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광기의 필요성 (3)
위지노백의 첫인상은 평범했다.
저잣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인상. 허리는 꼿꼿했지만 키는 그리 크지 않았고, 머리와 수염은 적당히 다듬었으며 심지어 입고 있는 옷도 비단이 아니었다.
조금 심하게 말해서 촌로(村老)라고 봐도 무방할 외양이었다.
와중에 그 차림새가 무척 자연스러운 걸로 보아 평소에도 이리 다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평범하진 않군.'
외양은 평범했지만 눈빛만큼은 범상치가 않았다.
깊고 깊은 분노와 두려움을 담고 있으나 그 외에 다른 감정도 엿보였다.
'환희?’
그렇다.
위지노백은 기뻐하고 있었다. 천마와 독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엄청난 부담이지만, 그만큼 바라 마지않던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내공을 익혔군. 하지만 양생술 정도. 보행도 안정되었고 나이답지 않게 탄탄한 몸이야.'
그러나 거기까지다. 딱 건강히 살 정도로만 무공을 익혔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상인이라는 건가.'
서량은 피식 웃으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앉게.”
끼익.
자리에 앉은 위지노백이 허리를 펴고 서량을 바라보았다.
꼿꼿하다 못해 각이 진 듯한 위지노백의 자세와는 달리 서량은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론 술잔을 쥐고 있는데, 가히 한량이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뭐지?'
위지노백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 자가 정말 마교주?’
위지노백에 대한 서량의 첫인상이 평범함 속의 비범함이었다면, 서량에 대한 위지노백의 첫인상은 의문 그 자체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그가 생각한 마교주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가 보았던 전대의 천마도 그러했다. 비록 멀찍이서 본 것이 전부였지만 그 먼 거리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천마가 왜 불패의 상징이 되었는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적의 존재를 보았던 그는, 이토록 소탈한 모습의 천마를 상상할 수 없었다. 막연히 생각해 왔던 상상 속의 존재가 산산조각이 난 기분이랄까.
분노와 긴장, 환희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눈빛에 실망이 깃들었다.
'혹시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닌가?'
위지노백은 서량이 걸친 용포를 흘끗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용포였다.
순간 대역이 아닐까 싶었지만, 마교는 교주의 대역 따위를 만들지 않는다. 신(神)을 향한 신심과 충심이 너무나도 대단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대역에게 저런 옷을 입히지도 않을 것이다.
“천마가 맞으시오?”
결국 솔직하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왜? 이모저모 따져 봐도 천마 같지가 않나?”
물끄러미 서량을 보던 위지노백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상대는 거짓을 싫어하는 건 물론 빈말도 불쾌해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수십 년 동안 사람을 상대해 온 위지노백은 본능적으로 그걸 알 수 있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쓸데없는 희언이나 나불거렸다면 그냥 싹 밀어 버릴 생각이었거늘.”
“⋯⋯!”
“몇 마디 거짓말로 넘길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칭찬해 주겠네.”
울컥!
제아무리 천마라도 서른이 채 안 된 젊은이다. 반면 자신은 산전수전 다 겪은 상계의 초거물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칭찬해 주겠다니?
불쾌함이 치솟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다독였다.
상대는 천마다. 그것도 서른도 되지 않아 천마로 공인받은 마교 역사상 최고의 천재가 아닌가.
상대를 마교의 수장이자 무적의 천마로 봐야지, 나이 어린 젊은이로 봐서는 안 될 일이다. 위지노백은 순식간에 자신의 감정을 수습했다.
“일단⋯⋯.”
“바람직한 자세야.”
“⋯⋯?”
“자네가 강서상회라는 거대 상단의 주인이 된 것이 우연이 아니듯, 내가 천마신교의 주인이 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라네.”
"⋯⋯"
"상대를 제대로 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지. 하물며 나이도 많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러기는 더욱 쉽지 않아.”
서량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적어도 기분 나쁜 술자리가 되진 않을 것 같군.”
“⋯⋯.”
“뭐 해? 한잔해.”
위지노백이 잔을 들었다.
잔을 든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읽히고 있다!’
웃는 낯으로 자신을 보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질 않았다.
자신이 강서상회의 주인이라서가 아니었다. 상대가 누구든 이 사람은 방심하지 않는다. 천마라는 지고한 경지에 올랐음에도 방심을 모르는 이였다.
위지노백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인간 이상의 지능을 지닌 맹수⋯⋯!'
처음 느꼈던 실망감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심박수가 무서운 속도로 올라갔다.
“소흥주야. 옆 동네에서 얻어 왔다고 하는데, 확실히 산지에서 먹는 것보다는 못하더군.”
"⋯⋯."
“입에는 맞나?”
“⋯⋯그렇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투가 바뀌어 버렸다. 말을 뱉은 후에야 인지했지만 위지노백은 자신의 바뀐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턱을 괴고 위지노백을 보던 서량이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
“용케 오기는 왔군. 기실, 나는 자네가 도망칠 줄 알았네.”
위지노백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도망쳤다면 강서성은 불바다가 되었을 테지요.”
"그거야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 자네, 강서성이 좋아서 이곳에 터를 잡은 게 아니잖나?”
순간 위지노백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알고 있었나?'
하기야 마교의 정보력이라면 강서상회를 이룬 수뇌부들 전부가 마교에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깜짝 놀랐던 마음이 빠르게 진정이 되었다.
'그렇다. 이 자리는 내가 원해서 온 자리야. 상대가 누구든 긴장할 필요는 없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위지노백의 호흡과 눈빛이 달라진 것을 보고 그가 마음을 다스렸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말 길게 끌 것 없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호남의 일은⋯⋯.”
"⋯⋯."
“어떻게 보상할 텐가?”
“예?!”
