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시대의 선택 (3)
우우우웅.
안개처럼 퍼졌던 마기가 다시 뭉쳐지며 서서히 순도를 높여 갔다.
“흡!”
일순간 사내의 코로 빨려 들어간 마기가 물 흐르듯 전신으로 치달았다.
부르르르르.
사내가 몸을 떨었다.
지극한 환희에 소름이 돋았다. 전신 혈도를 누비는 마기는 거침이 없었다. 세맥까지 타통된 육체는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고, 흐리고 텁텁했던 상단전까지 탈바꿈시켰다.
‘아아!’
신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그간 자존심에 눈이 멀어 볼 수 없었던 것이 보였다. 능력이 되지 않아 보지 못했던 것도 보였다.
무공의 성취를 늘리는 깨달음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졌다.
신기했다. 극한의 희열이 느껴지는 동시에 마음은 담담했다. 그는 생전 이러한 경지에 도달해 본 적이 없었다.
무공으로 심신을 바로 닦는 것.
그것은 굳이 정파의 신공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편법을 쓰지 않는 정직한 단련, 거기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죽음을 겪고 나서야 진정한 정기신(精氣神)의 일체화를 이룰 수 있다.
‘아……!’
하지만 그는 깨닫고야 말았다. 자신이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지만, 동시에 꿈에도 그리던 경지는 아직도 요원하다는 것을. 한 끗 차이지만 그것은 배 없이 망망대해를 횡단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자신이 기회를 놓쳤다는 걸, 십 년이 지나도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주르륵.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자신은 죽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 때문에 슬퍼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아쉬움이 너무나도 컸다.
그 무뚝뚝한 검사의 곁엔 마도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괴물이 있다. 그래서 검사는 헛된 길로 빠지는 고생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빛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뼈에 사무칠 정도로 한이 되었다.
인이 박인 한은 무서운 속도로 그 크기를 불려 갔다. 얼마나 화가 나고 아쉬운지,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괴물을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거기까지 바라는 것은 지나친 사치라는 걸.
그는 자신에게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지, 직접 도와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그 많은 지원을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도 아쉽구나.’
사내, 관평이 눈을 떴다. 눈물 젖은 두 눈이 참으로 애처로워 보였다.
‘이제 죽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그러한 경지에 오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생각해 보면 마동필을 시기할 필요도 없었다.
옆에서 누가 도움을 주었든, 매 순간 닥쳐 오는 위기에서 올바른 판단을 한 것은 전적으로 마동필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는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상상도 못 할 고행을 겪었을 것이다.
지독하게 노력해도 운이 따르지 않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러나 노력 없는 자에게 운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단 말이다. 마동필이 그 빛의 경지에 오른 것은 천마의 도움 이전에 그 자신의 노력이 뛰어나서였다.
‘나는 그저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
철컹!
철창이 열렸다.
관평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마동필이 서 있었다.
마동필의 눈이 깊어졌다.
“실패했군.”
“그래.”
관평의 얼굴은, 목소리는 몹시 담담했다. 충혈된 눈과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그의 번뇌가 모두 씻겨 나갔음을 증명했다.
마동필의 눈이 번뜩였다.
‘다르군.’
이전의 그와는 뭔가가 달라졌다.
관평의 마음은 어둡고 습했다. 강한 의지는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이유를 외부에서 찾았고, 나쁜 결과는 자신의 선택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관평이 지금껏 자아(自我)를 지탱할 수 있었던 방법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지도 않았다.
왜 잘못되었는지, 자신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찰해 본 적이 없으니 자연 무공의 성취도 일정 수준 이상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 꾸준한 단련이 아닌 기묘한 술수로 경지를 늘리는 사도(邪道)에 빠지는 것이다.
‘눈이 맑아졌다.’
항상 혼탁하고 흔들렸던 눈. 그 눈이 지금은 맑고 잔잔했다. 마치 깨달음 깊은 고승의 눈처럼 보였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소?”
“그래.”
“하면 이만 가십시다.”
관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비록 극마에 오르지는 못했다고 하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경지임은 분명했다. 과거 사도(邪道)로 오른 경지가 아닌, 죽음을 겪고 성장한 진짜 무인의 움직임이 거기에 있었다.
“따라오시오.”
두 사람이 나란히 어두운 회랑을 걸었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지난 반년 동안 숱하게 싸워 온 사이지만 서로에게 정(情)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 각쯤 지났을까.
“아쉽진 않소?”
“무엇이.”
“비록 극마에 도달하진 못했으나, 당신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르기도 어려운 일이오.”
“지원이 없었다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였지.”
실제로 관평에겐 천마신단 두 알과 사령단(邪靈丹) 다섯 알, 신교십대마공까지 지원되었다. 거기에 마동필과의 목숨을 건 격검(擊劍)은 덤이었다.
나아가 간간이 두 사람을 보러 온 서량 덕에 마동필은 물론 관평 역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홀로 해치우려 했다면 마흔이 넘어서도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리라.
마동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오. 하지만 당신이 당신 나름대로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리 성장하지도 못했을 것이오.”
“중요한 것은, 나는 내가 바랐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
“결국은 그게 중요한 거지.”
초연했다.
마동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관평의 변화를.
