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수장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 (4)
인시(寅時) 초.
제이 전략실에서 한참 회의를 벌이던 서량은 홀로 교주전으로 올라왔다.
쏴아아아!
창밖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무더운 여름에 비까지 내리니 습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창가 옆 의자에 앉은 서량이 나른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원하게 내린다.”
올해로 벌써 몇 번째 폭우가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한서불침의 경지라 더위나 추위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름 특유의 무더위, 그 뜨거운 공기와 태양은 조금만 움직여도 사람을 지치게 했다.
서량은 여름이 싫었다. 유독 여름에 힘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살왕 시절 목숨을 잃을 뻔했던 적 대부분이 여름이었다. 특히 깊은 상처를 입고 봉합도 제대로 못 한 채 도주할 때는 뜨거운 기온과 높은 습도 때문에 상처가 곪아 버리기 일쑤였다.
곪은 상처로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때의 괴로움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상처 부위를 통째로 잘라 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니까.
'생각해 보니 고죽림에서 생활한 시간도 대부분이 여름이었군. 그때도 정말 엄청 고생했는데.’
그때였다.
크르릉.
“어, 거기 있었냐?”
교주전 구석에서 거대한 동체가 몸을 일으켰다.
주둥이를 쩍 벌리며 하품을 하는데 거대한 송곳니가 압권이었다. 어지간한 대호의 네다섯 배는 굵어 보이는 게, 저기에 물리면 극마의 고수도 목숨이 성치 않겠다 싶었다.
쿵, 쿵.
서량 옆으로 다가온 호왕이 그대로 엎드렸다. 딱히 서량을 보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의 옆으로 다가오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서량이 호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듯 호왕이 눈을 감았다.
“요새 말이다.”
호왕의 거대한 귀가 쫑긋했다.
“좀 무리를 해서 그런가 감각이 확 죽어 버린 것 같아. 퇴화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쩐지 엄청 나른해진 기분이라고.”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 보면 다 업보지, 업보, 교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업무는 죄다 총군사에게 미뤄 두고 있었으니. 하여간 호 군사가 정말 대단하긴 대단해. 난 죽었다 깨나도 그리는 못 살겠더라고.”
그르릉.
호왕의 목에서 동굴 소리가 났다.
“얼추 밀린 일은 다 끝냈으니 이제 건강도 신경 써야지. 야, 그나저나 금호는 아직도 거기 있냐?"
호왕은 반응하지 않았다. 서량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츠츠츠.
그의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구유마공도, 군림마황기도 아니었다. 그 무색투명한 기운은 바로 고죽림의 핵에서 나오는 기운이었다.
'음, 아직이구먼.’
금호는 고죽림의 중심부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벌써 몇 개월째인지 모르겠다. 아마 이천상과 함께하며 꽤 많은 진력을 소모한 것 같았다. 영기가 서서히 차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아직 본래 금호가 갖고 있던 왕성한 기운의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
'쩝, 건드리지 말자.'
워낙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유독 금호가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신교에는 서량과 친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마동필도, 위홍련도, 그리고 마존 대부분도 그와 친분이 있었다. 호요성과 소연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금호는 달랐다.
금호는 말을 하지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주장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옆에서 말없이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 주었다.
물론 호왕도 마찬가지지만, 금호와는 깊은 영적 교류가 있었다. 그래서 심신이 힘들어지면 유독 금호가 보고 싶었다.
크르르릉.
호왕이 갑자기 이빨을 드러냈다.
“알았다, 이놈아.”
그르릉.
이놈 이거, 말을 알아듣는 걸 넘어 생각도 읽는 게 분명하다.
호왕 역시 상단전의 영기로 자신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다만 그것은 구유마공의 핵으로, 고죽림의 핵과는 그 깊이와 순도가 달랐다.
서량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만면에 고단한 기색이 가득했다.
“후우, 왜 교주직이 외롭다고 하신 건지 이제야 좀 알겠어.”
일도 척척 진행되고 있고, 목표도 확실하게 잡고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자신과 호요성이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활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예전에는 그냥 넘겼던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서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이라는 건가.'
그는 자신의 활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애써 무시해 왔을 뿐이다.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한두 해 하고 때려치울 거 아니니.”
가만히 창가를 보던 서량이 벌떡 일어났다.
“아오, 왜 이렇게 기분이 칙칙하냐? 원로원주랑 한판 붙기라도 할까?”
어?
서량이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을 듯했다. 어차피 원로원주가 살수를 펼치진 않겠지만, 무료한 일상에 충분히 자극이 될 만한 비무가 아닐까?
'좋은데?'
하루하루 시간을 쪼개 가며 수련을 했으니, 이제는 박빙의 고수와 몸을 풀 때가 된 것 같았다. 어차피 곧 중원으로 나갈 사람이니 그 전에 신물이 날 때까지 싸워 보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좋아!”
광마존과 비무를 할 생각을 하니 아랫배에서부터 열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왜 진즉 그와 싸울 생각을 안 했는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질 정도였다.
냅다 일어난 서량이 호천마황단주에게 말을 건네려 할 때였다.
[교주님.]
“어? 야,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하명하시옵소서.]
“아니야, 너부터 말해. 무슨 일인데?”
[초지급으로 서신이 왔습니다. 군사부가 아닌 마신궁 측으로 온, 하오문의 소문주가 직접 전달한 서신입니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가져와.”
잠시 후, 대전의 문이 열리고 비각(閣)의 부각주가 들어왔다.
“군림성교, 천마불사. 교주님을 뵙습니다.”
“서신은?”
“여기 있사옵니다.”
우우웅.
붉은 서신이 저절로 떠올라 서량의 손에 떨어졌다.
서신을 펼쳐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레?”
