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수장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 (5)
“쿠웨에엑!!”
쏟아 내는 핏물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토혈했음에도 낯빛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얹힌 속이 뻥 뚫린 듯 개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제 좀 살겠구먼.”
“쯧. 천하에서 주먹으로 제일이라는 사람이 꼴이 그게 뭔가?"
“별수 있나. 자네나 나나 세수가 백을 헤아리네. 다 늙어 빠진 몸으로 이나마 버틴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자네 말이 맞네. 자네는 땡중이 확실해.”
“허허, 그러는 자네도 득도(得道)는 요원하겠네. 근래 들어서 짜증이 많이 늘었어.”
“손에 묻힌 피가 얼마이던가. 사람을 죽인 검에 어찌 도(道)가 깃들 수 있겠누, 천하를 바로잡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득도는 포기했다네.”
"말은 잘하는구먼.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말이야.”
“그래도 동지가 있지 않나? 자네 역시 열반에 들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 마음에 위안이라도 되네.”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말코 같으니라고.”
“생각해 보게. 당금 세상에 우리와 같은 연배가 몇 명이나 되겠나?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어 왔지만, 남은 건 결국 불알 두 쪽과 친구 놈 하나뿐이잖나.”
“거 도사란 인간이 상스럽게.”
“심지어 나이 먹어서 제 기능도 못 하네. 자네도 그렇지?"
“갈수록 가관이로구먼.”
“결국 남은 건 친구밖에 없다 이 말이야. 그러니 혼자 열반에 들지 말고, 나랑 사이좋게 저승길에 오르세나.”
“확실해. 자네는 검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한들 절대 득도하지 못했을 위인이야.”
"아네. 그러니 자네도 힘 좀 내게나.”
낯빛이 멀쩡한 사람에게 힘을 내라고 하니, 일견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노승의 몸을 보면 노도(老道)의 얼굴이 왜 이리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주르르륵.
노승의 어깨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완벽하게 지혈했다고 생각했거늘⋯⋯.”
“토혈로 내력이 흔들렸네. 혈이 풀린 모양이야.”
“잠시 그대로 있게.”
“그러지 말게. 자네 상태도 위태롭기 그지없잖나. 쓸데없이 내공을 소모하지 말게.”
“입 다물고 가만히 있게.”
크게 숨을 들이켠 노도가 검지를 세웠다.
파바바박!
희뿌연 기운이 노승의 어깨에 퍼부어졌다. 매끈하게 잘린 단면에선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후, 이제 괜찮을 걸세. 당분간 지혈에는 문제가 없을 게야. 다만 상처가 도지기 전에 약과 영양분 가득한 식사가 필요할 걸세.”
“이 사람아.”
“쿨럭!”
노도가 밭은기침을 뱉었다.
노승과는 달리 노도의 얼굴은 극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누가 봐도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우우우웅.
노도의 몸에서 반투명한 백색 기운이 일렁였다.
그야말로 온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선기(仙氣)였다. 지극히 불안정한 기운이었으나 진기의 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궁극에 이른 진기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태극진기(太極眞氣)? 순양무극공이 낫지 않은가?"
“만물일여(萬物一如)는 무당 무공의 본질일세. 지금 상태에선 보다. 순한 태극진기가 무극보다 낫네."
"과연, 봐도 봐도 무당의 무공은 끝이 없구먼. 삼풍진인(三豊眞人)의 깨달음이 새삼 놀랍네.”
“그러는 소림의 무공도 인간의 무공은 아니야. 자네 낮빛 좀 보게. 그게 어디 죽어 가는 사람의 낮짝인가?”
“어차피 죽을 몸뚱이인데 낯빛이 좋든 나쁘든 무슨 상관인가. 흰소리 그만하고 움직이세나. 아직 백 리 길은 족히 남은 것 같네.”
비틀거리며 일어난 노승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였다.
사삭.
"흐음.”
노도의 얼굴이 굳어졌다.
"발각된 모양일세.”
“지독한 녀석들이군. 당대 무림 최악의 세력이라는 천마신교의 영역까지 들어오다니. 내 살다 살다 저리 독한 놈들은 처음이네.”
파아아악!
두 사람이 신법을 펼쳤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신법이지만 안타깝게도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최소의 내공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고 있으나, 기마의 속도보다 현저히 느렸다.
“허억. 허억.”