위지노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기에 호남 무림을 뒤흔든 일에 관해 물으려는 줄 알았다. 한데 느닷없이 보상이라니?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강서상회가 호남 분쟁의 뒤에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아. 이미 알고 있는 걸 묻자고 자네를 부른 게 아니야.”
“⋯⋯?!”
“중요한 건 보상이지. 자네 때문에 죽은 사람이 여럿이야. 그 외에 피해를 본 사람까지 생각하면 자네들이 뱉어 내야 할 금액은 천문학적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것이네."
위지노백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서, 설마?”
“음?”
"본 상회에 책임을 물으러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지금 그 책임을 묻고 있잖나?”
물론 보상을 하는 것도 책임이다.
그러나 위지노백은 상대가 강서상회를 아예 지워 버릴 생각으로 온 줄 알았다. 그럴 게 아니라면 왜 천마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강서까지 왔겠는가?
아니, 애초에 마교주가 이런 일로 직접 강서성에 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교주는 공포와 파괴의 상징이다. 금전적 보상을 받아 낼 생각이었다면 휘하의 부하를 보내면 그만이었다.
위지노백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고, 고작 이런 일로 직접 오셨다는 겁니까?"
“고작?”
서량이 얼굴을 찌푸렸다.
“수백 명의 마인들이 자네들의 농간 때문에 피해를 보았네. 그런 일을 두고 고작이라니?"
“⋯⋯!”
“내 분명히 말하는데, 자네는 그들에게 제대로 된 피해 보상을 해 주기 전까지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네. 내가 그리 만들지 않을 거거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서량의 발언은 위지노백에게 있어 무시무시한 부담이 되었다.
죽인다는 협박도 아니고, 죽고 싶어도 죽이지 않겠단다. 마치 타인의 생사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사신(死神)이나 할 법한 발언이 아닌가.
문제는 상대의 무력과 조직력을 생각하면, 진정 사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보상이란 말을 곱씹던 위지노백이 물었다.
“보상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황금 백만 냥.”
“⋯⋯!!”
“그 정도면 얼추 피해를 복구할 수 있지 않겠나? 물론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을 돈으로 되살릴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유족에게 도움이 되는 건 결국 돈밖에 없지.”
위지노백이 입을 쩍 벌렸다.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실, 호남의 사업체들을 뿌리부터 뒤엎고 다시 시작하려면 백만 냥으로도 부족할 수 있다네. 하지만 제때 나서지 않은 본교의 잘못도 없다고 볼 수 없지. 추가 비용이 나오면 그것은 본교에서 충당할 테니, 자네는 자네 나름의 책임을 지게나.”
“⋯⋯다시 묻겠습니다. 백만 냥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화, 황금 백만 냥 말씀입니까?”
“잘 들었군.”
위지노백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말도 안 됩니다! 황금 백만 냥이라면 작은 소국이라도 살 수 있을 금액입니다!”
“그게 자네가 한 짓이야.”
"예?!”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천마신교라는 제국 휘하에서 열심히 공물을 바치던 소국을 망가트렸잖은가?"
“⋯⋯”
"알아보니 자네, 자신의 장기를 아주 잘 써먹었더군. 혼란을 조장하여 내부부터 붕괴시키겠다는 목적이 확실했어. 나였다면 힘으로 굴복시키거나 암살 등의 방법을 떠올렸겠지만 자네는 달랐네. 자네는 그저 돈과 소문만으로 호남을 뒤집었어.”
서량이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획기적이라고 말할 순 없어도 수준급의 책략이라는 평가는 들을 만한 짓이었다네. 만약 우리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자네들은 호남에까지 마수를 뻗쳤겠지."
“그,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그 말,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라고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위지노백은 아차 싶었다.
이미 다 알고 온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입으로 직접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수십 년 동안 상대를 쥐고 흔들던 자신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서량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다급히 말을 이으려던 위지노백은 그 눈빛에 심신이 얼어붙는 충격을 느꼈다.
“아니면 어떻게 보상하고 싶나? 어떻게 책임을 지고 싶냔 말일세."
“⋯⋯."
“자네들, 다 죽고 싶나?"
오싹!
위지노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흔하디흔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그 협박도 마교주가 하니 단순한 협박처럼 들리지 않았다.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이고, 다음 날 동이 트기 전에 상회의 본부를 완전히 날려 버릴 힘을 가진 자다.
목숨은 물론 상회의 존폐까지 걸고 찾아온 길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화를 이어 가니, 치솟던 용기는 어디로 갔는지 갈수록 두려움만 커졌다.
시퍼런 안광으로 위지노백을 노려보던 서량이 일순 미소를 지었다.
혹한의 살기를 뿜던 북방의 괴수에서 봄날의 웃음을 짓는 잘생긴 청년으로, 변화가 실로 자유자재다. 어떤 것이 이 사람의 진짜 겉모습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비로소 위지노백은 깨달았다.
'완전히 달라!’
상대는 전대 천마와 다르다.
전대 천마가 존재 자체로 완성된 무적자였다면, 당대 천마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얼굴을 지닌 무적자였다.
전대 천마가 막을 수 없는 벼락이었다면, 당대 천마는 변덕스러운 먹구름이었다.
전대 천마가 끝 모를 위엄을 지닌 마왕이었다면, 당대 천마는 탐욕스러운 광기를 머금은 패왕이었다.
재앙에 가까운 힘을 지녔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전대와 무엇 하나 닮은 것이 없는 당대 천마를 보며, 위지노백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황금 백만 냥이 아까운가? 목숨도 아깝고?"
“저, 저는 그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일세."
“⋯⋯?!”
“담사영.”
서량의 얼굴이 이젠 무표정하게 변했다.
홍수가 나고 지진이 일어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담사영을 내 앞에 세워 두는 것. 그것이 자네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보상 방법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