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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450화 (449/774)

450화. 우리는 적이다 (4)

수라제 송금백.

서량이 소교주 시절 만났던 가장 인상 깊은 고수 중 하나가 그였다.

그가 중원 최고수 중 하나로 손꼽혔기 때문이 아니었다. 비록 적이었지만 송금백은 나름대로 화통한 면모가 있는 사내였다. 그처럼 드높은 경지를 구축한, 나아가 천하일통을 노리고 있는 사내치고 제법소박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런 그가 저곳에 있었다.

옛날처럼, 아니 옛날보다 한층 더 인상적인 기도를 자랑하며 당당하게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투우웅!

내공으로 하강 속도를 늦추다가, 한 차례 도약으로 순식간에 야산 꼭대기로 내려선 서량이 여극도를 돌아보았다.

여극도는 어느새 백여 장 바깥에서 멈춰 있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없는 고갯짓이었지만 여극도는 서량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기실 가고 싶어도 섣불리 갈 수가 없었다.

야산 주변을 쓸어 보던 여극도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굉장하군.'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수많은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호천마황단과는 달랐다. 호천마황단은 사람의 감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릴 정도로 은신하고 있었지만, 저들은 그저 몸만 숨겼을 뿐 본인들의 기적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철왕(鐵王)인가.'

철왕팔세.

철혈성을 대표하는 무력 집단이었다.

여극도는 알지 못했지만, 과거 서량이 천하진이었을 적 추왕혈사(追王血事)를 일으키며 죽였던 고수들도 철왕팔세에 속해 있었다.

비록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당시 서량의 무공은 극한의 은밀함과 날카로움을 갖추고 있었다. 당당한 정면 승부였다면 제아무리 서량이라도 철왕팔세를 뚫지는 못했을 것이다.

'안 좋아.’

여극도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었다.

'드러나지 않은 비밀 집단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철혈성을 대표하는 집단을 끌고 왔다는 것은⋯⋯.’

만약 저들과 싸움이 벌어질 경우,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진다. 한 조직을 대표하는 부대와 싸운다는 것은 그런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다.

'즉, 철혈성주가 작정을 했다는 것인데.'

기실 여극도는 철혈성주를 처음 보았다.

과연 대단한 실력자였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승산이 없을 것이 분명했고, 본래의 몸 상태라 한들 승부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과연 중원을 대표하는 고수답군.'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왜 이곳에 철혈성주가⋯⋯? 절강성은 분명 철혈성의 권역이기는 하지만 담사영을 찾으러 온 길이거늘 어찌?'

순간 여극도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저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인가?'

그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빙백신공을 개방하여 기감을 증폭시켰지만 당장 기감에 걸리는 화경의 고수가 없었다. 그나마 단리후가 북쪽으로 방향을 튼 것만 알았을 뿐이었다.

'숨었다?!'

아니면 도주인가?

'만일 진정 저 두 사람이 손을 잡았다면⋯⋯.’

여극도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서량에게는 보여 준 적 없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조만간 중원에 한바탕 태풍이 불어닥치겠군.'

“⋯⋯.”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각자가 서 있는 위치를 생각하면 죽일 기세로 노려보아도 이상하지 않을진대, 뜻밖에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떠한 살기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저, 놀라울 따름이로군.”

송금백이 나직이 탄식했다.

"희대의 천재라는 소리는 익히 들었네. 실제 작년에 자네를 보았을 때, 나는 자네 정도의 인재가 천마신교에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금치 못하기도 했었지.”

"⋯⋯."

“하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정보원들을 통해 자네가 끝없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듣긴 했지만, 정녕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소문으로나 대면으로나, 자네는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 하나만큼은 일품이로군.”

“긴말 않겠소.”

서량의 말은 짧았다.

“담사영이 숨은 곳을 대시오.”

송금백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내가 담 맹주와 손을 잡은 것도 아닌데 어찌 그것을 알겠나.”

“농담이오? 아니면 진담이오?"

“⋯⋯."

“내, 하릴없이 누워서 시간 때우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오. 쓸데없는 말로 괜한 시간 끄는 짓 따위 하지 맙시다."