심지어 호흡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호흡은 곧 내공심법의 시작이자 끝이다. 호흡이 흐트러지면 기(氣)가 불안정해지고, 내기와 외기의 순환 또한 부자연스러워진다.
당연히 체력이 소진되는 속도도 빨랐다. 두 노인의 몸이 순식간에 땀으로 젖었다.
출혈도 심하고 체력과 내공도 떨어진 상태에서 땀까지 흘리고 있다. 물 한 모금 마음껏 마신 적이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상태는 점점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피이이잉! 쾅!
두 노인의 얼굴 사이를 통과한 화살이 바위 하나를 그대로 쪼개 버렸다.
위력적인 궁사(弓射)였다. 궁극에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라도 일격을 허용하면 치명상을 입을 만한 위력이었다.
노승이 노도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전달되는 의지.
‘먼저 가게.'
'시끄럽네. 자네나 가도록 하게. 나는 서 교주를 만난 적도 없으이.’
'그래도 자네가 가야 하네. 당장은 자네보다 내가 더 힘을 낼 수 있다.’
'정말 이러긴가?’
'부탁하네. 이런 상황에서까지 싸우지 마세나.'
노도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친구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이런 걸로 싸울 때가 아니라 효율을 따져야 할 때였다. 거의 백 년에 이르는 생을 살며 무림의 온갖 풍파를 겪어 온 노도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친우를 두고 이렇게 갈 수는 없었다. 어차피 목숨에 미련도 없는 판국에 친구부터 보내야만 할 이유도 없는 듯했다.
“헉헉! 어차피 교주에게 진즉 서신이 갔을 터, 이미 생을 회복하기 어려운 몸일세. 여기서 끝을 보세나."
“이 사람아.”
“적어도 마지막 가는 순간만큼은 우리도 고집 좀 부려도 되지 않겠나?”
노도의 얼굴은 맑고도 맑았다. 진정 죽음을 결의한 얼굴이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노도를 보던 노승의 얼굴에도 점차 편안함이 감돌았다.
“그래, 사질들도 우리를 이해해 줄 것이네.”
"중요한 건 서 교주가 우리의 죽음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인데.”
“서 교주의 혜안은 천하를 꿰뚫어 보고 있다네. 필요하다면 장강 물도 천금을 받고 팔 수 있는 사람이야. 분명 잘 써먹을 걸세.”
“그렇다면 이제 미련은 없구먼. 마지막으로 시원하게 날뛰어 보세.”
“그러세나.”
노승이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쿠웅!
갑작스레 분위기가 돌변했다.
쿠구구구궁.
노승의 몸에서 황금빛 신기(神氣)가 뿜어져 나왔다. 노도의 몸에서는 무당산의 안개처럼 짙고 뿌연 백색의 선기(仙氣)가 피어올랐다.
도주를 포기하고 목숨을 걸기로 마음먹은 두 절대고수. 비록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었고 체력과 내공의 소모도 극심했지만, 그 기세만큼은 젊은 날의 패기 넘치는 쌍신(雙神)의 그것을 상회했다.
위이이잉.
두 사람은 막역지우(莫逆之友)가 분명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고는 하나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닌바, 도불(道佛)의 극치를 깨달은 두 사람의 기운이 서로의 기운을 증폭시켜 주며 활화산 같은 기파를 뿜어냈다.
그 기파만으로도 어지간한 고수는 피를 토할 정도였다. 다 죽어 가는 고수의 존재감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결국, 숨어서 두 사람을 노리던 일단의 무리도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사삭.
선두에서 몸을 일으킨 자는 무려 세 자루의 검을 매고 있는 장한이었다. 마흔이 갓 넘은 듯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나이를 훨씬 더 먹은 듯 노회한 분위기가 일품이었다.
“도주는 포기했나?”
오만함이 가득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노승, 적송이 미소를 지었다.
“포기했다네.”
“참으로 사람 힘들게 하는 늙은이들이로군. 진즉 포기했으면 좋았잖나.”
노도, 현천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도주는 지금 포기했지만 목숨에 대한 미련은 진즉에 놔 버렸지. 다만 화려한 마지막을 추구하기로 했으니, 자네도 긴장하는 것이 좋을 걸세.”
장한이 피식 웃었다.
“내 일검(一劍)이라도 막을 수 있을 성싶은가?"
