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투쟁을 읽는 자들 (1)
"대관식이 끝났다고요?”
“그렇소.”
여강휘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애써 여기까지 왔는데 이미 대관이 끝나 버렸다고 하면 우린 뭘 해야 해?”
허탈함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문득 고구를 바라보았다.
고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커허험! 생각해 보니 저희보다는 고 당주가 더 씁쓸하시겠습니다.”
“음?”
“그래도 새 교주님의 즉위식인데 그걸 보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고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전대 교주님이 돌아가신 후, 난 이미 그분을 새 교주님으로 모시고 있었소. 대관식을 하든 말든, 나는 끝까지 그분을 내 주군으로 모실 것이오.”
그 대답을 들은 여강휘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정말입니까?”
“무슨 뜻이오?”
“듣기로 고 당주는 소교주, 아니 교주님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것으로 압니다만.”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고구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부차적인 문제요. 나는 그저 그분이 본교를 이끌어 가시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분이라는 걸 알고 있을 뿐이오.”
“그건 또 묘한 발언이로군요."
“뭐가 말이오?”
“천마신교에서 교주는 신(神)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소.”
“제가 본 교도들은 그들의 신을 모시는 데 있어 능력과 성품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한데 고 당주는 다른 모양이로군요."
날카로운 발언이었다.
고구는 쉽게 인정했다.
"주군의 능력이 뛰어나면 아랫사람이 덜 고생하는 법이오.”
독특한 사람이다. 적어도 여강휘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천마신교만큼은 아니더라도 빙궁 역시 모든 조직원이 궁주에게 절대충성한다.
누가 궁주가 되든, 정식으로 궁주의 자리에 앉기만 하면 능력과 성품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신앙에 가까웠다.
그래서 빙궁주는 교주만큼이나 반역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물론 반역을 허용할 만큼 만만한 사람이 궁주가 되진 않지만 말이다.
‘마치 정파 무림인의 사고를 보는 듯하군.'
그때였다.
“무례는 그쯤 하면 되었다.”
여강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명의 중년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아버지.”
“네가 날을 세워야 할 대상은 본궁의 적뿐이다. 상대를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정도 이상의 전진은 관계를 파탄 내는 지름길이니라.”
여강휘가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심하긴 했지요?"
"괜찮소.”
고구가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중년 사내는 그야말로 순백으로 물들어 있었다. 입고 있는 의복은 물론이거니와 곱게 늘어뜨린 머리카락도 여강휘처럼 새하얗기만 했다.
심지어 피부도 여인처럼 투명한 흰빛이었다. 이마와 눈가에 잔주름은 있었지만, 원체 하얀 인상이라 그런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바로 올라가시겠습니까?”
여강휘를 대하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깍듯한 모습이다.
천하의 고구조차도 예를 표하는 인물이라면 적어도 거대 문파의 수장 정도는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사내는 거대 문파의 수장임은 물론이거니와 무인으로서도 존경을 받아 마땅한 위치에 거하는 초고수였다.
북해빙궁의 궁주이자 여씨 남매의 아버지.
북천괴성(北天魁星), 북해제(北海帝)라는 이명으로도 불리는 절대강자 여극도(呂克到)가 그였다.
“올라가기야 해야겠지. 하지만 우리 잠시만 기다려 보세.”
“누구 또 올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사람은 아닐세. 그러나 저쪽에서 자꾸 신호를 보내는군.”
신호를 보낸다? 참으로 이질적인 표현이다.
여극도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아직 내 몸이 온전치 못하지만 한 사람의 몫을 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거늘, 저곳에서 다가오는 괴물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군.
과연 중원은 중원이라, 인재가 많기도 하구나.”
여강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수입니까?”
“그렇다. 그것도 천위(天位)의 고수로구나. 내 몸이 정상일 적에 붙는다 한들 승패를 가늠키 어려운 이야.”
여강휘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물론 그것은 고구도 마찬가지였다.
북해빙궁은 새외사궁에서도 최강이라 불리었고, 그곳의 수장인 여극도 역시 새외 무림에서 첫손에 꼽히는 무적의 고수였다.
그런 그와도 승패를 가늠키 어려운 고수라면 능히 십대고수급이라 불리어도 부족하지 않다.
츠츠츠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북동쪽에서부터 은은한 예기가 번져 나왔다.
놀라우리만치 날카로운 검기(劍氣)였다. 검을 뽑아서 휘두른 것도 아닌데 검기가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존재 자체가 검(劍)이다. 가히 검의 화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였다.
잠시 후,
"겨울은 겨울이라 중원 북부에는 아직도 눈이 오는 곳이 많소이다.
남쪽으로 오면서 점점 날이 따스해진다 싶었거늘, 그대의 기도를 느끼곤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보았소이다.”
한 노인이 껄껄껄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다가왔다.
기골이 장대하진 않았지만 꽉 조여진 기도처럼 신체 역시 완벽하게 가다듬어진 노인이었다. 키는 컸고, 눈빛은 자애로움과 매서움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여극도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짧게 고개를 숙였다. 북해의 예법이었다.
"중원의 노기인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살면서 북해의 주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소이다. 나 역시 영광이오.”
여극도가 빙궁주인 것을 단숨에 꿰뚫어 본 그였다. 하기야 빙공(功)으로 여극도만 한 경지에 오른 고수는 적어도 중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극도가 물었다.
“혹, 그대는 검왕(劍王)이 아니오?”
“아직 검도(劍道)의 중간에도 이르지 못한 늙은이에게는 지나치게 과분한 별호외다.”
