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움트는 씨앗 (2)
"허허, 이런 깜찍한 사람을 보았나.”
총군사 면전에서 교주를 그리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호요성도, 말하는 여극도도 평온한 기색이었다.
“먼저 초대를 받은 건 아니지만 참으로 야속하도다. 금방 또 손속을 나눠 볼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출정을 한단 말인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호요성이 대번에 맞장구를 쳤다. 투덜거리며 말하는 걸 보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여극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실 언질도 없이 찾아왔으니 우리가 섭섭하다고 말할 건 아니긴 하지. 그나저나, 자네 정말 천마신교의 총군사가 맞나?"
“물론이죠.”
“내 신교에서 이틀밖에 있지 않았지만, 자네처럼 교주를 뒤에서 씹는 사람은 처음 봤네.”
씹는다?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적어도 구파일방조차 넘어서는 거대한 단체의 수장이 뱉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호요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대 교주님이었다면 언감생심 어찌 씹었겠습니까? 다 교주님 정도 되니까 허락해 주시는 거죠.”
묘한 말이었다. 전대 교주가 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들리기도 했고, 서량이 더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 해석되기도 했다.
남궁언이 슬쩍 끼어들었다.
“오늘 자정에 출정한다고? 한 시진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렇습니다.”
“자네의 얼굴을 보니, 이 시간에 우리를 찾아온 것엔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네만?"
호요성의 눈이 반짝였다.
‘과연 다르긴 다르군.'
이 정도 경지에 오른 고수들의 무서운 점은 바로 저 눈치와 직감이었다.
물론 여극도나 남궁언은 드높은 무공만큼이나 강호 경험이 많은 이들이었다. 강호의 경험이 많다는 것은 사람을 볼 줄 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만한 고수들이 교주님께 우호적이니, 그건 참 좋은 일이로군.'
물론 언제든 적으로 돌아설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남궁언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나 호요성은 서량을 믿었다. 서량이라면 이 놀라운 노고수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고도 천하를 집어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뭐, 싸워야 한다면 어떻게든 작살을 내놓겠지만 이왕이면 전력 손실이 없는 게 좋으니까.'
호요성이 낄낄낄 웃으며 말했다.
“대단한 눈치십니다.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말 안 해도 알 것 같네만?"
“역시 그렇지요? 제가 생각해도 좀 속보이긴 했습니다.”
여극도가 남궁언을 보았다.
“나나 내 아들이야 괜찮다지만, 검왕 선배는 힘들지 싶네. 축하 인사 정도야 그럴 수 있다 쳐도 함께 싸우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검왕 노선배께는 호위나 딸려 드릴 생각이에요.”
“호위?”
“예.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와 그를 따르는 초절정고수들을 호위 삼아 돌아가실 생각 없으십니까? 어차피 강서성이면 안휘성과도 가까운데요.”
남궁언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깜찍하기론 교주나 총군사나 비슷한 것 같소, 궁주.”
“그러게나 말이외다.”
말이 호위지 호위를 빙자한 동행이요, 전우(戰友)였다. 남궁언의 성격상 서량과 신장부에 위기가 닥칠 때, 그냥 두고만 보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한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여강휘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본궁도 군사를 뽑아야 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대단한 꾀주머니가 있으면 빙궁도 더 성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마음 같아선 이 사람을 확 납치해서 본궁으로 끌고 가고 싶구나.”
“그러게요.”
호요성이 몸서리를 쳤다.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티를 안 내서 그렇지, 교주님 질투심이 장난이 아닙니다. 제가 납치되면 북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으실 거예요.”
“알 것 같네.”
“그래서 답변은요?"
세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호요성은 대답도 듣지 않고 웃으며 일어났다.
“세 분 마음 알겠습니다. 교주님께 알릴 테니, 반 시진 뒤에 마신궁 비문으로 오시면 됩니다."
"에?”
“그럼 이만."
호요성은 그 말을 끝으로 진짜로 나가 버렸다.
여극도가 입맛을 다셨다.
“이거야 원. 사위 삼을 사람과 이런저런 얘기나 나눠 볼 요량으로 찾아왔거늘,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누.”
남궁언의 눈이 커졌다.
“사위라니? 서 교주를 말함이오?”
“그렇소.”
“서 교주를 사위로 삼으실 생각이오?”
