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시대의 선택 (2)
거대한 대도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궁귀조가 죽은 충격에 찰나지간 얼이 빠져 버린 을지군은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콰아앙!
“큭!”
흑검과 홍검을 교차시켜 막았지만, 대도가 주는 충격은 검을 넘어 전신의 관절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났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제법이군.”
을지군의 눈빛이 돌변했다.
이건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말이다. 도격의 힘은 지금껏 겪어 보지 못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지만, 을지군의 자존심은 상대의 힘을 인정하지 못했다.
“어린놈의 자식이!”
치리링!
화려한 검격으로 대도를 튕겨 낸 을지군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서량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신기하군.’
을지군의 몸은 건장하고 우람했다. 단순히 체격이 좋은 걸 떠나서 단련 자체가 강격(强擊)을 중점에 두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스며들듯 다가오는 보법은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허깨비가 다가오기라도 한 양 부드러웠다.
쾅!
빠르게 접근한 을지군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동시에 흑색의 신검과 홍색의 대검이 번개처럼 서량의 목과 가슴을 노렸다.
‘그래서 그랬군.’
탈력(脫力)으로 힘을 빼 접근하면서 폭발적인 내공을 이용, 빼냈던 힘을 모조리 검격에 담아 후려친다. 검법과 보법이 일체화를 이루었다. 신체의 단련은 물론 보법과 신법까지, 오로지 검의 위력을 위해 초점을 맞춘 무공이었다.
‘인상적이긴 하다만.’
서량의 천마도가 횡으로 휘둘러졌다.
쩌저저정!
일도(一刀)에 쌍검이 튕겨 나갔다.
마치 폭풍에 휩쓸린 낙엽을 보는 듯했다. 단순히 검만이 아니라 상반신 전체가 옆으로 쏠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을지군도 보통이 아니었다. 연환격을 펼칠 엄두도 내기 힘든 도격을 받았음에도 절묘한 무게 중심으로 몸을 회전시켜, 흑사신검을 비검(飛劍)의 수법으로 날려 보냈다.
상대의 박자감을 흐트러트리는 절묘한 살법이었다. 위력적인 무공이 아님에도 적을 죽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법, 찬사를 받아 마땅한 무공이었다.
물론 서량은 이 절묘한 수법에 뒤지지 않는 반사 신경의 소유자였다.
파아앙!
하단에서 올려 친 장력이 흑사신검을 하늘 높이 튕겨 보냈다.
‘여기!’
번쩍!
을지군이 서량의 복부를 향해 홍련대검을 찔러 넣었다.
검격은 위력적이었지만 소위 필살기(必殺技)라 할 만한 무공은 보여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대의 박자감을 흐트러트리고 허점을 찔러, 심리를 무너트리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아주 좋군.’
적이지만 일련의 살법이 독특하면서도 깔끔했다. 어떤 의미로는 살수의 살법과도 닮은 듯했다. 본인의 힘을 아끼면서도 최대한의 효율을 끌어내는 무공, 무도(武道)가 아닌 투술(鬪術)에 가깝다.
서량이 천마도를 종횡으로 휘둘렀다.
쩌어엉! 피슉!
“큭!”
을지군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일가(一家)를 이룬 독특한 무공이었지만 상대는 서량이었다. 서량은 살수의 살법과 마도비학은 물론, 정공(正功)에도 두루 능통한 만능형 무인이었다.
말하자면 완전무결(完全無缺)에 근접한 무인이란 것이다. 을지군의 투술도 통하지 않는 자, 만무(萬武)를 섭렵한 무신(武神)이 그였다.
반년 전, 철혈성주 송금백과의 전투에서 서량은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살기였다.
여느 무인들도 실력을 겨루는 일반 싸움과 목숨을 건 생사결에서의 기량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량은 그 차이가 유독 심했다.
진정 죽이겠다고 작정한 때야말로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자. 오로지 끝장을 보는 싸움에서만 최강을 논할 수 있는 자.
그래서는 안 된다.
생사결이든 그저 실력을 겨뤄 보는 것이든, 그 어느 싸움에서도 실력에 편차가 없는 자야말로 이상적인 무인이다. 진정 그게 가능한 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인이라면 불가능한 영역이라 해도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고 생사결에서의 기량을 낮출 수는 없는 노릇. 즉, 여느 싸움에서도 생사결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실력을 끌어내야만 한다.
