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화. 황궁풍운 (5)
“흐읍! 후!”
크게 심호흡을 한 광마존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처음인가? 우리 모두가 중원에 나서는 것은?”
“그렇소.”
고루마존이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으시오? 우리 교주님 말이오.”
“교주님이신데 당연히 대단하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원로원 늙은이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오. 어찌나 의외인지, 조금은 섭섭하다 싶기도 하오.”
“예끼, 이 사람아. 이게 왜 섭섭한 일인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불태울 전장(戰場)이 아니외까? 감사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다오.”
광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 우리 다음 세대 마인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눈총이나 받을 걸세.”
“왜 그렇소?”
“이번 싸움이 정리되면, 그들은 평화의 세상을 살게 될 걸세. 평화…… 좋기야 하겠다만, 적과 호쾌하게 싸워 볼 기회는 없을 것 아니던가?”
고루마존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그렇소. 마인이 진정 마인다울 때는 싸울 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고 했네. 우리가 쌓아 올린 평화가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바로 다음 대의 마인들만큼은 평화의 세상에서 큰 분란 없이 잘 살아갈 게야.”
“마인도 사람이오. 싸움이 아무리 좋기로서니, 평화만 하겠소? 원주 말마따나 그 평화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누릴 수 있을 때 누리는 것도 복이외다.”
“그 말이 맞네.”
광마존의 눈이 빛났다.
“슬슬 보이는군.”
까마득히 높은 산.
범부의 눈에는 보일 리가 없는 거리를 한눈에 꿰뚫어 보는 두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수백 리 떨어진 평야 너머, 구름을 일으키는 일단의 기병이 보였다.
“너무 멀어서 그런지 기파(氣波)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군.”
“그러게나 말이오.”
“하지만 철왕팔세라 하면 역시나 만만하게 볼 만한 전력은 아니지. 더하여 황궁의 강철 주조술은 중원 정점을 논하기 마련이네. 절정의 무공과 가벼운 강철 갑주, 거기에 진(陣)을 형성해 돌격하는 철왕군의 힘은 필시 대단할 것이야.”
“특히나 저런 평야 지대에서는 지닌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겠지.”
가만히 철왕군을 보던 고루마존의 눈에 일순 아련함이 깃들었다.
“참…….”
“왜 그러시나?”
“옛날 생각이 나서 그렇소. 아니, 옛날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음?”
“교주님께서 소교(小敎)였던 시절, 비요왕(飛妖王)이라는 망할 계집을 때려잡으신 적이 있었소.”
광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참으로 대단하시지. 아마 본교 역대 소교 중, 교주님만큼 화려한 전과(戰果)를 쌓아 올린 분도 달리 없을 걸세.”
“어찌 되었든, 그때 부상이 꽤 크셨더랬소. 그 뒤 함께 북상하며 철혈성의 병력과 의천맹의 병력을 맞아 싸웠었소.”
고루마존의 미소가 짙어졌다.
“비록 다급했던 때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름의 추억이구려. 그때 나는 생각했소. 저놈들이 절대 소교주님께 다가오지 못하도록 모조리 불살라 버리겠다고.”
정말이지 치열한 순간이었다. 고루마존은 이 경지에 오른 이후, 그처럼 급박한 싸움을 치러 본 적이 없었다.
“결과야 뭐 그렇게 나 버렸지만, 지금의 마음이 그때와 똑같소이다.”
아련했던 눈빛에 점점 무정한 살기가 깃들었다.
“저 무도한 놈들이, 감히 교주님 앞까지 도달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지 않겠소?”
“당연하네. 그나저나, 엿새 전에 호북 남단이라고 들었거늘 지금은 호남 북부로군. 전선 유지에서 끝날 줄 알았건만 야금야금 잘도 다가왔어.”
“저들 중 우리를 포착한 이가 있겠소?”
“당연히 없을 것이네. 우리야 산봉우리에 있으니 볼 수 있는 것이고, 저들 중 극마의 고수가 있다 한들 이쪽의 존재를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야.”
