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천하의 소유자 (5)
“뭐? 그렇게 많이?”
“그렇습니다.”
소연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럴 수가 있나? 혈고에 중독되었다며?”
“네.”
“혈고는 근본적으로 사람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자신의 피와 살로 만드는 마물이야.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저 중독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이라고 들었어.”
“맞습니다.”
“하지만…….”
“네. 황제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둘러쳐져 있었지요.”
일 년 중 환희원이 바쁘지 않은 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당연히 의방인 혈혼각에 얼마만큼의 식자재가 들어가는지 따위의 사소한 사항은 원주인 소연심이 알 필요가 없었다. 담당하는 마인들이 워낙에 많으니까.
그런데도 소연심이 혈혼각의 식자재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곳에 황제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제의 나이가 거의 환갑에 가깝다고 들었어.”
“맞습니다.”
“그 노년에, 심지어 주술적인 대법까지 덧씌워진 혈고에 중독되고선 깨어나자마자 그 많은 양의 음식을 먹고 있다는 거야?
몸에 무리가 가도 이만저만 가는 게 아닐 텐데?”
주화가 특유의 단조로운 음색으로 답했다.
“의원들 말로는 괜찮다고 합니다.”
“당연히 괜찮으니 놔두고 있겠지.”
제아무리 황제라 한들 황궁이 힘을 잃은 시대였다. 실질적으로 중원은 관부가 아니라 무림의 세력들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황제라는 이름값을 아예 무시할 순 없지만, 굳이 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곳은 천마신교, 마인들은 황제가 아닌 교주를 주인으로 모시는 이들이었다.
당연히 황제가 하자는 대로 휩쓸려 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의원이 황제의 먹성을 놔뒀다는 것은 그것이 그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소연심의 눈이 깊어졌다.
“신기하군. 내공을 익히긴 했지만 워낙에 변변찮은 양이라고 들었는데…….”
애초에 혈고와 주술적 대법으로 몸이 상한 황제의 몸은 그냥 그 나이대의 병 걸린 노인이라고 봐도 된다.
주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데…… 원주님.”
“응?”
“굳이 황제에게 신경을 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연심의 눈이 깊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지. 황제가 건강을 되찾느냐 마느냐, 교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다루시느냐에 따라서 향후 중원의 판도가 바뀌게 될 테니까.”
“물론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그 정도는 미리 알아 두어야 본원 역시 어떤 일을 언제까지 처리할지, 언제 시간을 비워 둘지를 계획할 수 있겠지.”
“……!”
주화의 눈이 흔들렸다.
소연심은 지금 미래를 보고 있었다.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천마신교의 구성원으로서 신교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짧은 대화에서 느끼는 바가 컸다. 주화는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소연심에 대한 존경심을 대신했다.
소연심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특기할 사항이 있었다면 의원들이 먼저 보고를 올렸을 터……. 그렇다면 황제의 몸이 급속도로 나아지고 있다는 뜻인데.”
황제가 건강을 되찾든 말든, 서량은 그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휘두를 것이다.
다만 황제가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서, 그의 회복 정도를 결정 지어야 한다.
다소 냉정한 말이지만, 뱃속에 능구렁이 수백 마리를 품고 다니는 자라면 완전히 회복시킬 필요가 없다.
교주님께서 황제보다 못할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굳이 그런 일에 심력 소모를 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나 황제가 심성이 연약한 인물이라면 최대한 몸을 건강히 만들어 주는 게 좋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녀는 당대 황제가 굉장한 수완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가 천자의 위에 올랐던 나이가 불과 열셋이었다. 그때는 황궁의 존재감이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으며, 당연히 힘도 전혀 없었다.
황제는 그 어린 나이에 천자의 위에 올라, 불과 십수 년 만에 황궁을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수완가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황궁과 관부의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무림의 세력들을 넘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어딘가.’
게다가 황제는 서른이 되기 전, 황궁의 세력 확장을 멈춰 버렸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선이었다.
당시 무림 세력들 역시 어느새 커져 가는 황궁을 주시하고 있었고, 필요 이상으로 커졌다면 철저하게 억압하려 들었을 것이다.
황제는 바로 그 절묘한 선을 지킨 사람이었다.
천하를 뒤엎은 풍운아는 못 되었을지언정, 어린 나이에 제국의 힘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저력을 가진 사람이란 말이다.
소연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되겠다. 다소 주제넘는 발언일는지 몰라도 교주님께 말씀을 드리는 편이…….”
덜컹!
“어? 소 원주님!”
소연심의 자세가 어정쩡해졌다.
“아, 칠공녀님 오셨나요?”
“네!”
소연심이 문밖에 서 있는 수하에게 눈총을 주었다. 채여민이 오면 온다고 미리 알렸어야지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은 걸 질책하는 것이다.
수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만으로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
서량은 채여민을 동생처럼 여기고 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 칠공녀의 직함도 회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인들도 계속 그녀를 대우해 줘야 함이 옳은 것이다.
수하로서도 당연히 채여민의 무자비한 돌파를 막기 어려웠을 것이다.
“앗! 주화 언니도 안녕!”
주화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송구하옵니다. 편히 주화라고 불러 주시옵소서, 칠공녀님.”
“언닌데?”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고 구조다.
소연심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나저나 칠공녀님. 오늘은 교주님과의 대무가 무척 빨리 끝나셨네요?”
“아, 네. 오늘은 볼일이 있으시다고 해서요.”
채여민은 눈에 띄게 섭섭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연심은 괜스레 마음이 찡한 것을 느꼈다.
채여민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친분이 없어도 눈길이 가게 만드는 매력, 아마도 그것은 훗날 채여민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셨군요. 한데 볼일이라니요?”