지난 반년의 세월은 바로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한 시간이었다. 신교의 내정 전반을 다루면서도, 자신의 무공을 체계적으로 다듬어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화경의 고수, 검궁의 궁주인 을지군을 상대하는 서량은 흠 하나 없는 무결점의 무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쩌엉! 쩌저저정! 쩌엉!
묵직한 대도가 회초리처럼 빠르고 경쾌하게 움직였다.
기공술을 끌어 올려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무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방어와 반격이 불가능하다. 작정하고 칼을 휘두르는 서량에게, 을지군은 반격은커녕 피하기만 급급한 꼴을 보여 주고 있었다.
뒤에서 서량의 싸움을 지켜보던 적송과 현천진인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대단하지 않은가, 땡중?”
“그러게나 말일세. 옛날과는 완전히 딴판이 되었어.”
“스승을 따라 만류귀종(萬流歸宗)에 이르려 함인가? 어째 서 교주의 장중한 도법에서 정공(正功)의 극의(極意)가 엿보이는 듯하네. 저리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무공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구먼.”
적송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강해졌구먼, 서 교주.”
파격적인 마기, 살벌한 기세로 상대를 찍어누르지 않아도.
철저하게 단련된 격식 넘치는 무도(武道)로 상대를 압박하는 무공이었다. 단순해 보이는 일격, 일격에 상상을 초월하는 무리(武理)가 깃들어 있으니, 이야말로 무(武)로서 선(仙)의 영역을 넘볼 만반의 준비가 된 듯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승부의 추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푸화아악!
“크윽!”
을지군의 팔뚝에 깊은 도상이 새겨졌다.
두꺼운 근육을 찢고 뼈를 절반이나 끊어 버린 상처였다. 왼손에 쥐고 있던 홍련대검이 하늘을 날았다.
“이익!”
치리리리링!
마지막까지 숨겨 두고 있던 백색의 장검이 스스로 하늘을 날았다. 검궁의 궁주다운 깨달음, 백의종검(白衣從劍)으로 펼치는 어검술(馭劍術)이었다.
서량의 눈에서 태양과도 같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갈(喝)!!”
콰앙!
반경 수십 장을 뒤흔드는 무지막지한 진각과 함께 천마도가 휘둘러졌다.
순간 을지군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어두운 세상 속에 우뚝 선 태산처럼 거대한 칼날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그 무시무시한 힘의 실체 앞에서 검기나 검풍은 물론, 어검술도 무용지물이었다.
카아아아앙! 푸화악!
신병인 흑사신검과 백의종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쿨럭!”
무릎을 꿇은 을지군이 왈칵 피를 토했다. 우측 빗장뼈부터 갈빗대, 허벅지 뼈까지 차례대로 부러져 버렸다. 제아무리 화경의 고수라도 전투 불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깔끔하게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말이다.”
을지군이 떨리는 눈으로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치명상을 입은 을지군과는 달리 서량은 멀쩡하기만 했다. 천마도를 어깨에 걸치고 을지군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언뜻 한가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그렇게나 컸다. 같은 화경, 극마라도 무도(武道)의 깊이 자체가 다른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래도 검궁의 궁주 정도 되는 위인이라면 우리가 모르는 정보도 제법 많이 알고 있지 않겠어?”
“쿨럭! 주, 죽여라!”
정보를 제공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한다. 자존심 강한 무인다웠다.
서량이 차갑게 말했다.
“생사여탈의 권리는 오로지 승자의 것. 패자는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지.”
“……!!”
“걱정하지 마라. 고문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원하는 건 얼마든지 얻어 낼 수 있으니까.”
서량이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파지지직!
그의 왼손에 은은한 전광이 일었다. 군림마황기였다.
“이만 자라.”
번쩍!
한 줄기 번개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내 을지군의 눈이 감겼다.
서량이 뒤를 돌아보았다.
적송과 현천진인이 연신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 세우고 있었다.
서량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시다, 손 많이 가는 노친네들.”
서량 일행이 사라진 지 얼마 뒤.
스르륵.
