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투쟁을 읽는 자들 (3)
휘두르는 단창에 막강한 경력이 실렸다.
쉬이이익! 퍼엉!
창날에서 뿜어져 나온 발경이 굵은 나무를 밑동부터 짓눌러 단숨에 부러트려 버렸다.
대단한 힘이었다. 사람의 육신 정도는 일격에 박살 낼 수 있을 기세였다. 창술 자체의 수준이 높지 않아도 이만하면 힘으로 압도할 수 있을 만큼 경력의 무거움이 대단했다.
"후욱!”
종리영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 나이대의 소년들은 성장이 빠르다. 어느새 훌쩍 자란 종리영은 청년이라 불러도 될 만큼 탄탄한 체격을 갖추고 있었다.
멀리서 종리영을 보던 서량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체격 하나만큼은 타고났군.'
아비를 닮아서 그런지 기골이 장대하다. 아직 완성되진 않았지만 저대로 성장한다면 필경 완성도 있는 육체를 갖추게 될 것이다.
'육체도, 무공도 성장이 빨라. 기공(氣功)의 운용법도 나이에 비해 수준급이다.'
단순한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힘든 성과다. 투로(套路)는 정석으로 밟지만 기공 운용은 창의적이다. 여러모로 타고난 무골(武骨)이란 생각이 들었다.
“후우우, 아직은 부족해.”
나직이 중얼거리던 종리영이 어깨를 풀었다. 꿈틀거리는 근육은 강인함과 유연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조금 더 산뜻하게 치고 들어가면 분명 상대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새에 하단 방어를 뒤흔들 수⋯⋯."
“아니지.”
“헉!”
깜짝 놀란 종리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수풀에서 걸어 나오는 서량을 본 종리영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군림성교, 천마불사. 종리영이 교주님을 뵙습니다!”
“허, 이놈 봐라? 너 벌써부터 기억력에 문제 있냐?"
“⋯⋯예?”
“둘이 있을 때는 형님이라고 부르랬잖아. 교주는 염병.”
“교, 교주님!”
종리영은 당황했다.
형님이라니? 그건 서량이 소교주였을 때나 가능한 호칭이었다. 신교 최고의 권력자이자 마도 무림의 신(神)이 된 사람에게 어찌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서량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너, 방금 진기의 속성을 바꾸려 들었지?”
"예? 아⋯⋯ 예에.”
대답하면서도 얼떨떨하다. 느닷없이 서량이 나타날 줄도 몰랐거니와 단번에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선 안 된다.”
“예?”
"너의 진기는 이미 충분히 연마되었어. 질적 향상을 이룰 여지는 남아 있지만 다른 길을 노릴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종리영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자, 봐라.”
쿵!
갑작스레 진각을 내디딘 서량이 힘차게 주먹을 뻗었다.
후웅!
공기가 밀려 나가는 듯했다.
서량은 본디 암경(暗勁)과 폭경(爆勁)에 능했다. 작은 힘으로 최대의 효율을 노리는 살법(殺法)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강한 힘으로 밀어 누르는 압경(壓勁)과 중경(重) 역시 못 다루진 않았지만, 효율을 위해 섞어 쓰거나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숨겨서 쓰길 선호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실제 발경으로 기를 뿜진 않았으나, 중경의 힘으로 공간에 퍼져 있는 공기 자체를 밀어 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종리영은 눈알이 빠질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어때? 이게 네가 연마하고 있는 수법이지?”
"어, 어떻게⋯⋯?!”
마도대종사라면 이 정도 무공이야 숨 쉬듯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수법이 단번에, 그것도 극치에 이른 깨달음으로 구현되는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이 힘을 혈도가 버티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으로 뿜어냈다면 바위도 우습게 으스러트렸을 거다. 즉, 이것이 네가 추구하는 발경이야.”
“그, 그렇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진기의 속성을 바꾸면 네가 연마하고 가꾼 중경의 장점이 사라져 버린다. 길이 틀렸다면 지금이라도 바꾸기를 권고하겠지만, 너의 무도(武道)는 틀리지 않았어.”
자세를 푼 서량이 검지를 들었다.
“중요한 것은 진기의 속성이 아니라 기공의 묘(妙), 즉 방식에 있다.”
“방식이요?”
“그래.”
서량이 검지로 부러진 나무를 가리켰다.
“봐라, 밑동부터 짓눌린 채 부러졌지? 무겁고 강한 경력으로 공격을 가한다면 저 나무처럼 부러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힘의 방향을 바꾼다면?"
힘의 방향을 바꾼다?
종리영의 의아한 시선을 받은 서량이 또 다른 나무 앞에 섰다.
“자, 나는 똑같은 중경으로 저 나무를 가격할 것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도록 해.”
쿵!
대답할 새도 없었다. 어느새 진각을 밟은 서량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콰지지직! 퍼어엉!
종리영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서량이 자세를 풀었다.
"어때?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지?”
종리영이 창으로 가격한 나무와는 달리, 서량이 가격한 나무는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부러진 게 아니라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이런 무공을 사람에게 쓴다면 생존을 장담할 고수는 얼마 없을 것이다.
“너와 내가 품은 기의 질적 차이는 명확하다. 하지만 네가 칠(七)의 힘을 썼다면 나는 이(二)의 힘을 썼어. 그런데도 나무가 망가진 정도는 다르지.”
“⋯⋯!”
“내가 어떻게 나무를 이리 만들었을 것 같으냐?"
종리영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회전⋯⋯?!”
“정확해. 요는 진기의 변화가 아니라 발경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단단한 돌을 그저 빠르게 던지는 것보다, 회전을 걸어 던지는 것이 더 강한 관통력과 파괴력을 낼 수 있는 것이지.”
