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황궁풍운 (7)
“산개(散開)!!”
퍼어어어엉!
위홍련의 명령은 빨랐다.
그러나 그보다 쏟아져 들어오는 불비(火雨)가 더 빨랐다.
쾅! 콰르릉!
위홍련이 이를 악물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 화염의 빗줄기를 뿌려 댄 자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화염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제기랄!’
짧은 사이, 십여 명의 마왕수가 불덩이가 되어 쓰러졌다.
위홍련은 자신이 업은 노인의 안위만을 생각했다. 이번 임무를 위해 특별히 교주님께서 내려 주신 혈왕보의(血王寶衣)로 꽁꽁 둘러맨 노인은, 그 절대의 위명과 다르게 너무나도 가벼웠다.
주르륵.
목덜미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위홍련의 피가 아니었다. 노인의 코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안 돼!’
격전의 여파에 몸이 흔들렸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모르되, 혈고에 중독되어 몸이 만신창이가 된 노인이었다. 가벼운 충격도 상당히 위험했다.
“산룡집칠(散龍集七)!!”
퍼어어엉!
불길을 헤치고 나아간 여섯 마왕수는 위홍련처럼 등에 누군가를 업고 있었다.
적의 시야를 어지럽히기 위한 수법이었다. 황제를 납치하면서 시녀나 하인들을 기절시킨 후, 똑같이 혈왕보의로 몸을 숨겨 산개하는 작전이었다.
그렇게 마왕령이 이연대문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
쩌어어어어엉!!
사위를 휩쓰는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노선배!’
파아아악!
양발에 풍화륜(風火輪)을 단 괴인이 무서운 속도로 튕겨 날아갔다.
일검(一劍)의 폭발력이 엄청났다. 창궁무애신공을 극성까지 끌어올린 남궁언의 창궁일검(蒼穹一劍)이었다.
“누구냐!”
남궁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휘황찬란한 무명검을 곧추세우고, 대나무처럼 빳빳한 허리를 세워 사방을 굽어볼 뿐이었다.
후욱.
마왕령을 뒤쫓던 황궁의 절정고수들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화아아아악!
남궁언이 뿜어내는 기파는 그야말로 굉장했다.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이자 당대 중원제일검(中原第一劍)으로 불리는 그였다. 그 천공의 검기와 위엄 가득한 안광이 이연대문 주변의 공기를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풍화륜을 일으킨 사내가 입을 쩍 벌렸다.
“설마…… 검왕?!”
남궁언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상대의 정체를 몰랐다. 하지만 그가 화경에 이른 고수와 상대해도 부족하지 않을 고수임을 알았으며, 동시에 또 한 명의 절대고수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쓸데없이 주절거릴 때가 아니었다.
“검왕이 대체 왜 여길……!”
쉬이이이익! 쩌어엉!
“크으윽!”
양손으로 단창을 든 괴인이 다시 한번 주르륵 밀려났다.
남궁언의 눈이 번뜩였다.
‘괴이한 놈이로고.’
무공의 위력과 기파는 능히 십대고수에 준하는 수준인데, 정작 자신의 일검을 막아 내지 못한다.
‘완성되지 않은 무공? 아니다. 이건 무공이 아니라…….’
파아아아앙!
순간 화살처럼 다가오는 한 고수가 있었다.
남궁언의 눈이 부릅 뜨였다.
‘이런!’
그가 검이 아닌 손을 뻗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콰르릉!
두 개의 육장(肉掌)이 부딪치며 천둥소리를 일으켰다.
남궁언이 두어 걸음 물러섰다. 상대 역시 두 걸음 물러났다.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우열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빠른 속도로 돌진한 자도 똑같이 두 걸음을 물러났다면, 육체의 힘이나 진기, 무공의 발현 정도가 남궁언보다 한 수 아래임이 분명하다는 뜻이었다.
‘으음.’
하지만 그 한 수는 언제든 역전될 수 있는 차이기도 했다. 남궁언은 왼손에 전해지는 상당한 충격량에 놀랐다.
‘정공(正功) 중의 정공이다. 하지만 침투경에 능해. 무공 자체가 상대의 혈맥과 경락을 파괴하는 종류의 암장(暗掌)이로다.’
암영(暗影)의 무공인데도 정파 무공 특유의 신기(神氣)가 돋보였다. 이런 무공은 정말 흔치가 않았다.
“정말 검왕이로군.”
중년 사내가 눈을 빛냈다.
“감히 황궁에 침입하다니, 죽고 싶은 것인가!”
남궁언은 여전히 침묵을 고수했다.
