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황궁풍운 (3)
“음…… 자네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노친네들 정도로 생각하고 있소.”
“…….”
“그래서 싫소?”
“싫은 건 아니지만…….”
현천진인이 적송을 힐끔거렸다.
적송은 연신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현기(玄機)가 묻어 나오는 웃음소리 너머에 숨길 수 없는 당혹이 어려 있었다.
서량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림과 무당의 진신절학을 알려 달라는 것도 아니잖소.”
“물론 그렇기는 한데…….”
“나야 작게 보면 마교주고, 크게 봐도 상종 못 할 마귀 놈이지만 이 아이는 다르잖소. 어차피 같은 중생이요, 도동(道童) 아니겠소.”
설마 천마신교 교주란 작자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서량이 주서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좀 답답한 녀석이기는 해도 구제불능은 아니오. 이 녀석, 이대로 가다가는 인생 망칠 수도 있소.”
“그거야…… 안타까운 일이긴 한데…….”
“장담하는데, 이 친구가 천하에 분란을 일으키거나 마녀 소리 들을 일은 없을 거요. 뭐, 가르치다 보면 알겠지만 말이오.”
적송이 입맛을 다셨다.
“해서, 이 여아의 마음에 깃든 미망과 번뇌를 벗겨 달라?”
“그렇게 거창한 것까지는 아니고.”
“그게 그거 아닌가.”
“그래서 싫소?”
현천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싫을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우리는 자파에서 파문당했을지언정 여전히 승려이고, 도사일세. 죽는 그 날까지 지금껏 살아왔던 대로 살아갈 걸세.”
“그러니까 말이오.”
“다만, 우리가 사문의 존장으로 남았을 때도 자파의 무공이나 깨달음을 타인에게 전하긴 어렵네. 그 대상이 천마신교의 마인이라면 더더욱.”
“말했듯, 소림과 무당의 무공을 전수해 달란 것은 아니오.”
“알 만한 사람이 자꾸 이러긴가? 깨달음을 주는 것이란 곧 그 사람의 문무(文武)를 전하는 것과 다르지 않네.”
“그렇게 보자면 나도 두 분의 무공을 빼앗은 셈이 되오. 두 분 역시 내게서 마공에 관한 깨달음을 강탈해 가기도 했잖소.”
현천진인은 할 말을 잊었다. 서량의 말이 옳기 때문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서량은 하루가 멀다고 혈혼각에 들러 두 사람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물론 단순한 대화는 아니었다. 천하 정세에 관한 얘기가 그중 절반 이상이었으니까.
그러나 세 사람은 무인이었다. 특히나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자연스레 무공에 관한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서량은 제법 깊은 깨달음을 얻었고, 그것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정 그러면, 교주께서 직접 미망을 벗겨 내 주지 그러나?”
“진심이오? 나 할 일 많소이다.”
“허허.”
“그리고, 그런 쪽으로는 나보다 두 분이 더 전문이지 않소.”
결국 여기까지 왔다.
더 얘기를 이어 나가 봤자 돌고 도는 내용일 뿐이다. 적송과 현천진인은 선택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현천진인이 물었다.
“하나 묻겠네. 우리가 이 여아를 맡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셈인가?”
“뭘 어쩌겠소? 내가 옆에 끼고 다녀야지.”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내가 무척 바쁘다오. 두 분도 내가 이번 일에서 실수하는 걸 원하지는 않을 거요.”
“글쎄? 이모저모 뜯어봐도 자네가 실수할 거라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군.”
“그래서 할 거요, 말 거요?”
현천진인이 한숨을 쉬었다.
“수발들어 줄 손녀라고 생각하겠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손녀라고 생각하든 시녀라고 생각하든, 부디 잘 대해 주시오.”
“떽! 이유야 어찌 되었든 우리는 신교에 몸을 의탁하고 있네. 교주가 애지중지하는 사람을 시녀 부리듯 하겠는가.”
“시녀를 부리긴 하나 보네.”
