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움트는 씨앗 (4)
남창의 저잣거리는 활력이 넘친다는 표현으로도 설명이 부족했다.
“싸요! 쌉니다! 광동에서 들여온 최고급품 비단입니다!”
“빙한석(水寒石)으로 재운 신선한 물고기가 마리당 한 냥!”
“탁자! 의자! 침상 골대 등 각종 목제품을 싸게 팝니다! 어서 오세요!”
누가 상인의 도시 아니랄까 봐 거리 전체가 그야말로 소란스러움의 극치였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시끄러워 눈살을 찌푸리게 하진 않는다. 오히려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뭔가 압도되는 느낌을 받게 해 준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의 활기 넘치는 기백이 가득했다.
“굉장하군.”
"그렇습니까?”
새삼 놀란 듯 여극도가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중원인들은 북해 사람들과 달라. 열정이 남다르다고나 할까? 북해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지."
“다른 지역에서도 이만한 활기를 보긴 어렵습니다.”
“그렇구먼. 아주 보기가 좋아.”
“그렇지요.”
“그나저나 주변을 둘러보기만 할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기껏 남창까지 왔는데 맛난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렵니다.”
“허허헛! 자네는 역시 풍류를 아는 사람일세.”
그저 온 김에 술이나 한잔하겠다는 건데 그게 왜 풍류가 넘치는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서량은 내심 의아했지만 이내 가볍게 넘겼다. 하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극도는 자신에게 깊은 호의를 갖고 있었다.
'영약 때문이겠지.'
여극도가 지금처럼 운신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서량이 알게 모르게 보내 준 영약 덕분이었다. 죽을 목숨을 살린 건 아니지만 확실히 큰 빚을 지긴 했다.
“애써 중원까지 왔는데 내게 술 한잔 사지 않겠나?”
“그간 보낸 영약 값이 얼만 줄은 아십니까?”
“사내가 쪼잔하게 그런 걸 들먹이는 게 아냐.”
“알겠습니다. 제가 한잔 사지요.”
“허허, 가세.”
두 사람이 들른 곳은 남창 최고의 주루인 호연루(湖緣樓)였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주루지만 워낙에 호화롭고 비싼 숙식을 제공해서 단숨에 남창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주루였다.
어중간한 시간이라 그런지 다행히 자리는 있었다. 두 사람은 호연루 최상층으로 올라 자리를 잡았다.
“호오? 저 멀리 보이는 게 파양호인가?"
“예.”
“과연! 나는 무슨 바다인 줄 알았네. 누가 저걸 호수라 생각하겠는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다. 서량 역시 말없이 웃으며 파양호의 경치를 즐겼다.
"한데 말일세.”
“말씀하십시오.”
여극도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 굳이 그 옷을 입고 와야 했나?"
서량은 붉은 용포를 입고 있었다.
아무리 황궁이 힘을 잃은 시대라지만 용포를 입는 것은 그 자체로 반역이었다. 하지만 서량은 용포를 걸친 것은 물론 허리춤에 찬 마황보검도 놓고 오지 않았다.
이곳으로 올 때까지 수많은 사람이 서량을 보며 쑥덕댔다. 심지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최상층에 있는 손님들 대부분이 서량을 힐끔거렸다.
“애써서 만든 사람들 정성을 봐서라도 입고 다녀야지요.”
“그렇긴 하다만, 위험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순간도 절 지켜 주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많습니다.”
“호천?”
“그렇습니다.”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여극도가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자네, 사고를 유발하러 나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알 만하네.”
“하하.”
“어쨌든, 기왕 좋은 곳에 왔으니 일이 생길 때까지는 즐기세. 자, 한 잔 받으시게.”
“감사합니다.”
존대는 하고 있지만 술을 받는 행동에는 공손함이 없었다.
여극도는 그런 서량의 모습이 좋았다. 천하에서 가장 악랄한 집단이라는 천마신교의 교주이면서도 소탈한 면이 있었고, 상대를 존중할 줄 알지만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사내다. 서량에게 잔을 받은 여극도가 잔을 들었다.
“자, 한잔할까?”
“좋지요.”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이 시원하게 술을 넘겼다.
여극도가 인상을 찡그렸다.
“좀 밍밍하구먼.”
“그렇습니까? 대단하시군요.”
“북해는 춥다네. 독한 술을 많이 마시지.”
“알 만합니다.”
“린이는 어떤가?”
평이한 대화를 하다가 느닷없이 공격이 쑥 들어온다.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린이 말입니까?”
“그렇다네.”
“린이가 어떻다니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여자로서 어떻냐는 말이야.”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퍽 순진한 모습에 여극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여자로서 말입니까?”
“설마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하진 않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바보 아닙니다. 왜 이 시점에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답변은 나중에 해 주지.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네.”
“별생각 없는데요?”
너무 싱겁게 말해 버리니 오히려 여극도가 말문이 막혔다.
그 모습에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서량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렇군요. 그렇지, 그럴 만도 합니다.”
“음?”
"그⋯⋯ 물론 린이의 도움을 받으려고 함께 중원행을 했습니다만, 궁주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서량의 어조는 유달리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여극도가 남녀 사이에 선을 넘었다고 오해했을까 싶어서였다.
여극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약간의 허탈함도 묻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같이 붙어 있었다고는 하나 온갖 사건으로 얼룩진 중원행이었음을 알고 있네. 게다가 자네나 린이나 무림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야. 젊은 청춘들이 자유로이 만나는 것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네.”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적어도 중원의 정서상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임에도 여극도는 문제 될 게 전혀 없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다만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네. 기실 자네를 보기 전부터 자네에게 호기심이 있었어. 이후 궁에서 자네의 활약상을 들은 후, 더더욱 자네가 마음에 들었다네.”