“백 년을 도(道)에 매진했음에도 가끔 이해가 안 가는 부류들이 있다네. 그중 하나가 바로 자네와 같은 사람이야.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 기분이 좋던가?”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렸다는 뜻. 즉, 뒤에 있는 궁수들을 믿고 그리 설쳐 대면 기분이 좋냐는 뜻이었다.
장한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굳어졌다.
“건방진!”
콰르르릉!
장한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파가 쏟아져 나왔다.
놀랍게도 그 기파는 화경의 고수가 아니고서는 선보일 수 없는 농도였다. 그것도 십대고수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기파였다.
치명상을 입은 지금의 적송과 현천으로서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내상이 심화될 정도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두 사람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이 정도 기파라면 서 교주가 읽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 신안(神眼)의 술(術)은 나보다 자네가 더 낫지 않은가. 다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능력이라면,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생각하네.’
'그 정도면 충분하네. 도발한 보람이 있구먼.’
스르릉.
장한이 검을 뽑아 들었다.
흑백홍(黑白紅)의 삼검(三劍) 중 흑색의 장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름 끼치는 살기가 일대를 지배했다.
새외무림의 절대사검(絶代死劍), 흑사신검(黑死神劍)이었다. 뽑힌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납검된 적 없다는 죽음의 숨결이었다.
적송의 눈이 번뜩였다.
'선수!’
쿠웅!
강한 진각과 함께 하나 남은 주먹이 힘차게 뻗어 나갔다.
곧고도 정직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회오리치며 쏘아지는 무형의 권력(拳力)은 바위를 가루로 만들 만큼의 위력을 담고 있었다.
소림의 대표절기 백보신권(百步神拳)이었다. 소림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권법이자, 가장 연성하기 힘든 무공이기도 했다.
장한의 눈이 번뜩였다.
“카아아앗!”
번쩍! 콰아앙!
백보의 권력이 반으로 쪼개져 사라졌다.
장한의 얼굴에 음침한 살기가 어렸다.
‘굉장하군.'
다 죽어 가는 몸으로도 이만한 힘을 구사한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이십 합을 넘기지 못하고 패배했을 것 같았다.
“흐흐, 멍청한 늙은이. 이 와중에도 살기는 없군. 그런 말랑말랑한 주먹으로 날 상대하려 했나?"
그때, 현천의 손이 휘둘러졌다.
"그러게나 말일세.”
번쩍!
한 줄기 구름 같은 검기가 장한을 덮쳤다.
검이 아닌 맨손으로 펼쳐 내는 지검공(指劍功)이었다. 맨손으로 검기공(劍氣功)을 발산하는데, 그 위력이 보검으로 펼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번만큼은 장한도 여유로이 받아 낼 수가 없었다. 그의 검에서 칙칙한 흑색 검기가 피어올랐다.
콰르르릉!
“우웨에엑!”
현천진인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했다. 검기의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내장이 뒤흔들린 것이다.
“으음.”
장한 역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 도인이 최후의 힘을 짜내 휘두른 일격이었다. 역시나 살기는 깃들지 않았지만, 원정(原精)의 힘까지 담아 내쳤으니 백보신권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게 전부였다. 적송은 연신 비틀거리고 있었고, 현천진인은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토하고 있었다.
“재롱은 다 끝났나?"
“쿨럭!”
"얼른 죽이고 떠나야겠군. 마인 놈들의 영역이라 그런가? 공기가 몹시 텁텁해.”
장한이 흑사신검을 들었다.
“지루했다. 늙은이들. 잘 가라.”
적송과 현천이 눈을 감았다.
장한이 힘차게 검을 내리치려는 그 순간.
“언제나 그랬지.”
남쪽 저 멀리서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그랬어. 딱히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한단 말이야.”
장한의 눈이 흔들렸다.
"하긴, 결정적이라고 하기에도 뭣하군. 이 얄미운 양반들, 진즉에 연락을 줬으면 그 지경까지 가지도 않았잖아.”
후욱!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공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았거늘 어느새 적송과 현천진인 뒤로 붉은 용포를 걸친 거한이 서 있었다. 손에는 다섯 자가 넘는 대도를 들고 있는데, 자흑색 칼날이 무섭도록 강렬한 마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장한이 외쳤다.
"네놈은 뭐냐!”
서량이 차갑게 웃었다.
“너야말로 뭔데 우리 집 앞마당에 기어 들어와서 지랄이야, 이 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