“말이 그렇다는 걸세.”
확실히 현천진인은 적송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적송보다 더 솔직하고 능글맞다고 할까.
서량이 주서윤에게 말했다.
“앞으로 보름, 두 노친네들한테 배울 수 있는 만큼 배워라. 널 써먹어 주는 건 그다음이니까.”
주서윤은 굳이 신교의 업무를 맡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벗어던지고 싶을 뿐이었다.
다만 이것이 자신에게도, 신교에게도 나은 길이라면 기꺼이 감수하리라.
그리 생각하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저를 어떻게 쓰실 생각이세요?”
서량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주서윤을 보았다.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현천진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본인이 직접 맡아도 될 것 같다니까.”
서량은 현천진인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어디 무인이 수련만으로 강해진다더냐? 네가 원하는 강함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진짜 강함은 홀로 칼만 휘두른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야.”
“……?”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치열함이 필수다. 목숨을 걸어야 한단 뜻이다. 네가 한 그 무식하기 짝이 없는 수련 말고, 진짜 목숨 말이야.”
“……!”
“이왕이면 좋게 생각해라. 너도 강해질 수 있고, 그만큼 본교에도 이득이 되니까. 까놓고 말해서, 이제 직책도 없는데 밥값은 해야 할 거 아니냐?”
주서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렇게 말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서량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름 뒤에 마신궁에 들러라. 변하든 변치 않든, 그때부턴 네 생활도 많이 달라질 테니까.”
“네.”
서량이 적송과 현천진인에게 포권을 취했다.
“잘 부탁드리겠소.”
두 사람은 서량의 인사를 감히 가볍게 여기지 못했다.
“걱정하지 말게.”
“그럼.”
그렇게 서량이 혈혼각을 나섰다.
“…….”
세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어렸다.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던 적송이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현천진인이 입맛을 다셨다.
“망할 늙은이.”
그가 주서윤을 바라보았다.
주서윤은 투명한 눈으로 현천진인을 보고 있었다.
‘맑구먼.’
눈빛이 참 맑다. 아니, 맑다기보다는 뭐가 많이 없다.
하지만 괜찮다. 공백이 많을수록 그려 넣을 수 있는 그림도 많아지는 거니까.
“얘야.”
“네.”
“바둑 둘 줄 아느냐?”
“네? 아, 아니요.”
“못 둔다고? 허! 이거 기본이 안 됐구먼.”
현천진인이 진지한 얼굴로 침상 밑의 바둑판을 꺼내 들었다.
“바둑판 안에 세상이 있느니라. 내 그걸 가르쳐 주마.”
“…….”
“뭐 해? 앉아.”
“아, 네.”
* * *
“허억! 허억!”
“괜찮소?”
“괘, 괜찮소.”
괜찮다고 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여강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깊은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마동필이 품에서 단약 하나를 꺼냈다.
“드시오.”
“이게 뭐요?”
“천음단(天陰丹)이오. 교주님께서 직접 전해 주신.”
여강휘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아도 되나 모르겠소.”
반년 전, 여극도는 여강휘만 남기고 훌쩍 떠나 버렸다.
여극도는 여강휘에게 떠나는 이유조차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 남아 교주 밑에서 크게 성장하라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반년.
그는 고죽림에 홀로 갇혀 수련했다.
고죽림은 천마신교 최고의 비지(秘地)이자 중지(重地)인바, 외인을 함부로 들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여강휘가 처음 신교로 왔을 때야 기온에 적응하라고 고죽림 인근으로 보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말하자면, 동맹은 맺었지만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거대 단체의 후계자에게 천마신교의 모든 것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요성은 물론 마존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서량은 단호했다. 고죽림에서 여강휘가 많은 걸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난 지금.
여강휘는 아직 무(武)의 한계를 초월하지 못했다. 아니, 무공 자체가 예전에 비해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 오히려 퇴보한 것에 가까운 상태였다.
