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시대의 선택 (5)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나?”
“아닌 것 같은데요.”
“맞는 것 같은데? 본교의 총군사가 대적 중의 대적이라는 정파인, 그것도 최고 어른인 적송대사를 업고 있는 광경이 어떻게 진짜겠어? 이거 환술 아냐?”
“아니거든요.”
“설마 역용술? 너 총군사 아니지?”
“아니라고요, 진짜.”
서량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적송이 무안한 듯 말했다.
“업히라고 하더군.”
호요성이 씨익 웃었다.
“덕분에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요.”
“총군사는 오늘부터 잠 더 줄여.”
“으아악!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양반 업고 온 거 보니까 체력이 쌩쌩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것 같잖아. 그 정도 체력이 남아 있는 거 보니 일 더 해도 되겠어.”
농담 몇 마디로 호요성의 체력을 한계까지 깎아 버린 서량이 의자 하나를 뺐다.
“앉으시구랴.”
“허허, 고맙네.”
적송이 호요성을 힐끔거렸다.
호요성은 입을 떡 벌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어느 경극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과 기가 막히게 닮아 절로 웃음이 나올 듯했다.
서량이 발로 호요성을 툭툭 건드렸다.
“저리 가. 볼일 다 봤잖아.”
“다 안 봤습니다!”
“그럼 차라도 한 잔 타 와! 머저리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호요성이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참나, 그래도 내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자인데 이게 대체 뭔…….”
“대가리를 그냥 확.”
“아, 갑니다. 간다니까요.”
후다닥 뛰어가는 호요성을 보던 적송이 고개를 저었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구먼.”
“뭐가 말이오?”
“이게 정녕 교주와 총군사의 대화가 맞나?”
“그럼 바보와 머저리의 대화 같소?”
“허허허.”
적송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마인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다. 그도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교주와 총군사의 사이가 이렇게나 격의 없을 줄은 몰랐다. 호요성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아무리 격의가 없어도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력자에게 차를 타 오라 시키지는 않는다.
“자네는 정말 여러모로 스승과는 다른 모양일세.”
서량이 피식 웃었다.
“내 스승처럼 살려면 내가 먼저 죽소. 누구도 그분의 삶을 따라 할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나?”
“당연하지.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누구도 나와 비슷하게 살 수는 없소.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방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오.”
적송이 허허 웃었다.
“자네가 통치하는 세대의 신교는 참으로 유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군.”
“인간들 머리가 죄 굳어서 그럴지 의문이외다. 하나씩 뜯어고치고는 있소만.”
“좋네. 참으로 좋아 보이는구먼.”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사담(私談)이나 나누려고 온 게 아님을 알고 있소. 이만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다 죽어 가는 사람한테 너무하는구먼.”
“노선배가 그것을 원하는 걸 알고 있소.”
적송이 미소를 지었다.
지니고 있던 파천(破天)의 힘을 잃어 가고 있어서일까? 그의 미소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처연함과 인자함을 담고 있었다. 무언가 달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딱히 대단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었네. 그저 눈을 뜨니 문득 자네가 보고 싶더군. 자네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었어.”
“그것참, 실망스러운 말이외다.”
“허허, 그런가?”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오. 나야 영광이지.”
잠시 후, 호요성이 차를 타 왔다.
향을 맡은 서량이 찻잔을 창가에 내려놓았다.
호요성이 눈을 끔뻑였다.
“왜 그러십니까?”
“향이 이상해. 식혀서 먹는 게 낫겠어.”
“이익!”
“주먹에 힘 들어가네? 이제는 그냥 맞먹지? 응?”
“손바닥이 간지러워서요. 손톱을 안 깎아서 긁기 좋거든요.”
호요성이 보란 듯 손을 들어 보였다.
“보세요, 이렇게 기다란 손톱으로…….”
“때 꼈다. 치워.”
“잠잘 시간도 부족하니 손톱 하나 제때 못 깎는다고요.”
“자기 전에 손톱 깎고 자. 명령이야.”
“……예.”
적송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호요성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닷새 만에 일어나셨는데 너무 뜨거운 건 몸에 안 좋을 것 같아서요. 적당히 미지근하게 만든다고 했는데, 어떻습니까?”
“아주 좋네. 고맙구먼.”
“하하, 역시 노선배께서 뭘 아십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적송은 조금 흐려진 눈으로 서량과 호요성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서로를 향해 마구 불평을 터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맑은 눈빛이,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흐르는 분위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좋은 군신(君臣) 관계로다.’
지나치게 격의가 없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이러한 관계가 둘에게는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친구처럼 편안한 군신지간. 말은 쉽지만 실제로 그리 행하기는 어려운 법이지. 아마 이 두 사람이 작정하고 일을 저지를 땐, 그 어떤 조직보다 빠른 일 처리를 보여 줄 것이다.’
또한 적송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평소 대화는 이 정도로 밝고 가볍진 않을 것임을.
‘나를 위해 주고 있는가.’
그렇다. 서량과 호요성이 이런 유쾌한 대화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적송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딱딱하고 격식 있는 분위기보다, 밝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그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 배려 아닌 배려가 적송은 크게 고마웠다.
“그나저나 친구분은 어떻소?”
적송이 입을 열기 전에 호요성이 대답했다.
“이르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중으로는 정신을 차릴 거라고 합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대단들 하시군.”
신에 이른 무력의 소유자들이라고는 하나, 두 사람의 나이는 세수 백을 헤아린다. 강성한 기가 육신을 지탱해 주고 있다지만 그 정도로 다치면 회복이 어렵다. 게다가 끌어 올릴 내공조차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두 분에 대해 깊게는 모르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
“허허, 죽을 때가 지나도록 살아왔거늘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
“하면 미련이 남으셨기에 벌써 일어나셨소? 단순히 나와 대화를 나누기 위함은 아닌 걸 알고 있소만.”