송금백의 얼굴이 점차 무표정하게 변했다.

"알고 있었나?”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볼 게 있나 싶소만.”

송금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는 내 권역에 그리 위험천만한 사람을 그냥 놔둘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다시 묻겠소. 담사영, 어디 있소?"

"내가 그걸 말해 줘야 하나?”

“⋯⋯.”

“미안하지만 말해 줄 수 없네.”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송금백의 눈이 번쩍였다.

츠츠츠츠.

그의 몸에서 어두운 진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시선을 돌리는 상대의 오만함에 심기가 상한 것이다.

서량은 상대의 기분을 배려할 생각이 없었다.

"벌써 도망쳤군. 단리후라고 했던가? 그놈의 술법이 참으로 신통방통하더니만, 만리전음(萬里傳音)이라도 익힌 건가?”

“도망이라고 생각하지 말게. 적어도 내가 아는 담 맹주는 자네에게서 도망칠 만큼 약자가 아닐세."

“군신의 계약이라도 맺었소? 사파 최강자란 사람이 소인배를 두둔하는군.”

상대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언사였다.

송금백의 몸에 이는 기세가 조금 더 강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결코 살기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정점에 선 자의 격(格)이었다. 진정 죽일 상대가 아니라면 함부로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한 번 살기를 드러내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어떻게든 죽인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천하 정세를 뒤흔드는 자였다. 그런 면에서 서량은 아직 송금백에 비해 부족할는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자네는 담사영을 만날 수 없네.”

"⋯⋯."

“단리후 때문이 아닐세. 담 맹주의 대제자는 분명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요, 법술에도 능한 기린아지만 본인의 상황을 전달하는 능력까지는 없다네.”

“⋯⋯.”

“즉, 자네가 단리후와 마주하기 전에 담 맹주는 이미 떠났다는 뜻일세.”

서량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그는 송금백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단숨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상대는 필요에 따라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을 늘어놓을 수 있는 자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자리에서 거짓을 늘어놓을 만큼 작은 그릇은 아니었다.

‘담 늙은이. 나를 읽었나?'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그저 정보로만 들었을 뿐, 직접 만나서 대화 한마디 나눈 적이 없었다.

'나를 읽은 게 아니라 흘러가는 상황을 읽었군.'

바로 그것이었다.

서량은 담사영에 관련된 일이라면 마치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훤히 읽을 수 있었다. 소교주가 되어 정파 무림을 뒤집어 놓을 때도,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담사영은 서량을 모른다. 심지어 만난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생존 본능은 서량 못지않게 뛰어났다.

서량을 읽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올 위험을 읽은 것이다. 죽지는 않을지라도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꾸우욱.

서량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빌어먹을.

담사영이 언제 떠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짐작건대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코앞까지 와서 담사영을 놓친 것이다.

츠츠츠츠.

서량의 몸에서 진한 마기가 새어 나왔다. 송금백의 어두운 진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막강한 농도를 자랑하는 기파였다.

'이렇게 놓친 건가.’

빠르기도 빨랐다. 천마범정대전이 끝나고 교주의 위에 올라 신교를 재정비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았으니, 지나치게 빨리 도달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서량에게 시간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그저 원했기에 움직였고,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몇 개월이니 몇 년이니,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담사영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분한 모양이로구먼.”

"⋯⋯."

“너무 분해하지 말게. 설령 담 맹주가 여기 있었더라도 자네를 상대로 우위를 점했으면 점했지, 결코 지지는 않았을 걸세.”

틀렸다. 송금백은 서량의 기량을 꿰뚫어 보고 있었지만, 그가 전투에서 얼마나 지독해지는지는 알지 못했다.

만일 이곳에 담사영이 있었고, 그런 그와 서량이 마주쳤다면?

아마도 서량은 자신의 모든 것을 퍼부어 그를 죽였을 것이다. 실력이 부족하다면 환경이라도 끌어다 쓸 것이고, 실전의 변수를 유발해도 이기지 못할 거라면 원정(原精)의 힘까지 끌어다가 공격할 것이다.