하지만 여강휘의 얼굴에 드리워진 초조함은, 반년 전에 씻어 내지 못한 번뇌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럼 호법 좀 서 주시겠소? 얼마 전에 비유(肥遺)가 나타나서 말이오. 괜히 겁이 나는구려.”
“알겠소.”
천음단을 날름 삼킨 여강휘가 가부좌를 틀었다.
동시에 주변 온도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푸스스스.
수풀 위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여강휘가 앉은 땅은 눈에 띄는 속도로 얼어붙고 있었다.
마동필의 눈이 깊어졌다.
‘이것이 빙백신공(氷魄神功)인가.’
유리잠력대법으로 반으로 쪼개진 무공을 완전히 합일시킨 여강휘는, 여극도를 제외하면 유일무이한 빙백의 주인이었다.
북해빙궁 최고의 절학. 그 수준에 있어서 소림의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과도 견줄 수 있다는 극상승의 무공이었다.
‘굉장한 무공이야. 새외사궁의 수좌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마동필이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그의 손에서 검붉은 화염이 치솟았다.
화르르륵.
타오르는 화염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휘두르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고죽림을 통째로 태워 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구유마화(九幽魔火)였다. 구유마공으로 극마에 이르러야만 쓸 수 있는 수법으로, 단순한 상마진화(上魔眞火)보다도 한층 고차원적인 무도(武道)였다.
극마에 이른 그는 이제 어떠한 마공이라도 어렵지 않게 대성할 수 있을 만한 깨달음을 얻었지만, 구유마화를 피우기 위해선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다.
‘새삼 느끼는구나. 이 마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마동필의 얼굴에 격동이 깃들었다.
‘대체 교주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마공을?’
교주님의 전생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이었다. 설령 자신이 지금의 교주님만큼 강해진다 해도, 이런 마공을 만들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마동필이 주먹을 쥐었다.
동시에 타오르던 마화가 사그라들었다.
‘하늘이 내리신 분이다. 나와는 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도전 의식이 생기는 것을 보면, 자신도 천생 무인은 무인인 모양이었다. 구유마공만큼은 아니더라도, 신교 역사에 족적을 남길 만한 무공 정도는 만들어 보고 싶었다.
“어려울걸?”
“헉!”
극마에 오른 이래, 이렇게 깜짝 놀란 건 처음이었다.
마동필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서량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뒤를 잡혔구먼?”
“교, 교주님?!”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닙니다. 그저…….”
서량이 피식 웃었다.
“됐다. 사람이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마동필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한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놈이 어떻게 사나 싶어서. 보아하니 잘하고 있는 모양이군.”
무공이 퇴보한 걸 한눈에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잘하고 있다고 한다.
마동필은 바로 이런 점이 자신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정작 그는 여강휘의 퇴보에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공이 퇴보했다면, 더욱 이 악물고 몸부림치는 게 옳았다.
여강휘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교주님의 얼굴을 보니, 충분히 괜찮은 모양이었다.
“한창 바쁘실 시간이 아닙니까?”
“어헛? 이제 너까지 나한테 타박이냐?”
“아, 아닙니다! 소신은 그저…….”
“하하, 알아. 그냥 농담한 거다.”
“아, 예.”
마동필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이 둘러봤거든. 군사부, 원로원, 환희원에, 천마군과 육대(六隊)까지 다 둘러보고 왔어. 아직 안 들른 곳이 어딘가 생각해 봤더니, 여기밖에 없더라.”
“…….”
“뭐, 여전하구먼.”
가만히 서량을 보던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다 잘 될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지.”
아마 불안해하시는 건 아닐 것이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교주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서량.
잠깐의 침묵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동필아.”
“예, 교주님.”
“나, 앞으로 백 년은 더 살 거다.”
“…….”
“호위무사는 호위 대상보다 늦게 죽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나보다 딱 반 각 전에만 죽어라.”
너 역시 백 년을 더 살라는 말이었다.
마동필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까지나 교주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그래야지.”
보름 뒤.
사파 최강의 군대, 철왕팔세가 남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