그가 서량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단순히 서량과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인연이 있다고 들어줄 만한 부탁도 아니었다.
다만 그와 깊은 얘기를 했고, 지금 이 일이 천하의 환란을 바로잡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다 떠나서,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역적이라 손가락질을 한다면 별수 없지만, 이것은 진정 바른 일이었다. 그래서 이 위험한 부탁을 수락한 것이다.
치이이이익!
무명검에 시퍼런 진기가 아른거렸다.
능적반의 눈이 어두워졌다.
‘엄청나구나.’
무시무시한 검기였다. 검에 진기를 실은 것만으로 종전과는 또 다른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바로 중원제일검이다, 마치 그렇게 외치는 듯했다.
“화주(火主)는 역적 무리를 잡아 주시오.”
“좋소이다!”
파아아앙!
화주라 불린 괴인이 재차 하늘을 날았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신법 하나만큼은 감탄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천하제일을 논해도 손색이 없을 신법이었다.
‘아니, 신법이 아니라 술법인가?’
남궁언의 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콰르르릉!
“큭! 이, 이런 개 같은 늙은이가!”
허공에 멈춰 선 괴인, 화주가 이를 갈았다.
능적반이 외쳤다.
“상관하지 말고 역도들을 쫓으시오!”
“쫓을 수 있어야 쫓을 거 아니오! 어서 늙은이를 막으시오!”
파아아앙!
두 사람이 움직이기도 전에 남궁언은 이미 신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비록 전투 무공보다 깨달음을 더 중시한 그였지만, 그 깨달음이라는 것도 극한의 단련 없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순식간에 괴인의 머리 위로 올라간 남궁언이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을 전개했다.
쏟아지는 검격(劍擊)이 파도와도 같았다. 깜짝 놀란 화주가 적색 단창을 마구 휘둘렀다.
화르르륵! 콰아앙!
“끄으응!”
화주의 두 발이 땅에 박혔다. 거의 무릎까지 파묻혔을 정도였다.
“늙은이가 무슨 힘이……!”
쩌어엉! 쩌저정! 콰앙!
순간 허공에서 몇 차례 굉음이 터졌다.
남궁언과 능적반이 손속을 나눈 것이다. 남궁언은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신들린 검결을 풀어 놓았고, 능적반은 변칙적이고 실전적인 권박(拳撲)을 쏟아 냈다.
티이잉! 콰앙!
두 사람이 신형이 각기 다른 쪽으로 튕겨 날아갔다.
파아아아앙!
동시에 화주가 질주했다.
남궁언의 얼굴에 난감함이 일었다.
‘놓치는가.’
이왕이면 두 고수 모두 잡아 두고 싶었다. 이기지는 못할지라도, 마왕령이 도주할 시간은 충분히 벌어다 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강하구나.’
권박에 능한 상대의 무공은 십대고수라는 이름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이 사내를 쓰러트리지 않고서는 마왕령을 쫓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검왕, 당신의 대역죄를 당신 가문 전체가 받게 될 것이오.”
남궁언이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은 바름(正)이요, 지켜야 하는 것은 의로움(義)이니. 정의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면 당장 오늘 죽어도 좋으리라.”
“그럼 오늘 이 자리에서 죽여 주마!”
파아아앙!
무서운 속도로 접근한 능적반이 쌍권을 내질렀다.
폭풍과도 같은 맹타였다. 남궁언은 일찍이 이처럼 난폭하고도 실전적인 권법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수년 동안 골방에 틀어박혀 검도에 매진한 자신의 호승심을 건드린 젊은 마룡(魔龍)이 이와 비슷한 무공을 썼었다.
사내의 주먹에 실린 난폭함과 흉악함은 능히 서 교주에 비할 만했다.
‘하지만.’
파바박! 콰앙!
능적반이 비틀거리면서 물러났다.
그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고법(靠法)?!”
고법이란 곧 몸통 박치기를 뜻한다. 서너 번의 박투 끝에 몸통 박치기로 능적반을 물러나게 한 남궁언이 다시 한번 검을 세웠다.
“몹시 실전적인 권박을 구사하는 고수로다. 그러나 어중간하구먼.”
“뭐라?”
남궁언이 미소를 지었다.
“서 교주에 비하면 자네의 권박 실력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네.”
능적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파아아악!
재차 거리를 좁힌 능적반이 팔다리를 휘둘렀다.
마음이 꽤 흔들렸음에도 구현하는 무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언제, 어떤 상태에서도 극의(極意)의 무공을 뽑아낼 수 있도록 철저하게 단련된 자였다.
