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화. 남부의 지배자 (4)
단리후의 눈이 번쩍였다.
“금주에게서?”
“그렇습니다.”
“⋯⋯."
단리후는 생각했다.
‘쉽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마교주가 직접 강서성에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내심 놀랐던 그였다.
하지만 그것은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쪽은 강서상회를 잃음과 동시에 악소문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당분간은 음지(陰地)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여러 사업을 해야 하는데 그게 시작하기도 전에 막혀 버린 것이다. 마교주가 직접 낸 소문이라면 단숨에 여론전을 펼쳐 역공을 가하겠지만, 그 얘기가 나온 게 강서상회 휘하의 비연단이라서 문제였다.
대중은 바보가 아니다. 강서상회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여론을 펼쳐도 이쪽을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마교주를 잡기 위해 발악한다며 여론이 더욱 악화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단리후는 직접 나섰다. 자신이 나서서 마교주를 전투에 휩쓸리게 할 생각이었다. 마교주는 담사영에게 지독한 증오를 품고 있으니, 사람 많은 도시로 유인하더라도 앞뒤 안 가리고 파괴 행위를 벌일 것이다.
모두가 마교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유도하려고 했었다. 그렇게만 되면 정사(正邪) 무림의 힘을 모아 천마신교를 견제하기가 한결 용이해질 테니까.
한데 이게 무슨 말인가? 금주가 도움을 요청했다니?
'그것도 이렇게 빨리?'
잠시 생각에 잠겼던 단리후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군. 내가 너무 상식적으로 접근했군.'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적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당연히 마교주와 어느 정도 대화가 있을 줄 알았다. 금주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제법 비상한 머리를 가졌으니, 마교주를 도발하거나 적의 정보를 캐내는 데에 나쁘지 않은 인선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마교주는 애초에 이쪽과 대화할 생각이 없었어.'
왜 그럴까? 적어도 이쪽이 어느 정도의 힘이 있는지, 어찌 이 시기에 접선하려 했는지 정도는 알아보는 게 좋았을 텐데?
단리후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군. 단순히 증오에 미쳐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는 당대 마교주, 염라마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지금에야 깨달았다.
'애초에 강서상회를 무너트린 후, 지금까지 남창에 남아 있던 것 자체가 우리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던 거였어.'
판단은 그리 내렸지만 이 또한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은 꼬리를 끊고 숨어 버릴 거라 생각하지, 접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서상회를 장악한 김에 절강 무역상들까지 휘어잡을 생각인 줄 알았는데.’
어찌 되었든 자신들은 마교주가 던진 미끼를 문 셈이었다.
그러나 단리후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었다. 이제라도 적의 목적을 알았으니, 지금부터는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군. 놈이 원하는 것은 우리를 통해 사부님께 이르는 것.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단리후가 물었다.
“세력은?”
“예?”
"마교주 정도 되는 자가 강서성까지 홀로 왔을 리는 없다. 최소한 호위는 대동하고 왔을 거야.”
“그, 그것이⋯⋯.”
“뭐지?”
“마교주를 제외한 마인들을 본 적이 없답니다.”
“뭐?”
“오히려 북해빙궁의 궁주와, 그 아들인 소궁주와 함께였다고 합니다. 더하여 남궁세가의 검왕도 있었지만, 그는 느닷없이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단리후가 드물게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뭐야, 그놈?'
무엇 하나 상식대로 움직이는 게 없다. 확실히 수많은 병력을 대동하는 것보다는 빙궁의 궁주와 함께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만, 교주를 따르는 마인들이 그걸 용인했다고?
“아무리 마도 무림의 신으로 군림한다지만 상황이 어찌 될 줄 알고 단신으로⋯⋯.”
그때였다.
“소룡(小龍)님! 금맥(金脈)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떤?”
“마교의 백팔마장들이 금맥을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천하의 단리후도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팔마장? 설마 마교 최강의 무사들이라는 그 백팔마장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숫자를 보건대 거의 모든 마장이 나선 것 같다고 합니다!”
역시 혼자였을 리가 없지.
하지만 그 사실이 충격을 없애 주진 못했다. 강서성에 드리워진 정보원들의 눈은 날카롭다. 언제, 어떻게 그들의 눈을 숨기고 거기까지 도달했을까?
'⋯⋯비밀 분타!’
