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사자의 발톱 (2)
콰드득!
깍지를 낀 손가락이 하얗게 변했다.
울컥 울컥!
손등에 불거진 핏줄이 꿈틀거렸다.
서량의 손은 컸다. 극마에 오르고, 구유마공의 삼 식을 개방하고, 이후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은 그의 신체는 이미 완벽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엄청나게 큰 키와 떡 벌어진 체형, 철저하게 단련되어 위압감보다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그의 몸은 그 자체로 흉기나 다를 바 없었다.
반면 송금백은 달랐다.
송금백의 체형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절대의 무공을 연성한 자답지 않게 평범하다고 할까. 겉으로 봐선 그저 위엄 넘치는 위정자라는 느낌이 들 뿐, 무공을 한계까지 단련한 사람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서량은 느낄 수 있었다.
맞잡은 손을 통해 느껴지는 강력한 힘. 내공을 쓰지 않더라도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고 서까래를 으깨 버릴 수 있을 만큼 고도로 단련된 육체.
'확실히 다르군.'
상대의 성격이나 품성을 떠나, 이 힘만큼은 진짜였다. 단순히 내공이나 깨달음만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단련까지 완성도 있게 가꾸어 낸 진짜 고수였다.
자신이 지금껏 상대해 온 어떠한 고수들과도 달랐다. 그들 중 대다수가 전반적인 수준이 모자라거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단련한 고수들이었다. 혹은 편법을 써서 경지에 이른 자였다.
송금백. 별호 수라제.
수라도(修羅道) 같았던 흑도 무림을 평정한 제왕이라 하여 붙은 별호가 아깝지 않았다. 적어도 흑도 사파에서만큼은 모든 면에서 정점을 찍은 무적자인 것이다.
“멋지게 단련했군.”
불쑥 한마디를 뱉은 송금백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도 승패를 논하기 어려운 고수와의 전투였다. 이런 고수와 실전을 벌여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인가. 그럼에도 절대 빈틈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어려.”
송금백의 양손에 진기가 폭발했다.
투우우웅!
단단하게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이 풀리고, 서량의 몸이 주춤거렸다.
동시에 놀라운 장면이 이어졌다.
후욱! 터어억!
송금백의 양손이 서량의 멱살을 잡았다.
초고수들 간의 접전에서 상대의 의복을 잡는 행위는 존재할 수 없다. 내공으로 의복의 질까지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공략을 논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송금백은 그것을 공략했다.
후우욱!
서량은 순간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걸 느꼈다.
콰아앙!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건 뒤 내공으로 행동을 통제했다. 동시에 품 안으로 들어와 땅으로 내리꽂아 버렸다.
뒷골목 파락호들도 쉽게 쓰지 않는 수법이었다. 상대를 엎어뜨리다가 칼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금백의 엎어치기는 깔끔했다. 하체, 다리로 발경을 쳐서 상대의 행동을 뿌리부터 제약시키기 때문이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내공 운용이었다. 땅에 처박힌 충격을 잊을 만큼 감탄스러운 기술이었다.
후욱!
송금백의 손이 서량의 눈을 가렸다.
일시적으로 시야를 차단한다. 삼류들이나 쓸 법한 수법이지만 놀랍게도 시야가 막히자 오감의 감도가 확 줄어들었다. 두부(頭部)에 가까운 위치로 손을 내려 무형의 기를 발산, 인지 능력을 일시적으로 저하시키는 것이었다.
송금백의 오른 주먹이 그대로 서량의 얼굴을 향해 질러졌다.
그때였다.
콰앙!
송금백의 몸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교차한 양팔에선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서량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시야를 가린 손에서 풀려나온 무형의 기가 코의 점막에 상처를 낸 것이다.
코피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찰나만 늦었어도 무형의 기가 두부까지 치고 올라왔을 것이다. 그리되었으면 상단전이 흔들렸을 수도 있다.
잠깐의 부딪침이었지만 송금백의 무공이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주 작은 동작에도 진기의 완급 조절이 완벽에 가깝다. 서량에게는 없는 절묘한 기술이었다.
“굉장하군. 그 상황에서 각법(脚法)이라?"
팔을 내린 송금백이 다시 자세를 낮추었다.