어떤 수를 써서든, 설령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잡았을 것이다. 잡아서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였을 것이다. 그조차도 모자라 찢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모아 불태워, 존재 자체를 지워 버렸을 것이다.

그것이 담사영을 향한 서량의 한이요, 분노였다.

“하지만 자네는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 결과 이전에 담 맹주를 만나고자 달려온 자리에 내가 있었으니, 자네로선 참으로⋯⋯.”

"본교인가?”

“뭐?”

서량이 고개를 들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송금백은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서량의 두 눈이 그간 본 적 없는 흉포함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사자라고 생각하지만 하늘에 닿은 절대무적자 앞에서 덩치 큰 고양이로 전락하고야 만 네놈은 섣불리 세상에 발을 딛으려 하지 않았어. 그것은 담사영 역시 마찬가지."

“언사가 실로 불쾌하군.”

“어차피 본교를 쓸어 버리려고 작정한 너희가 아니더냐. 그런 너희에게 예를 갖춰야 할 이유 따위 없다.”

송금백의 얼굴에 시큰둥한 기색이 어렸다.

그러나 그는 내심 섬뜩함을 느꼈다.

“우리가 천마신교를? 자신감이 과하군. 착각하지 말게나. 굳이 자네들이 아니더라도 할 일은 많다네.”

“자신감은 너희가 과했지. 고작 고양이 새끼 두 마리가 힘을 합친다. 하여 언감생심 본교를 넘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자네의 성장세는 무림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빠르다네. 어쩌면 역사상 최고를 논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 두게. 입을 가벼이 놀리다가 스러진 천재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네놈이 준비해 주었군.”

“뭐?”

서량의 눈빛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눈은 송금백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담사영을 놓쳤다는 극심한 실망과 분노, 그로 인해 미친 듯이 요동치는 살기를 다스리기 위해 다른 곳으로 머리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 전체에 번개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감정을 억누르고자 이성을 끌어와 현재 상황, 상대의 힘과 성향 등을 무서운 속도로 분석해 내기 시작했다.

“천룡궁에는 천룡칠주라 불리는 대사제들이 있다. 그들은 각자가 맡은 계파의 번영을 위해 신기(神氣)를 완성하려 하고 있어.”

“⋯⋯.”

“그 환경을 네놈이 조성해 주었구나. 아니, 그건 아니겠군. 그만큼 오래된 결속이 아니야. 그래, 그랬겠어. 신기를 만들 장소는 계파별로 찾았지만, 그들의 힘을 증폭시키거나 먹잇감을 전해 주는 짓은 네가 했겠어. 그렇지?”

“네 녀석⋯⋯.”

“그로 인해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상대의 힘을 키워 줘 봤자 목표를 이룬 후에는 명백한 적이 되는데? 아! 그렇군. 네놈도 천룡의 힘 중 일부 혹은 전부를 공유하기로 했나? 네놈의 바뀐 기도가 기분 나쁜 천룡의 사기(邪氣)를 연상시키는데.”

송금백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제 할 말만 해 대는데, 그 내용이 실로 심상치가 않았다. 상대는 자신과 담사영이 꾸미는 짓을 용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니, 꿰뚫어 보는 중이었다.

위이잉! 위이이이잉!

서량의 몸에서 이는 마기가 점차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살기를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네놈도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위인이었군. 차라리 잘 됐어. 죽이는 데에 부담이 없어졌다. 위엄 넘치는 사자로 남았다면 마지막 예우라도 해 줘야 하나 싶었는데, 고양이만도 못한 쥐새끼가 됐으니 밟아 죽이면 그만이겠어.”

"네 이놈! 언사를 바로 하지 못하겠는가!"

“닥치지 못해!”

파지지지직!

기어이 서량의 몸에서 군림마황기까지 치솟았다. 좌청우홍의 절대마안이 눈을 뜨고, 양손에선 저절로 뇌화(雷火)가 일어나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문답무용이랄까. 어느새 송금백의 손에도 거검 태천이 들렸다.

서량이 하얗게 웃었다.

분노와 실망, 살의와 좌절로 물든 그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처절하고 광기로 가득 차 보였다.

“네놈 역시 도망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이 빌어먹을 쥐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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