서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천하에서 가장 악랄한 집단의 수장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그 사람의 능력과 성품일세. 자네 능력이야 천하가 인정했으니 고려 대상이 아니고, 결국 중요한 것은 성품이겠지.”
“그래서, 제 성품이 어떤 것 같습니까?”
“적어도 자기 사람 가슴에 대못을 박을 멍청이는 아닌 것 같네.”
조금 거친 말이었지만 그것이 칭찬임을 안다.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근래 긴장 없는 모습을 보여 주긴 하지만, 내 아들내미는 천하 어떤 후기지수와도 비교를 불허하는 아이일세. 소위 말하는 천재지.”
“알고 있습니다.”
“한데 그 아이가 그러더군. 진짜 천재는 북해가 아닌 중원 남부에 있었다고. 배우고 익힌 무공과는 달리 무척이나 뜨거운 아이일세. 그런 아이가 상대의 대단함을 인정했어. 그것만으로도 내게 자네는 최고의 관심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습니다.”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이 그리 말하는가? 운도 실력이라는 걸 잘 알 텐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확실히 서량은 운이 좋았다.
기실 전생의 기억을 갖고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났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무기다. 그리고 서량은 그 무기를 더욱 강하고 날카롭게 만들기 위해 온갖 사선을 넘나들었다.
운도 좋았고 그만큼의 노력도 있었다. 만일 그 정도의 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자네가 내게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지 모를 걸세.”
“그 정도 사람은 아닙니다.”
“겸손인가?”
“겸손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저는 그저 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달려온 사람일 뿐입니다. 뭐, 지금이야 팔자에도 없는 교주 노릇이나 하고 있지만, 기실 이것도 잘 해낼 생각이 없었다면 진즉에 집어치웠겠지요.”
“본래 교주가 되고 싶지 않았나?”
"예. 그냥 개인적인 복수나 끝내고 세상에 나가 자유롭게 살고 싶었지요.”
여극도가 빙긋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꿈을 품었구먼."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쉽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자유를 손에 넣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더란 말입니다.”
“자네의 또 다른 면을 알게 되는군. 역시나 자네는 흥미로운 사람이야.”
“너무 좋게 보진 마십시오. 저랑 같이 있다가 다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자네만큼은 아니지만 누구 못지않은 후계자도 두었다네. 재능만큼은 나를 넘어서는 아이야.”
“그래도 이왕이면 오래 사시는 게 좋지요.”
"허허, 그렇다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무공도 점점 회복되는 듯하구먼.”
평범한 사적 대화에 어느새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회복하셨습니까?”
"신교에 입성할 때는 오 할 정도. 지금은 몸이 많이 풀렸는지 대략 칠 할 정도 회복한 것 같네.”
"차고도 넘치는군요. 최소한 제 몸 하나 챙기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지. 뭣 하면 자네가 날 지켜 주게나.”
“저는 공사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궁주님을 지켜 드리면, 궁주님은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자네가 멋진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네.”
"아, 제발.”
“껄껄껄.”
두 사람이 서로의 잔을 채워 줌과 동시에 비워 냈다.
그때였다.
스윽.
서량의 등 뒤로 네 명의 사내들이 섰다.
출중한 기량을 자랑하는 도객들이었다. 바짝 날이 선 기도가 인상적이었다.
여극도가 웃으며 잔으로 서량의 뒤를 가리켰다.
“자네 뒤에 사람 있네.”
“압니다.”
"하긴, 호천이 있으니까.”
“걔들 아니더라도 알아요⋯⋯.”
도객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소.”
상당히 고압적인 자세였다. 그러나 도객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혹, 남쪽에서 오셨소?"
서량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남쪽 어디서 오셨소?”
서량은 산뜻하게 대답했다.
“십만대산(十萬大山).”
순간 주루 최상층 전체가 적막으로 물들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창백한 얼굴로 서량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마교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도객이 침을 삼켰다.
"마교, 아니 신교에서 오셨소?"
“그렇다네.”
천마신교 소속의 마인. 거기에 위엄 넘치는 용포에 화려한 보검까지 찬 사내.
“당신은 설마⋯⋯.”
“서량이라 하네.”
가장 끝에 서 있던 도객이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마제(魔帝) 염라(羅)⋯⋯!!"
염라마제.
이천상이 세상에 나오기 전, 서량의 별호는 염라마군이었다. 지옥의 왕 염라와 부처의 수행을 마지막까지 방해했다는 마라, 마군의 별호를 합친 것이다.
하지만 이천상이 죽고, 천마군과 함께 철혈성에 심대한 타격을 준 신교의 후계자를 사람들은 다른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마제, 혹은 염라마제 서량.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천하십대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한 무력을 갖춘 불세출의 괴물.
단순히 십대고수로 꼽히는 수준이 아니라, 의천무제와 수라제에 비해도 뒤지지 않는 무림 최강자 중 한 명.
덜컹.
서량이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을 땐 몰랐지만 일어나니 엄청나게 큰 체격을 자랑한다. 가히 태산과도 같은 몸집이었다.
몸을 돌린 서량이 네 명의 도객들을 내려다보았다.
도객들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강서상회에서 왔나?”
“⋯⋯?!”
"괜히 아까운 목숨들 날리지 말고 상회주에게 안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