“젊은 나이에 교주의 지위에 오를 만한 무력과 지혜를 갖추었고, 성격을 보니 소박하면서도 화통한 면이 있더이다. 사위로 삼기에 이만한 인재가 또 있겠소?”
남궁언은 혀를 내둘렀다.
"다 맞는 말씀이오만, 사위 삼겠단 생각 자체가 쉽지 않았을 듯하오. 참으로 대단하외다."
어쩌면 그것은 두 사람의 태생 때문일 수도 있었다. 친분이 있긴 해도 남궁언은 정파 무림 최고의 무가(武家)라는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였다. 아무리 그래도 천마를 사위로 들일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반면 여극도는 중원 무림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정파에서는 새외사궁을 모조리 사파 취급할 때도 많았다. 그런 빙궁에게 천마신교는 오히려 정파나 사파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밥도 먹었겠다, 미리 일어나십시다.”
“한데 궁주 몸은 괜찮소?
“어쩌겠소? 그만한 위인을 사위 삼으려면 빙장될 사람도 나름대로 노력을 해야지.”
*
*
*
"음, 저기 있구만."
“그러게요.”
마신궁의 비밀 문을 통해 들어왔다가 샛길로 빠져나간 그들은 어느새 신교 외성 밖에 도착했다.
세 사람 눈에 절벽 위에 선 서량의 뒷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대단한 체격이었다. 거기에 위엄이 느껴지는 붉은 장포를 걸치니 굉장한 박력이 풍겨 나왔다.
남궁언의 눈이 빛났다.
'검?’
펑퍼짐한 장포의 허리춤 쪽이 불룩 솟아 나와 있었다.
도(刀)가 아니라 검이었다. 중원의 여느 패검보다 더 길고 널찍한 장검이 분명했다.
'도객(客)인 사람이 검을 찼다? 교주의 신물이라도 되는 겐가?'
그때였다.
남궁언과 여극도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여강휘는 평온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서 교⋯⋯.”
스륵.
여극도가 아들의 어깨를 잡았다.
여강휘가 옆을 돌아보았다. 여극도가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시지?’
여강휘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 때였다.
“밥들은 잘 먹었나?"
화아아아악!
산등성이 아래쪽에서 무시무시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일순간 뿜어지는 마기의 폭풍이 실로 막강했다. 극마의 고수라도 겁을 집어먹을 만큼 폭발적으로 솟구치는 마기는 앞에 선 무엇이라도 부숴 버리겠다는 듯한 투지로 꽉 차 있었다.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벌써부터 그리 어깨에 힘 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거대하고 고고한 마기가 한 차례 출렁거렸을 뿐이었다.
“잘 쉬고 있는데 불러내서 삐진 건 아니지?"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러나 서량의 유쾌한 말에 마기를 뿜는 고수들은 당황한 모양이었다.
웃음이 나올 만큼.
서량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졌다.
“기실, 내가 직접 갈 필요는 없었어. 하지만 궁금하더구나. 마도천하를 향한 첫걸음에 어떤 부나방이 걸리게 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야 할 복수의 대상이, 진정 이 일에 끼어 있을지가 궁금했어.”
“⋯⋯.”
“만약 정말로 의천맹주가 강서상회의 뒤를 봐주고 있다면 이번 출정이 제법 험악해질 거야. 너희 손에 묻을 피의 양이 두 배, 세 배가 될 수도 있다.”
“⋯⋯.”
“여기까지 와서 긴장하라는 둥 정신 차리라는 둥 헛소리할 필요는 없겠지.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 다오.”
"⋯⋯."
“내 손에 묻을 피보다 너희 손에 묻을 피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이 심란해질지언정, 너희 마음에 피눈물 나게 할 일은 없을 거다.”
적의 완전한 섬멸과 아군의 완전한 생환을 약속하겠다는 말이었다.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강서를 점령하러 가자.”
쿵!
"군림성교! 천마불사!
환희와 존경을 담은 신마경어가 울려 퍼졌다.
조심스레 서량 곁으로 다가온 세 사람은, 산등성이 밑에 도열한 백 명의 고수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 모두가 초절정고수였다. 구파 장문인보다도 강한 무력을 갖추고, 그 거칠다는 철혈성의 전투 부대보다도 살육 경험이 풍부한 마장(魔將)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었다.
여강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전력이었다. 강호삼세를 제외, 저 전력을 보내서 쓸어 버리지 못할 문파는 없을 것이다.
