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시대의 선택 (6)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정무쌍신을 구하러 간 순간, 이미 호요성은 그에 대한 계책을 내놓은 상태였다. 애초에 호요성은 이 둘의 의사를 물을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먼저 부탁해 오니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제아무리 무신경한 서량이라도 쌍신의 이름값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호요성은 참 과격한 군사였다. 어떤 의미로는 서량보다도 더 막 나가는 면이 있었다.
서량은 모른 척 대화를 이어 나갔다.
“두 분의 명성을 이용해서 저들을 상대하라는 것이오?”
“그렇다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진 않을 텐데?”
“물론이네. 나와 말코 두 사람은 물론 자네들까지 역적이 된다는 뜻이지.”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는 이미 역적이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신불(神佛)을 모시는 수도자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오만, 본교처럼 교주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 단체는 황궁에게 있어서 눈엣가시나 다름이 없소이다.”
적송의 눈이 흔들렸다.
황궁이라는 존재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기 때문일까? 생각해 보니 분명 그렇게 볼 수 있었다.
“즉, 황궁이 세상에 날 때부터 우리는 그들을 겨냥하고 있었단 말이오. 호 군사는 반년 전부터 황궁을 상대할 온갖 계책들을 준비해 두고 있었소.”
적송이 놀라서 호요성을 바라보았다.
호요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죽어 줄 수는 없잖습니까? 설령 본교를 떠난다 하더라도 그들이 믿어 줄지 의문이고요.”
“말하는 본새 좀 봐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얘기로 돌아와서, 두 분의 명성을 이용하라는 말은 황궁을 견제해 달라는 뜻이겠지.”
“틀렸네.”
“……엥? 그럼 뭐요?”
“황궁 뒤에서 암약하고 있는 담 맹주와 송 성주, 두 사람의 민낯을 벗겨 내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지.”
서량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요구라는 것, 알고 계시겠지?”
“알고 있네.”
“고작 두 분의 명성에 힘입은 정도로는 그 얌체 같은 놈들만 골라서 밟아 버릴 순 없소이다.”
“그 또한 알고 있네.”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이오? 우리더러 함께 죽자는 것이오?”
“사실…….”
적송이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입술이 조금씩 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사실 나도 모르겠네. 마음 깊이 그 이상을 원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하지 않소. 이미 소림과 무당이 봉문을 택한 시점에서 과한 생각이 아니외다.”
“하지만 그리되면 진짜로 역적이 되네.”
“세상에 가짜 역적도 있소? 이미 그들 눈에 우리는 역적이오.”
“…….”
“먼저 우리를 궁지로 몬 것은 그네들이오. 싸움은 무조건 벌어지게 되어 있소이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둘 중 하나요. 역적이 되어 그놈들과 맞서든, 지금이라도 그놈들 가랑이 밑으로 기어 들어가 병신 같은 삶을 영위하든.”
“…….”
“하나만 택하시오. 부처가 되는 것도 포기하고 손에 피를 묻힌 양반이 지금에야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썩 좋아 보이진 않는구려.”
“피를 묻힌 적은 없다네.”
“잉?”
적송이 씁쓸하게 말했다.
“이곳까지 오며, 단 한 번도 살수를 자행한 적이 없었지.”
서량은 기가 막혔다.
“당장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살수를 배제했다고? 제정신이오?”
“어쩌겠나? 나는 그런 사람인가 보이. 나는 나를 죽이러 오는 적도들의 눈에서 공포와 경외를 보았네. 그들은 내 손에 당할까 봐 매 순간 공포에 떨고 있었어. 그 눈을 보니, 도저히 살수를 쓸 수가 없었다네.”
뭐가 어찌 되었든, 정말이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자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신념과 천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몇 되지 않는다.
신교를 운영하기 전의 서량이었다면, 우유부단하기 그지없는 짓이었다고 적송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서량은 적송을 비웃을 수 없었다.
‘……사부님.’
적송의 모습에서 이천상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는 그 순간까지 쉼 없이 달려온 마도 역사상 최고의 거인이.