“황제라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고 하셨어요.”
“지, 지금요?!”
“네.”
소연심은 눈을 감아 버렸다.
“……정말 빠르시다니까.”
* * *
“그것, 그것을 더 내오거라!”
“이, 이것 말씀입니까?”
“그래! 간을 더 약하게 해서!”
“아, 알겠습니다.”
“향신료도 넣지 말라고 하라! 생선 요리를 올리려거든 향신료를 쓰지 말고 흙내를 빼도록 해!
그리고 저것! 저 채소가 마음에 드는구나. 저것도 한 접시 가져다 다오.”
“……그리하겠습니다.”
의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와구와구.
노인은 거대한 식탁 앞에서 무수히 많은 음식을 입 안에 쓸어 담았다.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었는지, 헐렁한 옷자락 위로 배가 볼록 튀어나왔다. 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피골이 상접한 노인의 먹성이라곤 믿을 수가 없었다.
놀라운 것은 어제부터 계속, 세끼를 매번 이렇게 먹고 있다는 것이다.
“음, 숙수들의 실력이 아주 제법이군. 아니면 남부 음식이 본래 이리 맛있었던가? 황궁으로 들이고 싶을 정도야.”
보통 사람이 그만큼 먹으면 배가 불러서 입도 열기 싫어야 정상이다.
한데 노인은 전혀 배부르지 않은지, 일일이 평가까지 하며 음식을 마구 씹어 삼키고 있었다.
멀리 창가를 통해 그를 보고 있던 서량이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계속 저러고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혈혼각주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상태는?”
“믿을 수 없게도, 빠른 속도로 회복 중입니다. 어지간한 강골도 저만한 회복 속도를 보이긴 힘들 것입니다.”
“그래?”
“예.”
“내공은 어떠한가?”
“단전이 제법 크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능히 절정고수의 단전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만, 내력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혈고한테 죄다 빨렸군.”
“그렇습니다.”
“기력이 쇠하고 몸에 병마가 가득해 보이는데도 저 많은 음식을 취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혈혼각주의 얼굴에 망설임이 일었다.
“황공하오나 교주님, 확신을 드리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네. 자네가 본 그대로 말해 주게나.”
“황제는 무공의 상리를 벗어난 기괴한 심법(心法)을 익힌 듯합니다.”
“무공의 상리를 벗어났다?”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몸을 단련하는 류가 아니라 극에 이른 양생술(養生術)로 보이는데,
중원의 유수한 양생술로도 저만큼 혈맥을 탄탄히 만들지는 못합니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본디 선가(仙家)의 내공심법들이 양생술에서 시작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습니다. 하나 황제가 익힌 심법은 선가의 공부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몸의 양기(陽氣)를 보하고, 신체를 강건하게 만드는 데에 극단적으로 집중한 내공심결로 보입니다.”
“확실한 건 아니고?”
“송구하옵니다.”
철저하게 몸을 보하는 심법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궁의 역사는 천마신교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황제의 건강을 위한 무공심결 정도는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황제가 그러한 비학(秘學)을 익히고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해서, 몸 상태는 괜찮다는 것이지?”
“예. 주술적인 대법까지 덧씌운 혈고에 중독되었음에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몸이 항상 최상의 상태로 유지되는 데에 너무나도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즉, 혈고를 제거한 지금은 당연히 회복도 빠를 것이다?”
“그렇습니다. 물론, 정확한 것을 알려면 더 연구해 봐야 옳을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그것도 황제를 두고 연구를 해야 한단다. 혈혼각주도 어쩔 수 없는 마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군.”
황제를 보는 서량의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황제가 이곳 사정에 대해 얼마만큼 질문했는가?”
“담당 의원의 말로는, 이곳이 어디인지만 묻고는 바로 음식을 대령하라 하였답니다.”
“똑똑하군.”
그리고, 똑똑하기 때문에 저리 뻔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과연 황제는 황제다. 본인이 납치당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 한 번을 빼고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단다.
우웅.
서량의 눈에 은은한 마기가 일었다.
‘경계하는군.’
그의 눈에는 보였다.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미친 듯이 음식을 먹는 와중에도 황제의 기(氣)가 바늘처럼 날이 서 있는 것이.
“아무리 그래도 과식이 몸에 좋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혈혼각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기실…… 그것도 확신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상리를 벗어난 양생술을 익힌 것처럼, 황제의 몸도 상식을 벗어났습니다.
본디 체질과 상태에 맞는 약식을 취하며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 정상인데,
저 많은 양을 먹는데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것은 물론, 굉장한 속도로 회복하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굳이 지금 건드릴 필요는 없다?”
“그렇습니다. 따로 약을 지어 주는 것조차 필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모로 독특한 자로군.
“알겠네. 가서 일 보시게.”
혈혼각주가 깊게 고개를 숙이곤 공손한 자세로 물러났다.
한참이나 황제가 식사하는 것을 보던 서량은, 그의 식사가 끝나자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꺼어어억! 어허, 졸립구나. 이제 좀 자야겠다.”
가관이다. 옷에 묻은 음식물을 닦아 내지도 않고 그대로 침상에 드러눕는데, 천하의 한량이 따로 없었다.
툭. 툭.
“음?”
세상 편한 자세로 누워 있던 황제가 창가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서량이 있었다.
“어허, 기골이 장대한 놈이로고. 그래, 네놈은 누구냐?”
“여기 주인이다.”
황제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놈!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을 터인데?”
서량은 피식 웃어 버렸다.
“황제?”
“알면 당장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를 하지 못할까!”
서량의 답변은 압권이었다.
“징징거리는 건 거기까지 하고 밖으로 나와,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