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우리는 적이다 (2)
츠츠츠츠.
뇌옥에 갇힌 단리후는 한나절이 넘는 운공으로 자신의 상태를 안정시켰다.
'나쁘지 않군.’
서량의 마기는 선천의 영역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그 하나의 관문을 넘어선다면, 그 역시 신화(神化)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관문을 넘어서지 못한 지금도 천하제일을 논할 만했다.
'절대마기(絶代魔氣)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아.'
마기는 곧 역천의 산물이다. 역천의 기운은 순리를 거부하고 영생(永生)과 불사(不死)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중원 유수의 내공심법과는 궤를 달리한다. 아니, 새외의 무공과도 궤를 달리한다.
침투하고 고이는 기.
하물며 서량 정도의 마기라면 개방하는 것만으로 여느 고수들의 정신을 황폐화시킬 수 있다.
단리후 역시 서량의 마기에 침습을 당했다. 물론 그는 평범한 고수가 아니기에 마기로 인한 정신 이상이나 육체의 붕괴를 겪진 않았지만, 꽤 오랜 시간 요양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에야 비로소 삼단전(三丹田)이 안정되었다.
본래라면 사흘 밤낮을 운공에 매달려야 했을 것이나, 귀옥(鬼玉)의 남은 힘과 극한의 집중력으로 한나절 만에 체내로 파고든 마기를 모두 씻어 낼 수 있었다.
단리후가 눈을 떴다.
태양처럼 진한 안광은 어디로 갔는지, 어둡고 칙칙해진 눈빛은 뇌옥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서량.’
그는 좌측 어깨를 매만졌다.
'엄청난 강자였다. 당장 내가 월주의 힘을 받는다 한들 그를 상대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상대의 살기만으로 사지를 놀리기가 어려웠고, 내공을 풀어내는 데에도 제약을 느꼈다.
상단전(上丹田)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연마한 것이 분명했다. 단리후 역시 법술을 익히며 화경에 달한 고수에 비할 만한 상단전을 구축했지만 서량의 그것은 차원이 달랐다.
'서른도 안 된 나이라고 했지만, 마치 수십 년 동안 연마해 온 초고수의 그것과 같았다.'
마치 담사영과 송금백을 보는 듯했다.
'그 젊은 나이에 마교의 수장이 된 것이 이상하지 않군.'
단리후는 문득 불쑥 치고 올라오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내가 지금 그를 질투하는 건가?'
그렇다.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그는 서량을 질투하고 있었다.
세상에 스스로를 드러낸 적은 없지만, 그는 자신이 천하제일의 기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변의 평가도 그러했고, 그간의 경험으로 봤을 때도 분명 그러했다.
하지만 서량을 만나고 그 자신이 깨졌다.
상대는 나이와 재능을 초월하여 이미 반선(半仙)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자였다. 자신이 십 년, 이십 년을 노력한다 한들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군.’
꾸욱.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잘려 나간 왼팔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듯했다. 귀옥의 환원(還元)으로 모든 상처가 치유됐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환상통(幻想通)을 만들어 냈다.
마치 화인(火印)처럼.
단리후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처음이었다. 이 경지에 오르고 난 후, 쓸데없는 감정 때문에 시간을 소모한 적은.
‘지금 내가 고민해야 할 일은 당장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다.'
그는 이미 이곳을 빠져나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는 서량이 원하는 것 하나를 제외하곤, 그에 대해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사람에게 끌려다니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고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를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대계(大計)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목숨이 문제가 된다.
부동심을 얻었음에도 단리후는 자신의 목숨이 소중했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결코 쉬이 버릴 수 없는 유일한 욕구라 할 수 있었다.
'내 목숨도 목숨이지만, 여기서 내가 죽어 버리면 일주의 힘을 전해 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태양신기를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채우기 위해서는 일 갑자의 세월이 필요해. 대계를 위해서라도 나는 무조건 살아야만 한다.'
결국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상황에 부닥쳐졌다고 볼 수 있었다.
