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십대천마(十代天魔) (5)
신교 내성 중앙 광장.
생동감 넘치는 악귀상이 우뚝 서 있는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광장 주변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은 물론, 단층 건물 위에도 사람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신교의 모든 마인이 모인 것 같았다. 실제로 임무를 받아 하산한 몇몇 부대와 경비병들을 제외한 마인들 대다수가 이곳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조용하군요.”
“그렇구먼.”
기양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렇게까지 고요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주님의 대관식이니 경건해야 함이 마땅하지만⋯⋯.”
“경건함과는 달라.”
“그렇습니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화약을 눈앞에 둔 것 같습니다. 혼란과 긴장으로 물들어 있어요.”
이군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거늘.”
호법원의 제일 조장으로서 수십 년간 신교를 위해 목숨을 바쳐 온 그였다.
그런 그였기에 한편으론 교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나 교도들이나 최고의 천마라 불리는 일대거인의 치세 아래 살아오지 않았던가.
이천상은 언젠가 자신보다 더 강해질 거라고, 신교의 미래를 빛내 줄 후계자라고 서량을 소개했었다.
그러나 당시 소교주에게 열광했던 교도들에게 있어, 서량은 대단한 가능성을 지닌 후계자였을 뿐 신(神)은 아니었다.
그들의 신은 언제나 이천상이었으며, 그 외에 다른 신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으리라.
한데 신은 죽었고, 신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 자가 교주가 되었다.
지독한 상실감과 허무함, 너무도 갑작스레 또 다른 신을 모셔야 한다는 현실이 교도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니 교주를 보러 광장에 모였는데도 기대감을 품기는커녕 잔뜩 긴장하고만 있는 것이다.
“본교의 교도들은 모두가 강합니다.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불안해할 이들이 아니지요.”
“그렇지.”
“그런데도 저런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전대 교주님의 치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겠지요.”
“동시에 우리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네.”
“예?”
교도들을 보는 이군성의 눈에 미약한 실망감이 어렸다.
그것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실망이었고, 나아가 자신에 대한 실망이기도 했다.
“역사에 다시 나기 힘든 성신(聖神)의 치세를 받았다 한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또 다른 신이 교주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세.
당장의 허탈함, 슬픔, 좌절감이야 누구라도 느낄 수 있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지금까지 끌고 와서는 안 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도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 역시 그렇다네. 그래서 더욱 실망하고 있지."
“⋯⋯.”
“전대 교주님의 치세는, 완벽은 몰라도 최고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어.
그런 시대에 살았다면 후대에겐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미래를 대비했어야 함이 마땅하네.
그러나 저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여태 과거에서 살고 있지."
그리고 나도.
이군성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뒷말을 삼켰다.
어쩌면 교주와 가까울수록 그런 마음을 더 강하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비록 그가 호법지장은 아니었으나, 호법원의 이인자로서 평생을 바쳐 신교를 지켜 오지 않았던가.
그 역시 전대 교주의 갑작스러운 타계에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이었다. 아마 여기 모인 모두가 그러하리라.
“부디 이 대관식이 무탈하고 편안하게 끝나기를 바랍니다."
"나도 같은 마음일세.”
기양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후배가 아주 멋지게 크지 않았습니까? 이젠 후배라 부르기도 애매하지만 말입니다."
이군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호법원 내에서도 제법 말이 많더군요. 질투에 사로잡힌 몇몇 호법들은 줄을 잘 섰다고들 얘기하지만, 그야말로 헛소리에 불과하지요.”
“물론일세.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동필이는 교주님과 함께 무수히 많은 사선을 넘나들었어.
지금 녀석이 앉은 자리는 그 녀석 스스로 쟁취한 것이지.”
“참으로 대견합니다. 이젠 예전처럼 편하게 대하지도 못하겠지만요.”
말이 개인 호위지, 교주의 유일무이한 친위 부대 무사나 다름이 없다. 호천마황단과는 또 다른, 그야말로 밀착 호위인 것이다.