한 줄기 검은 안개가 궁귀조의 시체 더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십대천마(十代天魔)라더니, 정말 대단하군. 당대 천하제일인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복면인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역시나 제거 일 순위야.”
* * *
“후, 개운하구먼.”
태사의에 앉은 서량의 얼굴은 무척이나 상쾌해 보였다.
호요성이 피폐해진 얼굴로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어, 간만에 칼질 좀 했더니 속이 다 후련하지 뭔가. 관절에 낀 녹이 다 벗겨진 것 같아.”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몸 좀 풀어야겠어. 정 안 되면 원로원주하고라도 대판…….”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 가던 서량이 아차 싶어 호요성을 내려다보았다. 호요성의 얼굴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서량이 파리처럼 손을 비볐다.
“아니 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네. 이렇게 고생하는 총군사를 두고 어찌 나만 배 두드리며 살겠는가. 아! 말이 나온 김에 말이야, 자네도 가끔은 일을 내게 맡겨 두고 좀 쉬지 그러나?”
“괜찮습니다. 이제 시작인 걸요.”
“그, 그렇지. 그러니까 미래를 위해서라도 체력을 구비해 둬야 하지 않겠나. 요즘 자네 몰골을 보면 당장에라도 픽 쓰러질 것 같아서 내가 다 겁이 나.”
“좋은 보약이라도 지어 주십시오.”
“천마신단(天魔神丹)도 녹여서 줄 수 있지, 암.”
천마신단은 신교 최고의 영약이요, 보물이었다. 단약 하나에 농축된 마기는 극도로 정제되어 있어, 누가 취해도 막강한 마기를 취할 수 있었다. 심지어 부작용도 없다.
호요성이 피식 웃었다.
“제 나이에 그런 보물을 취해 봤자 어디다 쓰겠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날름 먹을 순 없잖아.”
“정 뭣하시면 수하들에게 뿌려 주세요. 앞으로 더 많은 고수가 필요할 테니까요.”
“영약 하나 빨아먹는다고 하수가 고수되겠나.”
“그러니까 싹수가 보이는 놈에게 줘야지요.”
“음, 그래야지. 위 령주한테 줄까?”
“영약으로 무력이 상승할 경지는 이미 한참 전에 넘어섰다고 들었는데요?”
“하긴.”
호요성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이제 농담은 그만할 때가 된 것이다.
“정무쌍신이 혈혼각의 중환자실에 들어갔답니다. 어떻게든 목숨줄은 이을 수 있지만, 잘해도 석 달은 넘기지 못할 거라고 합니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어쩔 수 없지. 다 죽어 가는 상태였으니. 오히려 석 달이면 긴 거야.”
“그 정도였습니까?”
“살아 있는 게 용하더군. 강한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둘 다 죽었을 걸세.”
“그렇군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호요성이 품에서 문서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뭔가?”
“선점 타격지입니다.”
“……!”
“확인해 주십시오.”
문서를 한 차례 훑은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많이 들겠군.”
“어차피 민초들은 본교의 진정성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왕지사 정무쌍신이 본교에 왔으니, 그들의 협명을 이용해 볼 수밖에요.”
“거봐, 계책을 척척 만들어 내고 있잖나. 난 자네가 아주 예쁘다네.”
“소름 끼칩니다.”
“어허, 그래도 내가 교준데.”
“하, 하, 하.”
“거 사람 참…….”
호요성이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무정을 붙였습니다.”
느닷없는 말이지만 서량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거의 호천마황단 수준으로 기척을 숨길 수 있는 자였어. 철무정이라도 위험할 수 있을 텐데?”
“가용 병력이 없었습니다. 철 부주의 능력을 믿을 수밖에요.”
“호남성을 벗어난 이후에는 하오문에게 맡겨. 그 이상은 위험해. 아마 십대고수 중 누군가일 거야.”
“알겠습니다.”
서량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을지군과 싸우는 도중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굉장한 기(氣)였다. 진기의 질이 을지군보다도 높은 듯했어. 하지만 정파의 신공도, 사마외도의 이학(異學)도 아니었다. 하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략실에는 내일 들어가도록 하겠네. 조금 더 수고해 주게.”
“쉬시게요?”
“그럴 리가 있나.”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자네가 못하는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