'죄는 나중에 받는다. 지금은 탈출만 생각하자.'
단리후는 자신의 하나 남은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목에는 어둡지만 기이한 광택을 내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비록 한쪽 손목에만 채워져 있으나, 그 자체로 훌륭한 족쇄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내공 운영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해저(海底)의 한철(寒鐵)로 만든 기물이다. 내공을 제압하는 데에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군.'
신교에서 죄인에게 채우는 금해철갑이었다.
하지만 단리후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수갑을 차고도 운공이 가능했다는 것만으로도 족쇄로서의 의미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비는?’
우우웅.
단리후의 동공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태양신안(太陽神眼)의 발동이었다. 내공이 상단전까지 치고 올라와 자연스레 빛을 뿜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술법이었다.
태양 아래 존재하는 모든 외물을 살필 수 있는 신안(神眼).
'삼백? 많기도 하군.'
이 분타 내에 존재하는 마인들은 백 명 정도였다.
하지만 그 외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마인들이 이백 명가량 더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은신술과 마공은 실로 대단해서,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진기의 경계망을 둘러치고 있었다.
단리후는 혀를 내둘렀다.
‘엄청난 고수들이다. 개개인의 능력도 뛰어나지만, 합심(合心)으로 마공력(魔功力)을 교환하고 있어. 백팔마장보다도 훨씬 뛰어나다.'
아마도 이들은 교주를 호위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 정도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저들의 눈을 속이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가능은 하다. 몸이 정상이라면.
'체내의 마기를 씻어 내고 삼단전 모두를 공고히 갖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상은 아니야.'
본래 능력의 칠 할 정도 회복되었다고 할까.
고심하던 단리후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목숨을 걸 가치는 충분해.'
확신은 없지만 이 수법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단리후는 곧장 준비에 착수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일단은 여유롭게 상황을 두고 보는 담사영과는 달리, 그는 확실한 방법이 생긴다면 그 즉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부분은 스승보다 서량과 닮았다. 물론 단리후가 그것을 알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츠츠츠츠.
그의 몸에서 태양신기가 일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가 보여 주었던 태양신기와는 달랐다. 마치 일식(日傘) 때의 태양처럼 어둡고도 어두웠다. 진기의 성질 자체가 바뀐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바로 일주법술(日主法術)의 근원이 되는 원영암흑기(圓影暗黑氣)였다. 태양신기의 모든 구결을 역술(逆述)로 외워 힘의 본질을 바꿔 버리는 기술이었다.
‘옴(唵).'
파삭!
주문의 시작을 외자마자 철갑이 저절로 바스러졌다. 순간적으로 뿜어진 원영암흑기의 힘이 금해철갑의 내공을 억제하는 힘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다.
'만물의 어버이이시자 지상에 존엄함을 뿌리신 대천대비용왕(大天大悲龍王)께서 거하시는 일궁(日宮)에는 그림자 질 일 없도다. 하나 만물의 어버이이시자 지상에 존엄함을 뿌리신 대천대비용왕께서 만인(萬人)의 우매함에 실망하시니 이는 곧 그들의 성찰을 위한 땔감이 부족함이라, 사바세계의 보물을 위해 기꺼이 한 몸 던지시어 암천대분악룡(暗天大憤惡龍)으로 화하셨더라.'
천룡궁은 이단(異端)의 종파였다. 그리고 그들의 뿌리는 저 천축국(天竺國)에서 나고 자란 불교의 조종 석가(釋迦)였다.
그러나 그들은 부처도, 보살도 인정하지 않는다. 깨달음으로써 극락정토에 이를 수 있다고는 하나 그 포문을 연 자를 부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용신(龍神), 즉 용왕을 신봉한다.
누군가를 신봉한다는 것 자체가 불교의 이념과는 거리가 멀다.
불교는 석가불(釋迦佛)을 먼저 깨달음에 이른 선배라고 생각하지, 신(神)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룡궁의 공부는 위험했다.
사상이 위험했고, 무공과 법술이 기이하고 사특했다.