콰콰쾅!
후려치는 검풍에 황궁 돌담이 무너져 내리고, 빗나간 권풍에 건물 하나가 날아가 버렸다.
인간으로 태어나 몇 번의 한계를 넘고, 비로소 무(武)의 한계까지 초월해 버린 괴력난신(怪力亂神)들의 힘은 그처럼 대단했다. 저 이천상이 진정한 고금제일인, 누구도 비할 수 없는 마신(魔神)이라 불리고 있지만, 범부의 눈에는 남궁언이나 능적반 역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퍼어엉! 카아앙!
삼검으로 투로를 끊어 내고, 천풍장(天風掌)으로 거리를 벌린 남궁언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야 자네가 누구인지 알겠군.”
“퉤!”
“명왕씩이나 되는 사람이 어찌하여…….”
“닥쳐라, 검왕.”
우우우우웅.
능적반의 양 주먹에서 회색빛 기류가 일었다.
남궁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언뜻 보아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력의 주먹이었다.
“……쉽지 않겠군.”
* * *
콰아아앙!
‘빌어먹을!’
작전은 성공이었다.
반쪽만.
파바바바박!
마왕령은 넓게 산개해서 남쪽으로 향했다. 적의 공격 범위가 워낙 넓었기 때문이다.
뒤따르는 화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쥐새끼 같은 놈들!”
화르르륵!
그의 단창에 거대한 불길이 일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불꽃이었다. 위홍련 역시 양강의 무공을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저렇게 큰 불꽃을 생성해 낸 고수는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불꽃을 피워 내는 무공은 다 사기 아니냐고!’
후우욱!
거대한 불꽃의 구(球)가 마왕령 한가운데를 향해 쏘아졌다.
콰아앙!
“크윽!”
“계속 달려!”
화주의 눈에서 시뻘건 화염이 뿜어졌다.
혼신의 힘을 다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받아 낼 수 있을 만한 공격도 아니었다. 강력한 기(氣)가 깃들진 않았으나, 불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생명에 위협적이다.
한데 이번 공격으로 죽인 놈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원형으로 퍼져 화염구를 피하는데,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보통 놈들이 아니로구나!”
파아아앙!
위홍련의 눈이 흔들렸다.
한참 뒤에서 따라오던 화주가 어느새 자신을 앞지르고 십여 장 너머에 서 있었다.
‘이 무슨?!’
엄청난 신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위홍련은 초절정고수이며, 무공이 구현할 수 있는 한계점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화주의 신법은 상리를 벗어난 것이었다.
‘불가능해!’
화르르륵!
화주가 든 단창이 재차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애초에 그는 땅 위에 서 있질 않았다. 불꽃이 휘감긴 바퀴가 양쪽 발 좌우에 생성됐는데, 두 발은 허공에 떠 있고 불 바퀴만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됐든, 중요한 건 저놈을 떨쳐 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놈이 있었다니! 북첨비각은 대체 뭘 한 거야!’
검왕 하나면 충분할 줄 알았더니만, 저런 괴상한 요괴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치이이이익!
마왕령을 향해 창을 겨눈 화주가 차갑게 웃었다.
창날 끝에서 피어오른 붉은 열기가 서서히 백열(白熱)되었다. 온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보아하니 마교 놈들 같은데, 잘 됐다. 마교주란 놈 때문에 본궁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콰아앙!
“크윽!”
화주가 비틀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뭐, 뭐야?’
화첨창(火尖槍)을 쥔 손에서 피가 흘렀다. 호구가 찢어진 것이다.
“어떤 놈이 또……!”
“역시, 진기(眞氣)만 특출나지 실력은 그리 대단하지 못한 것 같군.”
위홍련의 눈이 커졌다.
위이이이잉!
어두운 밤길이 환한 금광으로 물들었다.
“다, 당신은……?”
“그대는 서쪽으로 가시게. 생로(生路)는 육로가 아니라 수로(水路)일세.”
적송과 전대 노승들을 제외한, 당대 소림 무공에 가장 정통한 자.
소림 방장 혜심(慧心)이 팔대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구먼.”
“소림?! 이 개 같은 땡중 놈들아! 네놈들은 분명 봉문(封門)이라고……!!”
“더는 우리를 중으로 생각하지 말게. 우리 아홉은 존장과 함께 파문당한 파계승일 뿐이네.”
“뭐, 뭐라고?!”
후우웅.
혜심의 주먹에 황금빛 찬란한 빛이 어렸다.
“그나저나 자네 괜찮겠는가? 백 보(百步) 안에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