단리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주는? 현재 금주는 어디에 있지?"
"황색통(黃色福)이 터진 후에 아직 연락이 없다고 합니다! 금맥의 말로는 혈금신기(血金神氣)까지 개방했다고 합니다!"
“혈금신기를?”
오늘은 여러모로 충격적인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되는 날이었다. 이러다 잘하면 화도 날 것 같다.
'혈금신기를 개방하다니.'
혈금신기는 곧 금맥의 모든 것이다. 칠요집전술을 완성시키기 전까지는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봉인해 둬야 할 최후의 힘이기도 했다.
'혈금신기를 개방했다면 지금쯤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지금 금주의 육신으로는 미쳐 날뛰는 혈금신기를 제어하지 못해. 운이 나쁘면 금맥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겠군.'
그런 악수를 선택할 만큼 멍청한 자가 아니었다. 이 인선 배치에 실수는 없었다.
이건 이쪽의 실수를 탓할 게 아니라 상대의 힘을 상향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제일 산호(第一山環)에서 끊어라. 그리고 금주의 행방을 알아보도록. 교룡 구 조(鞍龍九組)가 몰살을 당할지언정 금주의 혈금신기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때였다.
“소룡님! 급보입니다!”
“또 무엇이냐?”
“백팔마장이 제일 산호를 뚫고 있습니다!”
“⋯⋯!!”
엄청난 속도다.
신교의 백팔마장이 그리도 살벌하다더니만 이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어섰다. 교룡조 삼 개 조로도 불가능한 돌파 속도를 고작 백 명 언저리의 마인들이 내고 있다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군.”
치리리링!!
단리후가 한 쌍의 륜을 등에 걸었다.
“직접 처리하는 수밖에.”
*
*
*
“밀어붙여라!!”
콰아앙!
백 명이나 되는 초절정고수들이 적진을 돌파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개개인만 해도 충분히 괴물 소리를 듣고도 남을 이들이 기가 막히게 손발을 맞춰 가며 적도들을 격파한다. 적들 중 절반 이상이 금령귀였지만 마장들은 금령귀의 어마어마한 내구력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콰직! 콰직! 퍼어억!
팔다리를 꺾어 놓고 멱살을 잡아 올린 후, 안면에 막강한 권력(拳力)을 세 방이나 때려 넣었다. 그러자 안면이 으깨진 금령귀가 축 늘어졌다.
그들의 전투는 그런 식이었다. 서량만큼 압도적인 위용을 발하진 못하지만 시원시원하기로는 마장 쪽이 더하다.
절대방어로 이름 높은 금령귀의 몸을 부서질 때까지 후려치고, 회피로 이름 높은 금익조(金翼鳥)의 다리를 어떻게든 잡아채 부러트렸다. 화포를 끌고 와도 반나절은 버틸 수 있다는 제일 산호의 방어력도 이 해일 같은 전진 앞에는 별무소용이었다.
그들은 그저 전진만 아는 부대 같았다.
작전을 짜거나 기지를 발휘해 적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저 적을 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니, 그 명령을 무식할 정도로 충실히 따를 뿐이었다.
“이, 이런!”
교룡 구 조의 조장 영휘(榮徽)는 백팔마장의 기세에 치를 떨었다.
비록 일개 무력 부대의 조장직을 맡고 있지만, 그의 무공은 대문파의 수장에 비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교룡조가 담사영 휘하 최강의 무력 조직이라 불리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백팔마장은 뭔가가 달랐다.
무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돌파에서 느껴지는 맹목적인 살기가 모두를 두렵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신앙이다. 그들은 신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광전사(狂戰士)였다. 욕설이나 인질 따위가 통할 놈들이 아닌 것이다.
“물러나지 마라! 모두 그 자리에서 저놈들을⋯⋯!!”
그때였다.
콰앙!
제일 산호의 외곽이 무시무시한 발경에 산산이 터져 나갔다.
영휘도, 금맥의 무사들도, 무차별로 전진하던 마장들도 주춤할 만큼 강력한 파괴력이었다.
“금맥의 무사들을 물려라.”
어느새 나타난 한 청년은 마치 천상에서 하강한 신장(神將) 같았다.
영휘가 외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파라라락!
남은 무사들이 신속하게 산호 뒤로 물러났다.
