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시대의 선택 (4)
완전히 폐인이 되어 버린 을지군을 고구와 함께 돌려보낸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역적……. 그것참 거창하기 짝이 없는 죄로구먼.’
하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중원의 모든 백성은 제국 황제의 소유다. 그런 제국의 눈에 보이는 천마신교는 사교(邪敎) 무리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물며 마인들은 황제를 타국의 제왕으로 여길 뿐이지 않나. 그들은 죽어서도 교주만을 따른다.
게다가 교주는 곤룡포까지 입는다. 이는 교주가 천하에서 가장 존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황궁의 입장에서 볼 때, 천마신교는 언제고 제국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애초에 마도천하(魔道天下)를 꿈꾼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하지만 그건 정파와 사파도 마찬가지. 그들은 대놓고 천하일통을 원하진 않지만, 제국이 보기에 정사마(正邪魔)를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지. 다 똑같은 놈들일 테니.’
문제는 정파를 대표하던 담사영과 사파의 대표인 송금백이 황궁과 손을 잡은 것에 있다.
만일 이천상이라는 재앙을 보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황궁과 연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손은 잡아도 제국의 부활이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을 앞세우진 못했을 것이다.
‘사부님.’
문득 이천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교주는 너다.
교주란 곧, 마인들이 믿고 따르는 단 하나의 빛.
교주란 곧, 마인들이 원하는 것을 현실로 이뤄 낼 수 있는 위대한 존재.
그래서 교주는 신(神)이다. 그리고 마인들이 원하는 것은 천마신교가 천하를 손아귀에 넣는 것, 즉 마도천하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과거, 이천상이 담사영과 송금백을 앞에 두고 한 대화 중 일부가 떠올랐다. 그 대화를 함께 들은 건 아니지만 욕계문을 통해 들어온 이천상의 마음이 떠올랐다.
- 미래의 천마는 광기의 학살자가 아닌, 법도를 갖춘 패왕이 될 테니까.
- 이 중원이라는 땅, 강호라는 세상에서 무림을 떼어 내라는 것이다.
아마 이천상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라는 재앙이 세상에 떨어지면, 담사영과 송금백은 어떻게든 황궁과 손을 잡게 되리란 것을.
다만 그 스스로 의천맹과 동패구사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는 그 이상의 재앙을 보여 줄 작정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이천상은, 강호라는 세상에서 무림을 떼어 내라는 말을 통해 오히려 그들과 황궁을 하나로 묶을 실마리를 던져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차피 의천맹과 철혈성을 날려 버려 봤자 황궁이 건재하다면 천마신교의 마도천하는 절대 불가능할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제자가 황궁까지 상대할 만한 능력이 있는 자라는 것을 전제로 한 선택이었다.
‘정말이지 너무 큰 짐을 얹어 주고 가셨습니다.’
말하자면 담사영과 송금백은 이천상의 의도대로 움직인 셈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기대에 부응은 하겠습니다만, 저는 저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법도를 갖춘 패왕이라, 정말 멋진 말이야.”
그가 마동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나?”
느닷없이 이게 무슨 말인가 싶던 마동필은 그저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서량이 관평에게로 눈을 돌렸다. 뇌화로 번뜩이는 절대마안을 마주하고도 관평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참이나 서량을 보던 관평이 이내 눈을 감았다. 이제 죽을 때가 왔음을 직감한 것이다.
“반년이 지났음에도 극마에 오르지 못했군.”
“내가 모자랐을 뿐, 누굴 탓하겠소. 오늘 내가 도달하지 못한 경지의 끝을 보았으니 더는 여한이 없소.”
“그러면 안 되지.”
“……?!”
“여한이 없으면 안 되지. 그렇게 편안하게 죽어서야 자네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너무 억울해하지 않겠나?”
관평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언급하여 내 마음을 경동케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전에 동필이가 그러더군. 네놈이 싫다고.”
관평이 마동필을 바라보았다.
마동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실제로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를 알고 싶나? 동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네놈은 격을 상실했다고.”