자칫 상대에 대한 무례가 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역시나 적송은 그 말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며 호 군사와는 가볍게 얘기를 나누었네.”
“어떤?”
“반정회가 무너졌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모를 수가 없지.”
“하나 이건 모를 걸세. 나와 현천 그 친구가 파문당했다는 것을.”
서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문?!”
“그렇다네.”
문파에서 파문을 당했다 함은 호적에서 파내졌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적송의 경우 소림사의 승적에서 지워졌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무인들에게 있어 파문은 목숨을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위였다. 아니, 차라리 목숨을 끊고 말지 파문만큼은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 미덕일 정도였다.
한데 파문을 당했단다. 그것도 적송과 현천이.
이 두 사람이 누구이던가. 정파 최강의 무인으로서 각기 권신(拳神)과 검신(劍神)으로 불리는 무적의 무인들이었다.
정무쌍신(正武雙神)의 아성을 구축한 정파 최고 어른들이 파문을 당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정확히는, 우리가 요청한 파문이었다네.”
“왜 그러셨소?”
“황궁에서 압력이 들어왔기 때문이지.”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황궁의 외압으로 반정회가 해체되었다는 건 알고 있소.”
“호 군사에게 들었네. 이미 짐작하고 있었더군.”
적송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에선 단순히 반정회를 해체하라고 한 것이 아니었네. 정확히는, 반정회의 무인들을 황궁의 군(軍)으로 귀속시키라는 명이 떨어졌다네.”
“……!”
“즉, 소림과 무당은 물론 그를 따르는 모든 문파를 황궁에서 장악하겠다는 뜻이네.”
“황궁 소속의 군이라?”
“그렇다네.”
조금 전의 밝은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적송의 얼굴에 짙은 수심이 깃들었다.
“중원 최남단에까지 소식이 들리지는 않았을 걸세. 워낙에 은밀하기도 했으니까.”
“그렇다고 한들 이리 빨리 반정회를 해체한 것은 분명 의아한 부분이오. 혹, 그들에게 협박이라도 받았소?”
적송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짐작하고 있었나?”
“짐작하고 자시고 할 게 무엇이 있소? 소림과 무당은 힘이 아닌 협의와 명분으로 싸우는 문파였소. 그런 문파가 이끄는 반정회를 해체할 수 있는 것은 황궁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기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지.”
서량이 식은 차를 마셨다.
“한데 하필 이 시국에 반정회가 해체됐다……. 제아무리 황궁이라도 뒤를 받쳐 줄 만한 세력이 있지 않다면 언감생심 그런 시도를 하지는 못할 것이오. 자칫 반정회에게 역공을 당하면 얼마 남지 않는 황궁의 주춧돌마저 날아가게 될 테니까.”
“우리는 그런…….”
“반정회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황궁이 그렇게 생각할 거란 뜻이오.”
“…….”
“즉, 이미 황궁은 누구 못지않은 힘을 구축하고 있음이 분명하오. 하기야, 담사영과 송금백이 황궁과 손을 잡았으니 든든하기도 했겠지.”
서량이 눈을 빛냈다.
“그래서 파문을 요청한 것 아니오?”
“……그렇다네.”
적송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혜안은 참으로 깊구먼. 맞네. 우리 역시 황궁의 뒤에 전(前) 맹주와 철혈성주가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네. 그래서 황궁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지. 결국 우리의 힘이 그들의 힘이 될 테니까 말일세.”
“이해하오.”
“그렇다고 계속 버티고 서 있기에는 명분이 없었네. 정파의 구심점이 된다? 기실, 그것은 황궁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네.”
“그렇겠지. 결국 다 같은 제국의 신민들이니까.”
“과거 황궁은 무림을 신경 쓰지 않았다네. 정확히는 못 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제아무리 황궁이라도 무림을 적으로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소.”
“하지만 담사영과 송금백이라는, 정파와 사파를 대표하는 무림인들이 황궁과 군신지약(君臣之約)을 맺은 지금은 다르다네. 황궁은 이렇게 말했네. 반정회를 해체하지 않으면, 우리가 천하에 역도임을 선포할 것이라고.”
푸스스.
서량이 쥔 찻잔의 차가 모조리 기화해 버렸다.
“역도, 역적이라…….”
“그렇다네. 역적,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죽음 이전에 우리가 받아 낼 오욕이 무서운 것이라네. 욕을 먹어도 우리는 우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함이 옳지만, 황궁에서 그리 나오니 우리로서도 방법이 없었다네.”
“그렇구먼.”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네. 바로 해체한 반정회의 황군화(化)일세.”
“그럼 파문이?”
적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정회를 조직한 이가 우리 둘이라고 공표했네. 책임자 둘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우리의 명성이 보통은 아니지 않나. 죄인을 세상에 낸 문파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소림과 무당은 십 년 봉문(封門)에 들어갔다네.”
“그것으로 반정회가 황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군.”
“그렇다네.”
강호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두 어른을 파문하고 스스로 봉문에 들어간 문파들.
파문을 택한 쌍신이나, 사문의 존장을 쫓아낸 소림과 무당이나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즉, 이제 정파에는 황궁을 막을 어떠한 수단도 없다는 얘기로구먼.”
“그래서 자네를 찾아온 것일세.”
적송이 크게 숨을 들이쉬곤 말했다.
“우리의 얼마 안 되는 명성을, 자네들이 이용해 주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