청년, 단리후가 사방을 훑었다.
'엉망진창이군.’
제일 산호는 단순 내구력에서는 제이 산호(第二山環)보다도 튼튼했다. 그런 산호가 거의 반파가 되어 있었다. 적들의 고강한 전투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과연 백팔마장. 단순히 개개인의 무공이 강한 게 아니라 합심(合心)이라는 게 되는 놈들이야.'
막강한 무력이었다. 그냥 보기엔 잔수 따위 안 쓰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지만, 마공으로 서로의 공백을 절묘하게 메우는 이심전심의 마공 전술을 구사한다.
철무정의 눈이 빛났다.
“그대는?”
가만히 철무정을 내려다보던 단리후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희 교주는 어디에 있느냐?”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오만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모습이 어울린다. 마치 지체 높은 집안의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기라도 한 양 자연스레 하대를 하는데, 그 모습이 몹시도 잘 어울렸다.
치이이이익!
마장들의 몸에서 지독한 마기가 뿜어졌다.
단리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아직도 저런 마기를? 역시 굉장하군.'
전투가 시작된 지점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싸웠을 것이다. 금령귀나 금익조를 상대하느라 내공 소모도 심했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제 막 전투에 참전한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력을 발산해 낸다.
'지구력의 문제가 아니야. 지쳐 쓰러져 죽을 지경이 되어서도 똑같은 기세를 발산할 놈들이다.'
이제야 알겠다. 왜 백팔마장을 신교 최강의 장수들이라 부르는지.
그들이 왜 구대마존의 후임으로 내정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적어도 저 정도 정신력과 실력은 뒷받침되어야 극마에 오를 자격이 있을 테니까.
철무정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장들의 마기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다시 묻겠다. 그대가 우두머리인가?"
참으로 고전적인 말투가 아닌가.
단리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렇군.”
철무정의 눈빛이 일순 돌변했다.
“죽어 줘야겠다.”
짧은 말이기에 더더욱 상대를 섬뜩하게 만든다.
단리후가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의 실력으로는 절대 날 죽일 수 없다.”
콰르르릉!
철무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본신의 마공을 재차 개방할 뿐이었다.
죽일 상대를 정했으면 그저 죽일 뿐이다. 전투에 있어서는 실로 이름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는 그였다.
단리후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기야, 그간 입은 손해를 생각하면 백팔마장 정도는 묻어 줘야 이문이 남겠군.”
그때, 한 줄기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간 들인 노력을 생각하면 너희 정도로는 한참 모자라지.”
순간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철무정도, 단리후도 마찬가지였다.
'기척이?!'
일말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일 산호가 보이는 곳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향했다.
파아앙!
비천(飛天)의 마신(魔神)이다.
한순간 하늘 높이 날아오른 절대자가 서서히 하강했다. 극에 이른 허공답보의 한 수였다.
철무정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군림성교! 천마불사!”
남은 마장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스르륵.
마침내 서량이 땅에 내려섰다.
한 사람의 목을 움켜쥐고 지상으로 내려선 그의 모습은 하늘의 신장처럼 보였던 단리후와 철저하게 대비되어 보였다.
서량이 흥미로운 눈으로 단리후를 올려다보았다.
“호오? 이건 또 오랜만이로군.”
오랜만?
단리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를 아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리 보니 또 새롭구나. 하긴 얼굴만 알았지, 대화 한번 나눠 본 적이 없으니까.”
“⋯⋯뭐?”
“일단 내려오는 게 어떻겠나. 되먹지 못한 늙은이의 제자를 올려보려니 벌써부터 뒷목이 뻐근해.”
“네놈, 마교주가 아닌가?”
콰아아앙!
단리후의 신형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가 섰던 자리는 화포에 맞은 것처럼 박살 나 있었다.
후우우웅.
단리후가 서서히 하강했다. 서량이 보여 주었던 허공답보와 비슷해 보이는 수법이었다.
단리후가 내려선 곳은 서량의 맞은편 오 장 밖이었다.
서량이 맑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단리후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도 여유롭고 맑아 보이는 웃음이라 오히려 이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가 그리 좋은 거지?”
“좋지.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인상 좋아 보이던 미소가 점차 마귀의 그것처럼 길게 찢어졌다.
“미쳐 버린 계집 이후로, 가장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