“……?!”
“무림에 발을 들인 이상, 그것도 무림에서 가장 호전적이라는 마도에 발을 들인 이상 죽음의 위기는 언제라도 겪을 수 있는 법. 그러나 네놈은 적을 죽인 게 아니야. 네놈의 피와 살을 채우기 위해 아무런 원한도 없는 수하들을 죽인 것이지. 즉, 네놈은 사냥감을 농락하면서 죽인 것이다.”
관평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서량의 안광이 점차 진해졌다.
“나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타인을 죽인다……. 나는 그것을 책잡고 싶지 않다. 격이 없다는 것은 동필이의 생각일 뿐, 내 생각은 아니니까. 그러나 네놈의 죄가 편하게 죽어도 될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래서…….”
관평의 눈이 충혈되었다.
“내가 그들에게 사과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사과 따위 그들도 원하지 않을 것 같군. 네놈이 진심으로 그것을 후회했다면,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내게 부탁을 했겠지.”
할 말 없게 만드는 언변이었다.
날카로운 비수로 후벼파는 듯한 어조다. 관평은 이를 악물었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마음이 크게 뒤흔들렸다.
“너는 이제야 너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무공의 성장 이상의 성과라고 할 만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네놈을 편하게 죽여 줘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
“나를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오? 아니면 날 농락하려고 하는 것이오? 무엇이든 상관없지만 난 이 약속의 중함을 모르지 않소. 죽이려거든 어서 죽이시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배포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진즉 그렇게 살지 그랬나.”
관평은 눈을 감아 버렸다. 어서 죽여 달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서량이 말했다.
“조금 전, 내가 검궁주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나?”
“……?”
“패자는 죽음을 구걸할 자격도 없는 법이다.”
“……!”
“하긴, 너와 난 약속을 했으니 승패를 입에 올릴 필요는 없겠지. 그러니 묻겠다.”
훅.
어느새 서량이 관평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았다.
“너, 죽고 싶냐?”
관평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량은 볼 수 있었다. 그의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오른 것을.
“그래, 죽고 싶진 않은 모양이군.”
기어이 관평이 다시 눈을 떴다.
“사람으로 태어나 죽고 싶어 하는 자가 얼마나 있겠소? 나는 그저 당신과 약속을 했고, 그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였을 뿐이오.”
“알지.”
“약속을 이행하시오. 당신은 천마요. 천마의 약속은 천금보다 비싸고 바위보다 무겁소. 스스로의 격을 떨어트리지 마시오.”
서량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참으로 멋들어진 눈웃음이지만, 그것을 본 관평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무섭나?”
“……!”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한스러운 일을 시킬까 두려운가?”
“……그렇소.”
솔직한 인정이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를 죽이지 않겠다.”
“스스로 한 약속을 어길 셈이오? 당신은……!”
“천마지.”
“그렇소. 그러니 약속을 지키시오!”
“천마는 갈 수 없는 곳도,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없다. 천마는 한계 짓지 않는 자이며, 그 선이 도덕이든 양심이든 법이든, 무엇이라도 넘나들 수 있는 존재이니라.”
서량의 손이 관평의 어깨를 잡았다.
관평의 몸이 움찔했다. 동시에 그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하필이면 자네는, 그 위험천만한 천마가 다스리는 곳에서 마공까지 익힌 사람이구먼?”
“……!!”
“하물며 그 몸뚱이 안에는 사령단으로도 모자라 천마신단에, 본교의 십대마공까지 꽉꽉 들어차 있군. 어이쿠! 이런 아까운 보물을 약속 때문에 당장 죽여 버리는 것은 손해지.”
“내,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
서량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이제 관평의 얼굴은 완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굳이 사령수가 아니더라도, 상상을 초월하는 농도의 군림마황기가 그의 정신을 무서운 속도로 잠식해 가고 있는 것이다.
“네놈은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
“네놈의 몇 푼 안 되는 목숨 말고, 수많은 영약과 무공 서적을 퍼부은 빚을 어떤 식으로 갚아 줄 수 있겠나?”