세운 신념이 다르고 천성이 다르며 욕망이 달랐을 뿐, 적송과 이천상은 무척이나 흡사한 데가 있었다. 그리고 서량은 그와 같은 신념을 세우며 살아온 자를 비웃을 수가 없었다.
“후우.”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노선배의 행동이 답답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선배의 판단을 존중하오.”
“고맙네.”
“말이 길어졌소. 이만 들어가서 쉬시구려. 다음 얘기는 내일 이어 가도록 합시다.”
“그러도록 하세. 그렇지 않아도 점점 숨이 가빠 오는군.”
호요성이 일어서는 적송을 부축했다.
몸을 돌려 걸어가는 그를 보며 서량이 말했다.
“노선배.”
적송이 뒤를 돌아보았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편히 쉬시오.”
적송이 마주 웃었다.
“고맙네.”
그렇게 호요성과 적송이 대전을 나섰다.
이각 후.
호요성이 다시 대전으로 들어왔다.
“어라? 술 드십니까?”
“그냥 적적해서.”
“저도 한잔할까요?”
“자넨 일해야 되잖아?”
“…….”
“알았어, 한잔해.”
“껄껄.”
“그렇게 웃지 마. 네가 윗사람 같잖아.”
“이제는 웃는 것 갖고도 뭐라고 하시네.”
“대가리를 그냥.”
“아, 알겠다고요.”
잔을 받은 호요성이 냉큼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캬! 이게 얼마 만에 술이냐. 아주 그냥 달달하네요.”
“그간 고생했어. 조금만 더 고생하자고.”
“조금만 더라니요? 평생 숙원이 될지도 모르는데요. 일생을 바쳐서 고생해야지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총군사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네.”
호요성이 마주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농담과 진심을 오가는 대화였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는 듣기가 아주 좋았다.
“어디까지 진행됐어?”
“제가 신교제일의 천재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가끔은 교주님의 말씀을 따라잡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정무쌍신.”
“아! 그것 말이군요. 당연히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시기만 잡으면 됩니다.”
“그렇구먼.”
서량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자연스레 앞섶이 벌어지면서 방만한 자태가 되었다.
호요성이 눈에 아련함이 깃들었다.
“전대 교주님 같으십니다.”
“엉? 뭐가?”
“지금 교주님 모습이요. 마치 전대 교주님을 뵙는 듯합니다.”
서량이 쓰게 웃었다.
“고약한 양반이지. 짐을 좀 적당히 던져 주고 갈 것이지, 이건 뭐 감당하기 너무 벅차잖아, 빌어먹을.”
“그래도 닮았다는 소리 들으니까 기분은 좋으시죠?”
“나쁠 이유가 있나. 본교 역사상 최고의 교주신데.”
“하하하.”
주거니 받거니 잔 비우기를 반복하길 이각여.
불콰하게 달아오른 호요성의 얼굴과는 달리 서량의 얼굴은 여전히 제 색이었다.
“총군사.”
“예, 교주님.”
“지금 우리가 하려는 짓, 정파와 사파는 물론 황궁까지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거잖아?”
“집어삼킨다기보다는, 그냥 밀어내는 것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뭐, 그게 그거지만 말입니다.”
“정말 그런 세상이 오면, 중원 무림은 어떻게 돌아가게 될까?”
“반역과 민란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 되겠지요. 그러니 미리미리 그것을 막을 계책과 체제를 정립해 둬야 하고요.”
“반역…… 반역이라…….”
서량이 피식 웃었다.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놈들이 저 위에 있는데, 역으로 우리가 밀고 올라가는 형국이로군.”
“교주님께서 원하시는 마도천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저 역시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진심입니다.”
호요성이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교주를 향해 당당하게 잔을 내민다. 평소 아무리 취해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였다.
“그러니 마음의 거리낌은 이만 훌훌 털어 버리시고, 교주님답게 화려하게 달려 보십시오. 뒤는 제가 든든하게 받쳐 드리겠습니다.”