다소 얼빠진 반응이었다. 하지만 서량의 눈은 근래 들어 가장 큰 놀라움을 담고 있었다.
“⋯⋯허, 이 양반 봐라? 이 시국에 나한테 연락을 한단 말이야?"
광마존과 비무를 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온몸을 꽉 채운 열기는 스러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온도를 높여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서량이 말했다.
“나가 보게.”
“예, 교주님.”
부각주가 나가고, 서량이 호천마황단주에게 말했다.
“총군사 지금 당장 올라오라고 해.”
잠시 후, 호요성이 올라왔다.
“부르셨습니까, 교주님.”
서량은 말없이 호요성에게 서신을 보여 주었다.
호요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옴마?”
"반응 예술이네.”
"어? 어? 이 양반이 갑자기 왜?”
“그치? 나도 이해가 안 되네. 근데 뭔가 기대는 돼.”
호요성이 얼빠진 표정으로 서량을 바라보았다.
“교주님?”
“왜?”
“설마, 아니죠?”
“뭐가 아니야?”
“⋯⋯에이, 다 아시면서. 지금 우리 상황 아시잖아요. 이거 받아 주면 안 돼요.”
“말이라도 들어 볼 수 있는 거 아닌감?”
“들어볼 수는 있는데, 어쨌든 안 돼요. 아시죠?”
"모르겠는디?”
“아아악!”
호요성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교주님! 우리 지금껏 잘해 오고 있었잖아요! 그렇잖아요? 이제 슬슬 한 방 먹여 줄 때가 왔는데 지금 이 사람들을 받아 주면 판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한단 말이에요!!”
호요성답지 않은 엄살이었다. 하기야 그간 해 온 일을 생각하면, 이리 엄살을 부려도 이상하진 않았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다시 짜긴 뭘 다시 짜? 만든 대로 진행하면 되지. 어차피 기반 다 잃은 늙은이들이잖아.”
“기반은 잃었어도 영향력은 여전히 중원 최강입니다. 게다가 그들을 받아 주면, 우린 정말 빼도 박도 못한다니까요?”
“어차피 황궁부터 공략하려고 했으면서 뭘.”
“마왕령을 왜 만드셨습니까! 특작 부대의 존재 의의가 뭐냐고요! 황궁을 그들도 모르게 야금야금 박살 내려고 만드신 거 아니에요!"
호요성이 드물게 성을 냈다.
서량이나 호요성이나 지친 건 매한가지였다. 다만 서량은 이 서신을 받고 활력을 되찾았고, 호요성을 절망을 맛본 것이 다를 뿐이었다.
"총군사. 내가 그냥 고집부리는 게 아닌 건 알지?"
“헉헉! 물론 그건 아니시겠죠!”
“만약 그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통성을 갖게 돼.”
“무림의 정통성이 아무리 대단해도 황궁에 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 아시잖아요!”
“그럼 마도천하를 어떻게 이룩하려고?"
“예?”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자네가 생각하는 마도천하가 이런 건 아니지? 본교의 마인들이 중원 전체로 퍼져 나가서 따르지 않는 문파들을 모조리 박해한다거나 마공을 안 익히면 삼대를 멸해 버린다던가 말이야.”
호요성이 우물쭈물했다.
"무,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만."
“마도천하, 말은 거창하지만 결국 천하에서 제일가는 세력이 되어 무림 전체를 통치하겠다는 뜻과 같아. 정파니 사파니 마도니, 추구하는 바는 다를지라도 제대로 된 통치를 하기 위해서는 무림인 대다수의 동의 및 지지가 필요한 법이야.”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자네 말마따나 이런 시국에 그들을 받아들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지. 하지만 자네, 그 정도로 앓는 소리 할 사람은 아니잖아? 어차피 세상은 우리가 짜 놓은 판대로 움직이지 않아. 얻을 수 있는 게 분명하다면, 뭔가를 내놓고 거래할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걸 얻을 수 있도록 이 악물고 달리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생기 넘치는 얼굴로 거창한 말을 줄줄 늘어놓으니 이건 뭐 설득당한 척이라도 해 줘야 할 판이다.
호요성이 한숨을 쉬었다.
“교주님. 생각해 보니 교주님과 제가 지금까지 함께 판을 짜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해서 질문 하나만 올리겠습니다.”
“얼마든지.”
“황궁을 적대한다. 이 부분에서 저는 황궁이 힘을 발산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억누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지요.”
“호오?”
“⋯⋯교주님의 반응을 보니 저와는 생각이 완전히 다르신 모양인데요?”
“그러게.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줄 알았더니만 그런 건 또 못 읽고 있었나 보군.”
"하면 교주님께서는 황궁을 어디까지 공략할 생각이십니까?”
“없애 버릴 생각이네.”
"⋯⋯!”
“물론, 필요하다면.”
호요성이 턱에 굵은 힘줄이 돋았다.
“황궁을 없앤다는 것,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그래서 필요하다면, 이라는 말을 달지 않았나.”
“정녕 중원 땅에 살고 있는 만백성의 삶을 뒤흔드실 생각이십니까?”
“필요하다면.”
"⋯⋯.”
“나는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살아왔어. 그리고⋯⋯.”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모두를 책임질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백성들이 사는 게 사는 건가?”
“⋯⋯그렇군요.”
호요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제야 교주님께서 보시는 끝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다행이군.”
호요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로원의 출격을 더욱 앞당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마왕령주의 식견은 제가 상상하던 것 이상이더군요. 손발 맞는 수하들이 있다면 곧장 실전에 투입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사람 하난 잘 보지.”
“그럼 이제부터 본교의 상황을 전시 체제로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호요성이 무릎을 꿇고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부디 뜻대로 하소서.”
서량이 그의 손을 잡았다.
“고맙네, 총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