우우우우웅.
서량의 손을 통해 흘러 들어간 군림마황기가 순식간에 관평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관평의 입에서 헉!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네놈의 죽음을 조금 더 가치 있게 꾸며 보는 것은 어때?”
* * *
“으음.”
적송이 눈을 떴다.
요 며칠 새에 홀쭉해진 그의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안쓰러움을 불러일으켰다.
“여긴……?”
그때, 한옆에서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드십니까?”
적송이 시선을 돌렸다.
목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느릿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병자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
“자네는?”
“호요성이라 합니다.”
다리를 꼬고 앉은 호요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본교의 총군사 직책을 맡고 있지요.”
적송의 눈이 깊어졌다.
“말랐군.”
“예?”
“얼굴이 몹시 피곤해 보여. 근래 고생이 많았던 모양일세.”
“하하! 노선배만 하겠습니까.”
“그렇게 끔찍한가?”
“목내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간 많이 무리하셨던 듯합니다.”
적송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겁고 깊은 한숨이었다. 사기(死氣)가 묻어 나오는 숨결은 곁에 있는 사람의 기분마저도 가라앉게 만들었다.
“며칠이나 지났나?”
“닷새입니다.”
“닷새…… 닷새라…….”
“의원 말로는, 길게 봐도 석 달을 넘기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이제 막 의식을 차린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송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훨씬 길구먼.”
“그렇지요. 어쩌면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부터 기력이 급격하게 좋아졌다고 하더군요. 해서 직접 뵐 겸 찾아왔습니다.”
“말코는?”
“아직 독실에 누워 계십니다. 그쪽 역시 서서히 기력이 차오른다고 하는 걸 보니, 오늘 밤이나 내일 중으로 정신을 차리실 것 같습니다.”
“다행일세.”
“다행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수명도 노선배와 비슷하게 남았다고 하니까요.”
“허허, 갈 때가 한참이나 지나 버린 늙은이들에게 석 달이란 시간은 삼십 년만큼이나 길다네.”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적송이 양팔에 힘을 주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상체 곳곳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제는 홀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호요성은 말없이 적송을 부축했다. 그는 굳이 상대에게 누워 있으란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맙네.”
“별말씀을.”
적송이 호요성을 보며 웃었다.
“마인답지 않게 눈빛이 무척이나 맑구먼.”
“마인이라고 다 눈에 살기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건 아닙니다. 아실 텐데요?”
“그렇지. 하지만 신교를 움직이는 비정한 손인 자네만큼은 악의로 가득 찬 사람일 거라 생각했었네.”
“기대에 부응해 드리지 못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사람 참.”
호요성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반정회는 진정 끝장이 나 버린 겁니까?”
적송은 눈을 감았다.
막 정신을 차린 사람에게 이런 질문은 실례 이전에 위험하다. 자칫 정신이 혼탁해져 몸에 무리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송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호요성에겐 삼십 년만큼이나 긴 시간이라고 했지만, 석 달은 석 달일 뿐이다. 이왕이면 그 안에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많이 하고 가는 것이 좋았다.
“나를 부축해 줄 수 있겠나?”
“교주님께 안내해 드리리까?”
“그래 주었으면 좋겠네.”
호요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업히십시오.”
적송이 눈을 끔뻑였다.
“업……혀?”
“가는 길에 저랑 말동무나 되어 주십시오.”
“……허허, 허허허!”
적송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네, 그렇게 하세나. 마인의 등에 업히다니, 살다 보니 참 별일도 다 있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반쯤 부처가 된 수도승을 업는다니, 살아생전 이런 짓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하면, 실례하겠네.”
적송을 업은 호요성의 얼굴에 작은 안타까움이 어렸다.
‘가볍군.’
무림을 이끌어 온 일대 거인의 무게가 이리도 가벼울 줄이야.
호요성이 경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교주님께 가십시다!”
“허허, 그러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