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소연심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 생각이 맞았군요.”
설마 싶었던 것이 진짜였다. 소연심은 마음이 한층 심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호요성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원주께서는 저랑 농담 따먹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대체 왜죠?”
“무슨 말씀이신지?"
“왜 이 시국에 중원을 정벌하시려는 거죠? 본교가 그 어느때보다도 어수선한 이 시국에요.”
호요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심도 있는 대화에 앞서 한마디 하자면요. 중원 정벌이 언제인지, 심지어 교주님께서 정말로 그리 생각하고 계신지도 아직은 모릅니다.”
"모르다니요? 총군사께서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요?"
“정말 모릅니다. 교주님께서는 제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소연심의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총군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군요?"
“⋯⋯허헛.”
호요성이 입맛을 다셨다.
“원주의 눈치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니면 제 표정 관리 능력에 문제가 생긴 걸까요?"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농담 아닙니다. 진심이에요. 교주님께서 비궁을 정리하신 것을 보고 중원 정벌의 기치를 세우신 것까지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소연심이 나직이 심호흡을 했다.
너무 흥분했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독인 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한데 그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이것도 농담인가요?"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저 진짜 바쁩니다. 저도 오늘은 농담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요.”
“큰일이죠! 교주님께서는 아직⋯⋯!”
“대관을 치르지 않으셨다고요? 아니면 교도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고 계신다고요?”
“⋯⋯!!”
“대체 뭐가 큰일이란 말입니까?"
소연심은 고개를 저었다.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시잖아요? 무리한 중원 진출이 본교에 얼마나 큰 해가 될지를요. 그것은 비단 본교만이 아니에요.
세상 어떤 조직이라도, 체제가 불안정한 상태에서의 무리한 정벌은 파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적어도 천마신교에서는 그러했다. 호요성의 얼굴도 한층 진지해졌다.
“불안정한 체제에서의 무리한 정벌이라⋯⋯. 하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죠?”
“소 원주의 그 생각, 혼자만 알고 계신 겁니까?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유추해 낸 것은 아니지요?”
“물론이에요.”
“다행입니다.”
"네? 뭐가요?”
“만일 소 원주가 제 생각보다 입이 가벼운 사람이었다면, 원주와 대화를 나누었던 누군가를 당장 추포할 생각이었거든요.”
순간 소연심은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 물론 그 대상이 수뇌부라면 얘기가 다르겠지요. 불러서 대답을 들은 후, 다른 데서 주절댈 것 같으면 그때 추포했을 겁니다.
“⋯⋯왜죠?”
호요성이 묘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아하니 이미 아시는 것 같습니다만?"
소연심의 눈치가 발군이라면, 호요성의 눈치 역시 번개가 따로 없었다.
소연심은 내심 주화에게 말하지 않은 자신을 칭찬했다. 호요성이라면 자신의 거짓말을 단숨에 꿰뚫어 봤을 것이다.
“그것이 정녕 교주님의 뜻이라면 저희가 막을 수는 없을 거예요."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시기를 늦춰 볼 수는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교주님께서는⋯⋯.”
“강철 같으신 분이지요.”
“네?”
“그 의지가 너무나도 단단해서,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든 이뤄 내시는 분입니다.
어쩌면 그와 같은 강한 의지와 추진력이 지금의 그분을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
“달리 말하면, 한 번 마음을 정한 그분의 뜻을 우리가 꺾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소연심은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자칫 잘못하면 교도들의 원망을 살 수도 있어요.”
이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호요성은 그녀를 책잡지 않았다. 지금의 대화는 허례허식을 배제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나 바쁜 겁니다.”
“네?”
"환희원은 이번 해, 본교의 예산을 짜느라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겠지요?
아마 교주님께서 다음 해가 오기 전에 전쟁을 일으키겠다 하신다면, 원주는 과로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저는 다릅니다.”
"다르다니요?”
“원주는 예산을 짜는 등 본교의 살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겁니다.
그러나 저는 교도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계책을 포함하는 내정(內政) 전반은 물론,
실제 전쟁이 벌어질 시 전선(戰線)에 직접 뛰어들어 본교의 병력을 진두지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
“군사(軍師)란 직책은 최고의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적군 중 가장 먼저 죽여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안전하며, 동시에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
"아시겠습니까? 저는 교주님의 뜻을 알고 난 이후부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내일 당장 전쟁이 터진다면, 저의 목숨도 내일로 끝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갈등,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는지 소연심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저는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막을 수는 없으니, 그분께 승리를 안겨 드려야지요. 그분의 승리가 바로 우리의 승리니까요.”
"⋯⋯."
“본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분의 의지가 강해서 막을 수 없는 게 아닙니다. 그분의 뜻이 신의 뜻이기 때문에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본질.”
“후대에게 더 탄탄한 환희원, 살기 좋은 신교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압니다. 하지만 결코 잊지 마십시오.
좋은 신교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일꾼은 우리지만, 그 일꾼을 부리는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을요.”
다 알고 있는 말이지만, 호요성의 말을 들은 소연심은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구나.'
별빛처럼 초롱초롱하며, 동시에 용암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호요성의 눈빛을 본 소연심은 깨달았다.
'나야말로 부족했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교주가 그러하겠다고 하면, 그 뜻을 꺾을 수는 없다고,
그러나 마음은 달랐다. 그녀는 서량이 삼공자였을 때부터 그를 봐 왔다.
대단한 친분이랄 것은 없지만, 적어도 그가 말은 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막고 싶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 전쟁이 터지는 것은 위험하다는 걸 인식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생각 자체가 자신이 서량을 교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교도들의 마음을 들먹이며 현재 신교의 상태가 불안하다고 말했지만, 정작 불안 요소는 자신이었다.
“아시겠습니까? 제가 왜 이 사실을 유추한 자를 잡아들이려고 했는지?”
"⋯⋯."
“지금 소 원주의 모습이야말로 교도들의 마음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지요.
지금이야 소 원주 한 명이지만, 그들 모두가 원주처럼 불안해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연심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오랜 세월 이천상이라는 절대무적의 강자의 치세 아래 살아서 안정을 추구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다 변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제가 실례했네요.”
호요성이 싱긋 웃었다.
“다행입니다. 마음을 굳히신 것 같아서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굳어 가는 과정이겠지요. 그리고 굳을 것입니다. 저는 소 원주를 믿고 있어요. 그래서 뇌옥으로 보낼 생각이 없습니다.”
소연심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어요. 미안해요.”
“앞으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걸 알기에 기쁩니다.”
그때였다.
“총군사님!”
“무슨 일이냐?”
“마신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교주님께서?”
“그렇습니다!”
“당장 채비하겠네. 한데 무슨 일로?"
“대관식과 마위(魔位)의 이양식 문제로 총군사님을 찾고 계십니다!”
소연심이 호요성을 바라보았다.
호요성의 눈이 깊어졌다.
“잠을 더 줄여야겠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