'모든 것을 태우고, 모든 것을 얼리고, 모든 것을 가리고, 모든 것을 흔드는 그분의 눈에서 태양과도 같은 눈물이 흐르리라. 이길 수 없는 고통과 외면할 수 없는 불길 속에서 만인은 비로소 미래신룡(未來神龍)의 자비를 깨달아 마침내 빛을 향해 나아가리라.'
번쩍!
단리후의 눈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의 등 뒤로 새까만 비늘로 뒤덮인 악룡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리니, 그분의 자비와 희생 앞에 사바세계 속 극락의 꽃이 피더라.'
뭉클뭉클.
단리후의 몸에서 시커먼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안개는 단숨에 철창 안을 꽉 채우고, 이내 뇌옥 전체로 퍼져 나갔다.
뇌옥의 경계병들은 안개를 접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어둠의 술력(術力)이 그들의 마기를 타고 올라가 상단전의 빛을 꺼 버렸기 때문이다.
위험천만한 술법이었다.
단순히 정신을 잃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단전을 잠재워 버렸다. 제대로 된 술사(術士)나 명의(名醫)의 치료를 받지 않는 이상, 그들은 평생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뭉클뭉클.
어둠의 안개가 뇌옥을 넘어 바깥세상까지 침범했다.
치익!
밝은 태양 아래 나타난 검은 안개가 순식간에 투명해졌다.
하지만 투명해졌다 뿐이지 힘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무색투명한 안개는 순식간에 분타 전체를 휘어 감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곳은 침묵의 대지로 화했다.
뇌옥의 경비병들은 정신을 잃었지만 태양 빛을 받는 마인들은 멀쩡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선 점점 뇌옥이란 '존재'가 지워지고 있었다. 바로 앞에 두고도 인지를 못 하게 되는 것이다.
주르르륵.
단리후의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정도 규모의 일주법술을 시행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몸이 정상이었다면 모르되, 지금은 진언(眞言)을 외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끝없이 원영암흑기를 부채질했다. 정신을 집중했고 또 집중했다.
그나마 평소보다 나은 게 있다면 그의 집중력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는 것이었다. 부동심이 흔들려서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지만, 치열함으로 인해 법술에 깊이감이 생긴 것이다.
'나아가라. 퍼트려라. 침식하라. 잊게 하라.'
번쩍!
단리후의 눈이 다시 한번 빛을 뿜었다.
그의 눈이, 감각이 분타 전체를 보았다.
'⋯⋯!’
절반의 확률에 도박을 걸었는데, 용케 그 도박이 성공했다. 그는 뇌옥 바깥의 마인들, 특히 교주를 호위하는 이백 마인들까지도 더 이상 이곳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교주는?’
없다. 어디로 갔는지 교주의 기척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천마는 은신술을 펼치지도 않을뿐더러, 하려고 해도 호위 마인들보다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 단리후는 이 자리에 서량이 없다는 사실까지 깨달았다.
철컹! 훅!
철문이 열리고, 단리후가 사라졌다.
*
*
*
"한마디 해도 되겠나?"
“하십시오.”
"자네, 정말 대단한 사람일세."
“감사합니다.”
“대체 자네는 담사영에 대해 모르는 게 뭔가? 담사영을 통해 그 제자의 행동까지 유추할 수 있다니, 내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네.”
“범에 대해 잘 아는 것은 같은 범이 아니라 사슴입니다. 범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았으니 그에 대해 모를 수가 없지요.”
“허!”
“이번에는 어쩌실 겁니까?"
“어떨 것 같나?”
"엄살 피우셔도 저는 제 갈 길 갈 겁니다.”
“걱정하지 말게.”
“그럼 가시지요.”
파아아악!
"근질근질했나 보군. 어? 근데 너는 어떻게 할래?”
"⋯⋯."
“그래, 열심히 노력해라.”
“이 나이에 벌써 가장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안 죽어, 이놈아.”
“잘 다녀오십시오.”
“오냐.”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