기실 신교 최고의 실세라 봐도 옳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 마동필이 악랄한 부탁을 하더라도 교주님이라면 흔쾌히 들어주실 것 같았다.
“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이 넘쳤던 한 젊은 호법이, 어느새 태산의 정상에서 신과 함께 서게 됐구나.”
기양은 진심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그것은 이군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만큼 걱정도 됐다. 누군가를 평생토록 지키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닌바, 심지어 호위 대상이 천마신교의 정점인 교주가 아니던가.
아마 앞으로 고생이 많을 것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교주님께서 부리는 영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중원 놈들은 염왕이수(王二獸)라 부른다고 하더군.
염라대왕이 부리는 두 마리 짐승이라⋯⋯ 그럴듯해.
교주님께서 잠시 중원에서 활동하실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 주셨으면 그런 명칭이 붙었겠는가.”
기양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데, 그 영물들이 어째 보이질 않습니다. 소교주 대관식 때는 교주님의 뒤를 따랐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건 나도 모르겠네.”
두 사람이 걱정과 기대로 가득한 대화를 한창 이어 갈 때였다.
쿵!
저 멀리 내성과 외성을 잇는 대문 쪽에서 강한 울림이 퍼져 나왔다.
“헉!”
“으음, 여전히 크구나.”
적막하기 짝이 없던 광장 일대가 순식간에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쿵. 쿵. 쿵.
저 멀리서부터, 흑황의 줄무늬를 한 거체가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체고가 성인 남성의 키보다도 더 큰 거대한 호랑이가, 그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발을 천천히 내디디며 걸어왔다.
피처럼 붉은 두 눈은 매섭게 치떠 있었고, 이마에는 선명한 왕(王) 자가 새겨져 있었다.
천 근이 넘어가는 무게를 지닌 괴물 호랑이였다. 길게 뻗은 꼬리가 사람의 허벅지만큼이나 굵었다.
“호왕.”
염왕이수의 하나, 새외사궁 중 야수궁의 궁주가 사역했다던 전설적인 맹수의 등장이었다.
마치 서량이 과거 소교주 시절보다 훨씬 더 강해진 것처럼, 호왕 역시 그때보다 한층 위압적인 분위기를 피워 내고 있었다.
촤르르륵.
교도들이 좌우로 길을 비켜 주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호왕은 교주님이 부리는 영물이었다. 감히 길을 막을 순 없었다.
그렇게 호왕이 중앙 광장, 악귀상 앞까지 도달했다.
스륵.
호왕이 악귀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 뒷모습이 마치 거대한 곰을 보는 것처럼 웅장했다.
"갑자기 왜 저 짐승이 나타난 거지?"
“교주님께서 오시려나 보다.”
“한데 그 여우 요괴는 왜 안 보이고?”
이유야 어찌 되었든 호왕의 등장으로 인해 적막하던 분위기는 완전히 깨져 버렸다. 교도들은 새삼 호왕의 존재감에 감탄했고, 그 크기에 놀랐다.
저 멀리 칠층탑 정상에 서서 광장을 내려다보던 철무정이 눈을 빛냈다.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 말인즉, 교도들의 마음에 빈틈이 생겼다는 것. 총군사의 작전인가?'
신장부주인 그 역시 광장에 들어서야 했다. 그런데도 그가 이곳에서 광장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장부의 고위 마장 열 명 전원이 내성 곳곳을 에워싸며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듣기로 교주님께선 마황거를 치우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철무정이 마신궁 쪽을 바라보았다.
'마황거는 교주의 상징. 한데 왜 마황거에 오르지 않으시려는 것일까?'
그때였다.
"며칠 쉬더니 더 커졌네?”