여극도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검도가 극의에 이르러 오히려 구름처럼 말랑말랑해졌소이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필시 상상을 초월하는 검기(劍技)를 보여 주시겠지. 가히 중원제일검(中原第一劍)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소.”
“북천괴성의 한빙무공은 용암도 얼려 버린다 들었소.
그저 희언에 가까운 소문이라 생각했거늘, 그 말이 희언이 아니었다는 걸 오늘에야 깨닫게 되오.
만일 궁주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내 언감생심 검을 뽑지도 못했을 것 같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남궁언의 얼굴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그는 한눈에 여극도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고수로다.'
만일 상대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순수한 전투로는 자신이 밀렸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 정도로 갈무리한 기운의 농도가 무지막지했다.
여극도 역시 남궁언의 깨달음에 내심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깨달음이 극에 이르렀다. 만일 전투 능력 또한 저 깨달음만큼이나 깊었다면, 중원제일검이 아니라 당대 천하제일인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터.'
남궁언은 여극도의 무공이 품은 강함을 느꼈고 여극도는 남궁언의 무공이 가진 깊이를 느꼈다.
서로가 익힌 무공의 특성이 너무나도 다르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이만한 놀라움을 안겨 주는 고수는 달리 없을 거라는 것.
"혹, 대산(大山)에 오르려 하오?”
“그렇소이다.”
“그럴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다만, 정파 최고의 검가(劍家)에서 교주의 즉위를 보러 왔다는 것이 의아할 뿐이오.”
남궁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대외적으로 적이긴 하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여극도는 남궁언과 서량의 관계를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남궁언이 여강휘를 바라보았다.
"궁주의 자식 이외까?"
“그렇소이다.”
“과연 대단하오. 이 젊은 나이에 벌써 이러한 경지라? 빙궁의 앞날이 밝겠소.”
여강휘가 포권을 취했다.
“검왕 선배님을 뵙습니다. 빙궁의 소궁주 여강휘라 합니다.”
“반갑네. 자네도 힘들겠구먼. 아버지가 저리 뛰어나신 분이니, 아들로서도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어.”
“하하, 아버지는 아버지고 저는 저 아니겠습니까.”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하지만 진심이 가득하다.
남궁언이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독특한 청년이로군. 하지만 싫지는 않아.'
얽매인 것 같으면서도 무척이나 자유분방해 보인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저 독특한 성품이 차후 빙궁을 얼마나 성장시킬지 궁금했다.
“괜히 얘기가 길어졌소이다. 남은 얘기는 올라가면서 하십시다.”
“그러십시다.”
남궁언이 고구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길잡이인가?”
“그렇습니다.”
“하면 부탁하네.”
고구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따라오십시오.”
그때, 남궁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궁주의 여식은 어디에 있소? 전에 서 교주가 본가에 왔을 적, 귀궁의 여식도 함께 왔었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아, 그 아이는 현재 호위들과 함께 지내고 있소.”
“호위?”
“그렇소. 아무래도 서 교주와의 중원행을 통해 깨달은 바가 적지 않았던 것 같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으면 그때 대산에 올라가겠다고 하더이다.”
남궁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 교주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군. 내 손녀와 손자도 서 교주를 보고 충격이 컸던 모양이오. 두문불출하며 무공 연마에 힘을 쏟더이다.”
“그 젊은 나이에 마도 무림의 정점에 섰으니, 적어도 다음 세대에선 가장 선두에 서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소.”
“지금 세대의 선두라 봐도 좋을 거요. 그 정도 성장 속도라면 말이오.”
여극도가 웃으며 말했다.
“어디 한번 확인해 보러 갑시다.”
*
*
*
“교주님.”
“아네. 대호법에게 들었어.”
호요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궁으로 부를까요?”
“어떻게 하면 좋겠나?"
“물론 쉬이 대해선 안 될 인물들이긴 한데⋯⋯.”
“한데?”
“쩝, 제아무리 손님이라도 그런 고수들을 마신궁으로 불러들이기엔 좀 그렇잖습니까?”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습이라도 당할까 봐 그러나?"
“설령 그들이 암습을 가한다 한들 성공이나 하겠습니까? 다만 그런 시도 자체가 있어선 안 되다는 거죠.”
어제 서량이 스스로 대관식과 마위 이양을 끝낸 후, 그를 대하는 호요성의 자세도 물렁물렁해졌다.
본인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앞으로를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믿을 만한 사람들이니까.”
“정말이죠?”
“거 무엄한데?”
“무엄해도 별수 있겠습니까. 교주님께서 워낙 모험을 즐기시는 것 같아 벌써 흰머리가 왕창 나는 기분입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죄다 백발이 되기 전에 세상을 안겨 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일 거야, 자네 고생은."
“듣기만 해도 등허리가 으스스합니다.”
호요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자네는 어디 가나?”
“예?”
“자네도 같이 있어.”
“그래도 됩니까?”
“그럼 교주 홀로 외로이 놔두고 가 버릴 생각이었어? 앞으로 자네가 많이 봐야 할 사람들이야.
이 기회에 잘 봐 두고, 이용할 수 있으면 제대로 이용해 먹어 봐.”
“그래도 됩니까? 교주님하고 개인적인 친분도 있는 분들인데요?"
"그거 다 알고 서로 이용해 먹어도 가능할까 싶은 게 마도천하야. 알잖아?”
서슴없이 마도천하를 입에 담는다. 전혀 부담이 없는 듯 들리면서도 반드시 그것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묻어 나왔다.
호요성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교주님, 빙궁주와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