무공의 성장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았는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봐도 무방할 만큼의 변화였다. 어쩌면 극마에 오르지 못한 자괴감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마동필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고마웠소.”
“내가 할 말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이만큼 달려 보지도 못했겠지. 너라는 자극제가 있었기에 이 정도나마 올 수 있었다.”
“…….”
“감사를 표하지.”
이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감사를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고, 유감이라 말하기에도 애매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비밀 통로를 지나 이각여 만에 마신궁의 후원에 도착했다.
“왔나?”
마동필이 무릎을 꿇었다.
“군림성교, 천마불사. 교주님을 뵙습니다.”
“지겹지도 않냐? 인사 생략해도 된다니까.”
“…….”
“알았다, 알았어. 거참 네 고집도 징그럽다니까.”
마동필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던 서량이 시선을 돌렸다.
관평이 말없이 포권을 취했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도달하지 못했군.”
“그렇소.”
“나를 원망하나?”
“원망치 아니하오.”
“약속은 약속이다. 천마의 말은 가볍지 않아. 생사(生死)를 건 약속이라면 더더욱.”
“알고 있소.”
“안다니 다행이군.”
관평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양손을 무릎에 얹어 둔 그가 눈을 감았다.
“덕분에 스스로의 모자람을 깨달았소. 사후 세계가 있다면, 이 고마움은 그때 갚겠소.”
서량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덕분에 무공이 성장할 수 있었다가 아니라, 스스로의 모자람을 깨달았다고 한다. 관평의 변화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그것만 끝내고 우리의 약속을 마무리 짓도록 하지.”
잠시 후, 마신궁 내문을 통해 고구가 들어왔다.
“군림…….”
“그만!”
“…….”
“고 당주, 제발 자네만이라도 그 간지러운 인사는 하지 말아 주게.”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확실히 마동필과는 반응이 다르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고구의 언행은 여전했다. 서량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간 바빴나?”
“눈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신교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교주님께서도 무척 바쁘셨다고 들었습니다. 옥체 상하시지 않도록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고맙군.”
어색함은 없었지만 이전과는 결이 다른 대화였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했기에 가벼운 농담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해서, 그놈은?”
고구가 내문을 바라보았다.
“끌고 오너라.”
이내 형법당원 둘이 을지군을 끌고 와 서량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고구 뒤로 물러나 그대로 엎드렸다.
서량이 지풍을 날렸다.
푹!
“허어억!”
을지군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하루 만에 정신을 차렸지만, 정신을 잃기 전보다 훨씬 피폐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쿨럭! 커헉!”
밭은기침을 뱉는데 핏물이 섞여 나온다. 부러진 뼈만 대충 맞춰 놓고 내상은 방치했으니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을지군이 충혈된 눈으로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대 거인의 모습에 을지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주, 죽여라!”
자신이 정신을 잃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서량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전에도 말했다만, 패자에겐 죽음을 호소할 자격도 없느니라.”
“……!!”
“다만 네놈에게서 뽑아 먹을 것은 있는 것 같군.”
파지지지직!
서량의 몸에서 어두운 전광이 뿜어져 나왔다.
간간이 시퍼런 뇌광이 번뜩이지만,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어두운 번갯불이었다. 거의 회색에 가깝다고 할까.
반년 동안 무공의 경지가 상승한 건 아니었으나, 군림마황기에 대한 이해도는 확실하게 깊어진 것이다.
스르륵.
신교 최강의 마기를 접한 마동필과 고구가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를 했다. 그들의 행동에는 교주를 향한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관평의 눈이 흔들렸다.
‘엄청나다. 저것이 바로 천마……!’
이만한 경지에 오르고 나니, 서량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경지에 올랐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규격 외의 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자를 증오하고 죽이려 했다니, 오만도 그런 오만이 없다. 자신 같은 사람이 열 명, 백 명이 있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서량이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우우우우웅!
그의 손에 반투명한 회색빛 해골 형상이 떠올랐다. 군림마황기에 속하는 사령기(死靈氣)였다.
“네놈의 목숨은 필요치 않지만, 그 조막만 한 머리에 든 것은 쓸모가 있을 것 같구나.”
을지군의 얼굴에 극심한 공포가 일었다.
이 수법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끔찍한 미래가 닥칠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 하지 마! 그러지……!”
“시끄러, 이 자식아.”
서량의 큰 손이 을지군의 머리를 덮었다.
파지지지직!
을지군의 입가에 허옇게 거품이 일었다.
백회혈을 침투한 사령기가 순식간에 그의 상단전을 장악했다. 이성을 관장하는 곳은 허물어트리고, 기억을 관장하는 곳만 쏙 빼내어 장심(掌心)을 통해 빨아들였다.
기(氣)로, 기(氣)에 얽힌 사람의 감정과 기억까지도 더듬어 낸다.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절대마공, 이제는 마기로 사술(邪術)과 도술(道術)의 영역까지도 침범하고 있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불가능이라는 영역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 가며 지금의 경지에 도달한 서량은 가히 천하제일인이라는 칭호를 얻기에 손색이 없었다.
“오호, 요 깜찍한 놈들을 보게나. 새로운 제국 건설이라? 예상은 했다만 진짜 한번 해볼 생각인가 보지? 게다가…….”
서량의 눈에 진한 마기가 어렸다.
“나더러 역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