순간 깜짝 놀란 철무정이 광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교도들 전부가 광장의 악귀상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악귀상의 머리 부분, 뿔이 난 곳이었다. 그곳에는 어느새 시커먼 곤룡포를 걸친 장대한 체격의 청년이 자유분방한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풀어 헤친 머리카락은 바람에 살랑였고, 깊고 맑은 눈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무척이나 부드럽고 자애로운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동시에, 그와는 별개로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는 존재감 또한 발산하고 있었다.
“⋯⋯교주님?!”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다.”
교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쿵!
“군림성교! 천마불사! 미욱한 마의 자식들이 성신(聖神)을 알현하나이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느닷없는 교주의 등장에 모두가 크게 당황했지만 그들은 결코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드리워진 신을 향한 신심(信心)이 발현된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서량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교도들을 내려다보았다.
“무릎들 안 아픈가?”
“⋯⋯?!"
“편하게들 앉아라.”
편하게 앉으라니?
교도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교주의 대관식을, 마위 이양식을 보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한없이 엄중해야 할 자리임이 분명한데 편히 앉으라니?
그때, 호요성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편하다!”
교도들은 충격받은 얼굴로 호요성을 바라보았다.
호요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뭣들 하고 계십니까? 교주님께서 편히 앉으라고 하시잖습니까? 편히들 계세요.”
편히 앉으란다고 정말 편히 앉다니? 제정신인가?
"어이쿠! 안 그래도 허리가 쑤셨거늘 잘 됐구먼.”
놀랍게도 광마존을 위시한 마존들도 호요성을 따라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연심, 무담은 물론 수뇌부 모두가 제각기 편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교도들이라고 계속 무릎을 꿇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모든 교도들이 자리에 앉아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서량은 품에서 작은 술병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이천상이 직접 담근 육천심주(六天心酒)였다.
“크, 좋다.”
모두를 모아 놓고 홀로 술을 마신다.
교도들은 더더욱 당황했다. 그들은 교주님께서 저리 소탈하게 술을 드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이후였다.
서량은 말없이 술만 마셨다.
미소 가득한 표정을 보면 분명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 사람을 다 모아 놓고 아무 말도 없이 술만 들이켜니 앉은 사람만 괜스레 불안해졌다.
잠시 후, 서량이 병을 완전히 비웠다.
그러고도 서량은 아무 말이 없었다. 편하게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떡하니 팔을 걸어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자유로움이 묻어 나왔다.
침묵의 시간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서늘한 바람을 타고 흐른 햇빛이 내성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좋은 날씨였다. 내리쬐는 햇빛과 차가운 바람이 부딪치며 기분 좋은 건조함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났다.
계속 시간이 흐르자, 이상하게도 불안함으로 가득했던 교도들의 얼굴에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좋은 날씨 덕분일 수도 있었고, 교주님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가 처음 모두가 모였을 때보다 한결 편해졌다는 것이다.
무겁고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침묵도 더는 무겁지 않았다.
평화로웠다. 따뜻했고, 시원했다. 편히 앉았음에도 불편한 마음에 엉거주춤하던 교도들이 마침내 허리에 힘을 빼기 시작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일각, 이각 그리고 반 시진.
중천에 떴던 해가 어느새 서쪽으로 살짝 기울었을 때쯤.
저벅저벅.
마치 사람이 걸어오는 것처럼.
크고 길쭉한 네 다리를 이용해 산뜻하게 걸어오는 한 짐승이 있었다.
그 크기는 가히 놀라웠다. 호왕에 비할 수는 없지만, 어지간한 대호를 떠올릴 만큼 덩치가 커다란 짐승이었다.
전신의 털은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사자의 그것처럼 풍성한 갈기가 가슴께까지 내려와 살랑거리고 있었다.
서량의 눈에 아련함이 깃들었다.
“금호.”
크릉.
어디서, 어떻게 찾아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호왕이 걸어왔던 그 길로 금호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금호는, 한 자루 고색창연한 보검을 물고 있었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모시고 왔구나. 사부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