“하면 슬슬 알려 줘야 하지 않겠소? 더 전진했다간 모조리 박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야겠지.”
광마존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준비들 되셨는가?”
“…….”
“여전히 무뚝뚝하구먼. 준비 다 되었으면 슬슬 하산하시게.”
쿠구구궁!
산 일대가 뒤흔들렸다.
그 강렬한 진동은 하늘까지 닿을 듯 엄청났다. 땅에서 솟구치는 천둥과도 같달까. 수백 리 밖에서 다가오는 철왕군의 움직임이 덜컥 멈추는 게 보일 정도였다.
신선처럼 허허롭게 서 있는 두 명의 마존.
그리고 그들 뒤에서 시커먼 전포를 입은 일천 병력이 무더기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눈앞의 나무와 바위를 모조리 깨부수며 전진하는 무적의 부대.
철왕군처럼 대단한 갑주도, 말도 없지만 그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천하에 악명을 떨친 이들이었다. 천마신교의 천년 역사에서도 손에 꼽는 출정 숫자를 보유했음에도, 아직까지 무림인들의 공포를 자극하는 천마신교 최강의 부대였다.
천마군(天魔軍).
네 개의 군대 중 서열 이 위인 천마 이 군(天魔二軍)이 산 전체를 시커멓게 물들일 듯 파죽지세로 치고 나갔다.
쿠르르르릉!
땅이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그 자욱한 먼지를 모조리 잡아먹을 듯, 폭발적인 마기가 터져 나갔다.
후우웅.
바람이 불어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산 정상에서 산 밑 평야까지 내려갔다. 평야에 도착한 천마 이 군은 순식간에 넓게 도열했다.
아무리 거리가 떨어졌다 한들, 산의 표면을 깎아 가며 내려온 괴물들의 존재를 모를 수는 없다.
그렇게 천마군과 철왕군 사세(四勢)가 수백 리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이곳만이 아니었다.
호남과 인접한 강서성에서도 똑같이 두 명의 마존과 천마군 한 부대가 철왕군과 대치했다.
거기서 끝인가? 그렇지 않았다.
극마에 이른 고수의 신법은 상상을 초월하는바. 철혈성이 호남과 강서 두 지역에 철왕군을 밀어 넣을 때 마존 넷과 천마군 둘을 투입한 천마신교는, 남은 마존 다섯을 분산시켜 호북과 절강으로 퍼트렸다.
드넓은 천하에 고작 마존 몇을 보냈다고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실제로 그들 자체로는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들의 무공 때문이 아니라 숫자 때문이었다. 그들은 만부부당의 고수였지만, 동시에 한 명의 고수일 뿐이었다. 운용 자체에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었다.
바로 거기서 마도칠가(魔道七家)가 나섰다.
귀주, 호남, 강서를 꽉 틀어쥐고 있는 그들은 강서상회와 함께 중원 남부 전체에 정보를 퍼트렸다.
구대마존 전체가 출격했음을. 천마신교 최강의 군대라는 천마군까지 나섰음을.
그 무시무시한 정보는 단숨에 장강을 넘어 북방까지 전해졌다.
철왕팔세의 움직임에 기다렸다는 듯이 밀고 올라온 마존과 천마군은 가히 천마신교 그 자체라 해도 손색이 없는바. 이것이 바로 천마신교의 의지라는 걸 만천하에 알려 주었다. 준비가 되었다면 언제든 들어오라는 배포를 보여 준 것이다.
그 첨예한 대립 아래, 북쪽에서도 충격적인 소식 하나가 파도처럼 밀고 내려왔다.
“마교의 악행은 굳이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아도 만인(萬人)이 알고 있을 터. 철혈성은 그들의 존재가 더는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신성한 중원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를 위해선 전면전도 불사할 것을 예고한다.”
강호인들은 당황했다.