서량이 웃으며 마주 잔을 들어 올렸다.
“제대로 받쳐 줘야 하네.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을 거거든.”
“그 정도 작정은 하고 하는 말입니다.”
“하하!”
째앵!
두 사내가 부딪친 잔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시원하게 잔을 비워 낸 서량이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 저녁부터 슬슬 땔감 좀 넣지?”
“그리 말하실 것 같아서 오기 전에 군사부 애들한테 언질을 넣어 두었습니다.”
“천하의 명군사야. 어찌 이리 주군 마음을 잘 아누.”
“그러니까 중간중간 헛짓거리를 하더라도 좀 봐주십시오. 요새 너무 피곤해서 슬슬 실수가 늘고 있으니까요.”
서량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하하!”
“그래도 실수하지 마라.”
“……예.”
“어디서 건배를, 확.”
“흥에 취해서 그랬습니다. 좀 넘어가 주세요.”
“됐네. 잔이나 받아, 이 사람아.”
“헤헤.”
* * *
“정신을 차렸는가?”
“……목이 마르군.”
“잘 달인 약수(藥水)일세. 천천히 목을 축이시게.”
현천진인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약수를 마셨다.
“여기는……?”
“혈혼각이라고, 천마신교 최고의 의방이라 하네.”
“독실이군. 이렇게 신경 써 주기 쉽지 않았을 터인데.”
“그러게나 말일세. 안 그래도 오늘 낮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네.”
“벌써? 자네 몸도 성치 않았을 터인데.”
“어쩌겠나. 그것을 위해 목숨 걸고 달려왔거늘.”
현천진인은 서량과의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묻지 않았다.
다만 하나를 물었다.
“어떻던가?”
“커졌더구먼.”
“커져?”
적송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십만대산의 밤은 북방의 밤과는 조금 달랐다. 후덥지근한 날씨지만 산세를 타고 흐르는 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방 안에는 제습(除濕)에 특효인 정구포를 놓아서 적당히 건조했다.
“사람이 커졌어. 예전에 봤을 때와는 달라. 무공만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크게 성장했음을 보았다네.”
“허허, 사람 평가에 박한 사람이 유독 후한 점수를 주는구먼. 죽을 때가 다 돼서 그런가?”
“그러게나 말일세. 어쩌면 자네 말마따나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이러는지도 모르겠네.”
“농담일세. 상처받았다면 미안하네.”
“상처는 무슨. 다만 이런 생각이 드네.”
“무슨 생각?”
“서 교주를 처음 봤을 때와 두 번째로 봤을 때의 격차는 상당했네. 그때는 오히려 위태로워 보였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았어. 하기야 스승이 죽고 느닷없이 교주직을 떠안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
“오늘 만나고서야 알았네. 서 교주는 마신(魔神)이 아닌 패왕(覇王)의 길을 걸으려고 하네.”
“그 말은?”
“그렇다네. 그는 중원 무림의 공포로 군림하려는 게 아니라, 천하에 적수가 없는 절대권력의 패왕이 되려 하고 있다네.”
현천진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더 심각하지 않은가?”
“그렇다네. 그런데 말일세.”
적송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의 머릿속에 서량의 모습이 떠올랐다.
- 편히 쉬시오.
조금 머뭇거리면서 한마디를 뱉는 그 모습.
적송은 그런 서량의 모습에서 미안함이 아닌 애달픔을 느꼈다. 얼마 안 되는 인연이지만, 그래도 몇 번 만난 땡중이 죽어 가는 현실에 큰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서 교주는 인간임을 놓지 않았네. 총군사와 대화하는 것을 보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격의가 없었지. 하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법도와 규율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네.”
“음…….”
“법도를 갖춘 패왕이라……. 그런 사람이라면, 한 세대 정도는 그이에게 세상을 맡겨 봐도 괜찮지 않겠는가?”
적송이 눈을 감았다.
“시대가 그를 선택했다면, 그 운명의 흐름에 모른 척 쓸려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