“암장귀투(暗將鬼鬪)에 걸렸음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한 자는 실로 오랜만이야.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군.”
파아아앙!
문답무용이다.
이번에는 서량이 먼저 공격할 차례였다. 번개처럼 접근한 서량이 다시 한번 일권을 내질렀다.
명치 앞 반 치 거리까지 도달한 주먹을 보며 송금백은 생각했다.
‘너무 평범해서 다음 수를 읽기가 어려워. 확실히 감각적이야.'
무공이 고도의 경지에 오를수록 동작은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반대로 단순함을 이루고 있는 무리(武理)와 진기 운용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서량의 공격이 그러했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즉각 반격할 수도 있는 공격을 던져 주니 후속타가 어떻게 들어올지를 모르겠다.
터어어엉!
송금백은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다. 뒤로 물러난 것이다.
'어떤 공격이 날아올⋯⋯.'
순간 송금백의 눈이 커졌다.
서량은 후속타를 지르지 않았다. 그저 일권을 날린 자세 그대로 멈춰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콰앙!
송금백의 몸이 미친 듯이 뒤흔들렸다.
서둘러 막긴 했지만 충격이 전신에 남았다. 굉장한 권풍(拳風)이었다.
“내가 물러날 줄 알고 있었나?"
파아아앙!
서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상대를 잡아 죽이는 데에만 몰두한다. 자신보다 약자라면 모를까, 송금백은 방심하지 않아도 위험한 상대였다.
이미 그의 감각은 송금백에게 완전히 집중되어 있었다.
터엉! 터어엉!
갈지자를 그려 가며 접근한 서량이 재차 주먹을 내질렀다.
올곧은 일격이 아니었다. 휘어져 턱을 노리는 주먹에 막강한 마기가 실렸다.
피이이잉!
스치듯 피해 낸 송금백이 곧장 서량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일대일 격전에서 초근접 거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어떤 거리라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주먹과 팔꿈치, 무릎과 어깨가 미친 듯이 부딪쳤다.
퍼버버벅! 콰앙! 퍼어엉!!
단순한 박투로 보이지만 충돌 때마다 터져 나오는 경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두 사람이 선 땅이 순식간에 쩍쩍 갈라졌다. 방출되는 힘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송금백의 눈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파아아악!
실초 같은 허초로 시야를 흐트러트린 후 빈틈을 노려 장(掌)을 올려 쳤다.
빠르고 섬세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서량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반 바퀴 돌려 어깨로 밀어붙였다.
콰앙!
그 짧은 거리에서 어깨로 후려치는데, 벽력탄이라도 터진 것 같았다.
어떤 부위로든 원하는 충격파를 터트릴 수 있는 내공력이었다. 단순히 무공이 강한 것을 넘어, 신체 전반에 대한 운용력이 극치에 이르렀다.
‘굉장하군.'
그야말로 정점에 이른 백타 실력이었다.
격식 있는 투로 내에 파격적인 살법이 깃든 자신과는 달랐다. 확연하게 정립된 무공이 아니라 본인의 극대화된 감각을 이용하여 치고받는데, 그 수준이 천하일절의 신공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어느새 송금백의 눈에 서량의 공격선이 보였다. 눈에 보일 리 없는 새하얀 공격선이 자신의 전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는 듯했다.
'절묘하다!’
하나같이 살기 넘치는 공격이었다. 와중에 공격이 막혀도 그다음 공격과 연계할 수 있는 토대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궁극에 이른 박투술이었다. 남에게 배운 게 아니라 감각과 경험으로 이뤄 낸 서량류(流)의 박투술이라고 해야 할 거다.
‘하지만 역시 어려.'
송금백의 양손이 불을 뿜었다.
콰콰쾅!
근접 거리의 박투전에서 폭발에 가까운 발경술을 썼다.
이렇게 되면 상대는 물론 자신에게도 피해가 간다. 근접 거리에서 쓸 만한 기술이 아닌 것이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온다.'
후욱!
허연 먼지를 뚫고 들어온 송금백의 손이 서량의 목을 노렸다.
스스로 일으킨 충격파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이런 경우를 미리 상정하기라도 한 듯 너무나도 유연한 대응이었다.