비록 같은 강호삼세로 꼽히고 있지만, 철혈성의 병력은 천마신교보다 확실하게 아래였다. 그들이 숨기고 있는 힘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은 천마신교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즉, 철혈성이 먼저 전쟁을 예고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치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그런 걸 떠나, 천마신교는 천년의 세월 동안 불패를 자랑하는 무적의 조직이었다. 그런 조직과 전쟁을 벌이겠다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비록 철혈성의 참패가 예상되기는 해도 전쟁은 전쟁이다. 사람들은 전화(戰禍)가 자신들의 사는 지역에까지 미칠까 두려워했다. 호남과 강서 쪽 사람들 중 십분지 일이 다른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얼마 안 되는 시간, 강호의 정세가 크게 뒤바뀌었다. 무림인은 무림인대로, 양민은 양민대로 불안한 시선으로 두 거대 집단을 주시했다.
그리고 얼마 후.
스스로를 황태자라 칭한 자가 황금빛 갑주를 두르고 눈처럼 새하얀 백마를 탄 채 전선으로 향했다.
“이 땅에는 제국이 있고, 제국에는 황제가 있다. 그러나 황궁이 힘을 잃자 법도가 무너졌으며, 무법의 땅이 된 중원에는 소위 마인이란 족속들이 출현하여 천하를 어지럽혔다. 더는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결연히 나섰으니, 철혈성은 난세를 종식하고자 기꺼이 제국의 신민(臣民)이 되었도다. 이에 과인은 철혈성주 송금백을 금의도신천지대장군(錦衣都臣天志大將軍)에 임명하며, 역적 무리인 마교를 토벌하여 제국의 위엄을 만천하에 알리기로 다짐하였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황태자라 함은 곧 황제의 장자이며, 차기 황제의 위(位)에 오를 지고한 신분이었다.
지금은 힘을 잃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황궁. 그러한 황궁의 이인자가 뜬금없이 철혈성과 함께 마교를 토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기실, 양민에게 무림인이란 존재는 귀신보다도 무서운 해악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힘으로 각지에서 범죄를 일으키고 분란을 조장하며, 화목한 삶을 너무나도 손쉽게 파괴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무림인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적어도 양민들에게 행복을 안겨 주진 못했다.
물론 그것은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이 몰락한 것은 수 대에 걸친 타락한 황제들과, 그런 황제들에게 아부하는 간신들의 횡포에 지친 무림인과 양민들이 합심하여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세금은 가혹했고, 통제는 끔찍했다. 소위 높으신 분들에게 천하 양민들은 자신들의 배를 불려 주는 가축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때에는 무림인들이 날뛰지는 못했다. 가끔 사고를 치는 이들이 있었으나, 제국법(帝國法)과 정도를 지키는 무인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을 몽땅 잡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무림인들이 점령한 중원 땅에, 힘을 잃고 명맥만 유지한 황궁의 황태자가 나타나 세상의 법도를 바로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양민들은 열광했다.
아니, 정확히는 장강 이북의 양민들이 열광했다. 장강 이남, 즉 천마신교 영역권의 양민들은 황태자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충분히 살 만했기 때문이었다. 천마신교는 강서상회를 잡아먹은 뒤, 남부의 법도를 완전히 새로 써 내려갔다.
물론 당장 모든 사람이 살 만하게 만들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굶어 죽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는 먹을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돈이 없어 자식을 공부시키지 못하는 가정을 위해 무상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의원들을 대우해 주었고, 잡스러운 흑도 건달패들을 쥐잡듯이 때려잡았다. 그렇게 천마신교가 한 번 휩쓸고 간 지역엔 건달패들이 다시 생겨나지 않았다.
느리지만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한 결과를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이다. 이 정책의 효과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충분한 성과를 얻었다.
바로 그것이 지난 반년 동안 서량과 호요성이 이뤄 놓은 기반이었다. 그들은 반년간 적을 공략하는 방법보다 내실을 다지는 데에 혼을 갈아 넣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 노력은 빛을 발했다.
* * *
“맹주님! 남부의 상황이……!”
“들었다.”
담사영의 눈매가 매섭게 일그러졌다.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입해 민심을 손에 넣었다…… 마교 놈들치고는 제법이군.”
그때였다.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황궁에 침입자가 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