서량이 주먹을 천천히 회전시키면서 앞으로 뻗었다.
“기(氣)는 세상 만물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대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법. 회전을 걸든, 뾰족하게 날을 세우든, 넓게 퍼트려 휘감아 버리든 너의 무공 특성에 맞게 단련하면 힘은 따라오게 마련이야.”
“아⋯⋯!!”
“기는 그저 기일 뿐이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나 태산도 작은 돌멩이 하나, 흙 한 줌이 쌓이고 쌓여 구름을 뚫고 솟아 있는 것이다.”
“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이로군요?”
“의미는 부여해야지. 다만 외따로 떨어진 무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단 말이다. 너의 팔처럼, 너의 진기도 너와 한 몸이야. 그걸 깨닫게 되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어지겠지."
서량이 눈을 찡긋했다.
“어떠냐? 도움이 좀 됐나?"
멍하니 서량의 무론(武論)을 듣던 종리영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해는 무슨. 그리고 교주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자꾸 그렇게 약속 어길래?”
종리영은 다시 당황했다.
“하, 하지만⋯⋯.”
“하지만 뭐?”
“어찌 감히 교주님께⋯⋯.”
서량이 콧방귀를 퍽퍽 뀌어 댔다. 누가 보면 저러다 콧물까지 나오겠다 싶을 정도였다.
“너는 네가 거경가주가 되었다고 해서, 너희 아버지한테 반드시 가주라 불러 달라고 요청할 셈이냐?"
“그, 그건 아니지만⋯⋯.”
거경가는 무가고, 천마신교는 근본적으로 종교다. 애초에 비교 대상이 아니란 뜻이다.
그러나 서량에게는 아니었다.
“그래서 둘이 있을 때, 라는 전제를 붙였잖아. 자꾸 그렇게 딱딱하게 나오면 나 섭섭해.”
종리영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서량의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섭섭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한데⋯⋯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명칭만 생략한 극존대로군.”
“아,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오냐.”
종리영은 잠시 망설였다. 아무래도 쉬이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 후, 종리영이 입을 열었다.
“제게 이리 무공을 가르쳐 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핏줄은 아니다만 그래도 동생 삼은 놈인데, 이까짓 가르침 같지도 않은 가르침 하나 알려 주는 게 뭔 대수라고?”
“저⋯⋯.”
“답답하구먼. 그냥 말해, 이놈아.”
종리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저희를 내치지 않으실 건가요?"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내쳐? 너희를? 근데 너희가 누구냐?”
"⋯⋯."
“아!”
이제 보니, 이천상에게 가르침을 받은 다른 제자들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너희를 모조리 쫓아낼까 두려웠느냐?"
종리영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정확히는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할까 봐 무서웠다. 본디 권좌를 차지한 자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반란의 씨앗을 제거하는 일이고, 반란의 씨앗이라 하면 역시나 함께 경쟁했던 사형제지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역대 후계자 싸움에서 흔히들 벌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형제들을 한직으로 쫓아내거나 누명을 씌워 죽였다.
그러나 종리영은 도망칠 수 없었다.
도망쳐 봤자 갈 데도 없었으며, 애초에 자신의 아버지는 마도칠가의 일익을 담당하는 거경가주였다.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루하루 수련에 임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행위가 서량에게 위기감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넋 놓고 있기도 싫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종리영이 이 정도로 성장한 이유는 그처럼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수련에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
"하고 싶은 말이야 산더미처럼 많지만,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진 않겠지. 나는 너희를 내칠 생각도, 죽일 생각도 없다.”
"⋯⋯감사합니다.”
“감사? 나는 그게 왜 감사해야 할 일인 줄 모르겠군.”
“예?”
“경쟁했던 상대도 보듬지 못하는 그릇으로 교주 노릇을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종리영은 서량의 커다란 그릇에 감탄했다.
"그리고 약속했잖아, 형님 동생 하기로. 나는 내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야. 형이 되어서 어떻게 동생을 죽이겠냐?”
종리영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제아무리 약속이 중요하기로 반역의 불씨가 될 수도 있는 인물을 살려 주는 배포는 아무나 보여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량이란 인물이 놀라웠고, 동시에 고마웠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수련이나 더 열심히 해라. 교주는 못 됐어도 큰 사람은 되어야 할 것 아냐? 네 녀석들 자리는 항상 비워 둘 테니, 이 악물고 단련해서 나랑 같이 역사 한번 써 보자고.”
"교주님의 명을 받⋯⋯.”
"쓰읍, 이놈 새끼가?”
"아, 알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서량이 웃으며 종리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종리영이 아무리 컸다. 한들, 아직 서량보단 한참이나 작았기에 그 모습이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어쩌고 있냐?"
“저처럼 거처나 인근 수련장에 있을 겁니다.”
“한 번씩 들러야겠군.”
"예에.”
"아, 그나저나 너한테 따로 부탁할 일이 하나 있다.”
“말씀하세요, 형님.”
“벌써 입에 착착 감기나 보네?"
“⋯⋯.”
“농담이야, 인마.”
"헤헤.”
"실없긴. 그나저나 너, 집에 간 지 얼마나 됐어?”
“파순제 때 입교한 이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으래? 그럼 이참에 부모님 얼굴도 뵈면 되겠구만?"
“예?”
“네 나이가 몇이지?”
“여, 열여섯이요.”
"음, 좀 어리기는 하지만 능력만 있으면 딱히 상관없으려나? 하긴 덩치도 좋으니까.”
서량의 얼굴에 음험한 빛이 떠올랐다.
"특수감찰사 일 한번 해 볼래? 광마대도 딸려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