터어엉! 퍼엉! 티이이이잉!!
손을 내치자 장력이 날아오고, 장력을 허물어 버리자 탄력 넘치는 각법이 날아왔다.
심지어 그 궤도는 생각지도 못했던 쇄골이었다. 하단, 중단으로 이어져 상단으로 올라가 뚝 떨어져 내리는데, 뼈가 채찍이라도 된 것처럼 유연한 움직임을 구현해 냈다.
피할 수도, 받아칠 수도 없는 공격.
쿠구궁!
서량의 발이 땅을 파고들었다.
상체 전반이 뻐근했다. 복숭아뼈에서부터 찌르르한 통증이 올라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파아아앙!
다섯 손가락을 모아 화살처럼 내쏘는 무공이었다. 목젖을 노리고 쏘아지는 공격이 너무나 시기적절해서 이번에도 피할 수가 없었다.
펑! 피슉!
송금백의 손이 위로 확 올라갔다. 서량의 단타 장법이 손목을 후려쳐 공격선을 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서량의 볼에도 상처가 나고야 말았다. 완벽하게 파훼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볼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기 전.
그 잠깐 사이에 두 사람은 열다섯 합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파파파팡! 퍼엉! 콰아앙!!
근접전이다 싶으면 원거리 장력이 날아오고, 발경으로 힘을 주고받는다 싶더니 어느 순간 파고들어 근접전을 유도한다.
완전무결(完全無缺)이라는 네 글자가 어울리는 공방이었다.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고수 간의 접전이었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 극히 미세한 실력 차이가 드러났다.
쿵! 콰앙!
서량이 땅을 밟을 때마다 일대가 거센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실제로 땅이 푹푹 파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터엉! 쿠구궁!
반면 송금백의 발놀림은 경쾌하고 탄력적이었다. 가끔 받아치기 어려운 공격을 막아 낼 땐 땅이 파였지만, 힘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기가 막힌 보법으로 서량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 격차는 점차 벌어졌다. 서로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성공시키진 못했지만, 충격을 받아 내는 기술과 공격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움에서 송금백이 한 수 위라는 게 드러났다.
물론 그렇다고 송금백이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놈은 대체?'
당혹스러웠다.
놈의 천재성과 감각,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단련한 꼼꼼함에 몇 번이나 감탄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경험으로 충만했으나, 이만한 경지에 오른 시간이 짧았기에 유연한 대응에 있어서 약점이 드러났다.
그리고 송금백은 주저 없이 그 약점을 공략하는 중이었다. 생사가 걸린 전투에서 약점을 공략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로 인해 상대를 흐트러트리고 손쉽게 승리를 얻어 내는 것은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한데 어느 순간, 이놈이 그 약점을 대놓고 열어젖혔다.
약점을 보완하거나 숨기려 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리낌 없이 허점을 개방한 것이다.
서량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가 자신의 약점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걸 숨기려 들지 않고 오히려 드러낸다는 건 함정임이 분명하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파라라라락!
그의 몸놀림이 조금 더 거칠어졌다.
'이런 미친!’
송금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허점을 공략하지 않으니, 이제는 허점의 개수를 더욱 늘리고 있었다. 어디든 공격하기만 하면 확실하게 우위를 잡을 수 있을 만한 허점들이었다.
참고 또 참았던 송금백은 결국 그 허점이 주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퍼어억!
송금백의 주먹이 서량의 옆구리에 박혔다.
이번 박투전에서 처음으로 깔끔하게 들어간 일격이었다. 서량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그때였다.
파아아아앙!
땅을 박차고 올려 치는 각법이 어느새 송금백의 목덜미까지 다가왔다.
'이런!’
너무나도 위험한 부위였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무조건 막아 내야만 하는 것이다.
송금백이 서둘러 팔을 세웠다.
퍼어어억!!
“크윽!”
송금백의 신형이 옆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날아갈 뻔했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귀에서는 이명이 들려왔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어떻게든 막았지만, 잔여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후욱!
송금백이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서량의 손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촌경?!’
서량이 피에 젖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었다.
“굳이 쫓아갈 필요가 있나? 끌어 내려 버리면 되지.”
강력한 진각이 반만 접힌 손끝의 힘을 극대화시켰다.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