서량이 몸을 돌렸다.
“오셨소?”
남궁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들 모두를 데리고 갈 생각인가?"
“그렇소.”
“⋯⋯전쟁이라도 벌일 참인가?”
“그렇소.”
“뭐, 뭐라고?”
우우우웅.
어둠 속, 청홍의 광채를 빛내는 서량의 마안이 세 사람의 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싸움의 최고는 이기는 것이고, 최선은 피해 없이 이기는 것이오. 한 번 싸우기로 작정한 이상, 어중간하게 처리할 생각은 없소이다.”
“⋯⋯.”
“세 분이야말로 괜찮겠소? 궁주와 소궁주는 그렇다 쳐도, 검왕 선배는 지금이라도 세가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듯한데.”
침중한 눈으로 서량을 보던 남궁언이 한숨을 쉬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네. 설령 말로 내뱉지 않았다 해도, 이미 자네 측 총군사에게 나도 함께하겠다 전했네. 지금 와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환영하오.”
“하지만 알아 두게. 자네들이 최소한의 정도(正道)를 벗어난다면, 나의 검은 부득불 자네들을 향할 수밖에 없다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검왕과 척지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렇다면 되었네.”
이번엔 서량이 여씨 부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량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서량은 고갯짓 한 번으로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한 후, 다시 백팔마장들을 내려다보았다.
여극도가 감탄과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아, 보이느냐?”
“예?”
"보고 좀 배워라, 배워.”
“또 뭘요⋯⋯.”
"일문의 수장이란 무릇 저만한 위엄과 책임감을 품어야 하는 법이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을 추구하는 수장인 줄 알았거늘, 이거야 원 괴물이 따로 없구먼."
“맞아요. 괴물이죠. 그러니까 절 괴물과 비교하진 말아 주세요.”
“이것도 아들이라고.”
"자꾸 그러시면 웁니다.”
“체통 이놈아, 체통.”
무거운 분위기를 농담으로 금세 풀어낸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부자는 부자였다.
그렇게 무거우면서도 부드럽고, 강하면서도 느긋한 분위기 속에서.
서량이 저 멀리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강서성이 있는 쪽이었다.
“⋯⋯숨바꼭질은 취미가 아니야. 이왕이면 직접 나타나라.”
*
*
*
“비문으로?”
“그렇소.”
"돌아가서 담 대협께 전하시오. 본 상회는 어디로도 숨지 않는다고.”
“다시 말하겠소. 수뇌부 전원 비문으로 빠지시오.”
“언제부터 우리 목숨을 걱정해 줬다고 끼어드는 거요?”
“⋯⋯.”
"다시 말하지. 담 대협께 전하시오. 우리는 절대로 숨지 않는다고.”
“우리는 당신들의 목숨을 걱정하는 게 아니오.”
“하면?”
“우리의 돈줄을 걱정하는 거요.”
“허헛! 솔직해서 좋군.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오. 본 상회가 무너질 일은 없을 테니까.”
“내 말뜻을 잘 이해했으면 좋겠소.”
“이해했소.”
“아니, 당신은 이해하지 못했소.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돈과 인맥, 그리고 정보요. 당신들이 죽어도 우린 눈 하나 깜빡하지 않겠지만, 당신들이 살고 상회만 두 쪽이 나면 그땐 우리가 당신들을 다 죽일 거요.”
“⋯⋯.”
“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니 직접 명령을 내릴 처지는 아니오. 그러니 마지막으로 권고하오. 비문으로 빠지시오.”
"알아서 할 테니 이만 돌아가시오.”
“건투를 빌겠소.”
쿵!
"흥! 건방진 놈 같으니! 제 사부를 똑 닮았군.”
“⋯⋯저, 회주님?"
“왜 그러시는가.”
“비문으로 빠지는 것이 어떻습니까? 담 맹주가 그리 말할 정도면 아무래도⋯⋯.”
“저 잘난 줄 아는 맛에 사는 노망난 늙은이에 불과해. 오죽하면 삼두육비의 괴물을 불러 놓고도 그 똥고집을 못 버려 의천맹을 날려 버렸겠나?”
“그, 그렇긴 합니다만.”
“걱정하지 말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진짜 위험해져도 우리의 돈과 목숨은 건질 수 있을 테니까. 설마하니 마교주라도 직접 오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