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태풍을 불러오다 (1)
그날 밤.
“후우우.”
크게 숨을 뱉어 내는 서량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교주직에 오른 이후, 그의 수련은 명상과 참오가 전부였다.
굳이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육체는 완성을 이루었고, 천하 어떤 기(氣)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만큼 깨끗했다.
어떤 무공을 봐도 단번에 무리(武理)를 관통할 수 있으며, 삼류의 초식으로도 절벽을 갈라 버릴 수 있다.
터럭 한 올에도 기가 순환하니, 육체가 매 순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
더 이상 육체의 단련이 의미가 없다. 그는 그러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어두운 하늘 위에 휘영청 뜬 만월(滿月)을 보니, 어쩐지 땀을 흘리고 싶어졌다.
서량이 일 보(一步)를 밟았다.
쿠웅!
대지가 뒤흔들렸다.
내공을 발출하지 않아도 그만한 힘이 나온다.
각고의 노력으로 연성한 무(武)는 무의식적인 움직임에도 최선, 최강의 힘을 뽑아낼 수 있도록 서량의 몸을 이끌어 주었다.
그가 천마도를 휘둘렀다.
쐐애애액!
천마도의 기다란 도병이 휘어질 듯 움직였다.
번쩍!
십자(十字)로 휘두른 천마도의 도첨(刀尖)에 신비로운 빛이 어렸다.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 뽑아낸 속도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내공을 운용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몸 전체에 기가 빈틈없이 돌고 있었다.
끊임없이 변화를 지속한 육체는 그 자체로 흉기나 다를 바 없다.
설령 군림마황기와 구유마공으로 연성한 내공을 전부 소실한다 한들, 그의 무공은 여전히 천하를 논할 만할 것이다.
“후욱.”
한참이나 천마도를 휘두르던 서량이 눈을 빛냈다.
츠츠츠츠.
아름답던 정자 주변이 황량한 평야로 바뀌었다.
이제는 판마정의 변화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다. 이천상만큼은 아니지만, 판마정에 입정(入亭)한 기간을 생각하면 충분히 대단한 성취였다.
서량이 눈을 빛냈다.
‘나오십시오.’
츠츠츠츠.
평야 저편.
서량의 눈이 향한 곳에 허연 안개가 뭉치기 시작했다.
‘상대가 필요합니다. 환상 속의 상대가 아닌, 실체를 갖춘 진짜 상대가.’
뭉클뭉클.
뭉친 안개가 점점 짙어지더니, 이내 구름처럼 변하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아직 형태가 완전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람이었다.
사람은 사람이되 보통 체격이 아니었다. 극마에 올라 환골탈태를 한 서량보다도 더 크고 단단한 체구였다.
주르륵.
서량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쉽지 않군.’
쉬울 리가 없다.
판마정은 유진도형결로 연결된 교주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 주는 꿈의 세계다.
원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선 강한 염원은 물론, 조금의 잡념도 섞이지 않은 집중력과 선명하고도 구체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서량이 만들고 있는 상대는 형태가 쉬이 뭉쳐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가 만드는 상대는 천하를 넘어 고금에서 첫손에 꼽히는 무신(武神)이다. 애초에 상대의 전력(全力)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보다 강자일지라도 상상을 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무신만큼은 달랐다.
힘의 끝이 어디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아직 ‘사람’인 서량은, 신선의 영역에 발을 들인 상대의 힘을 일부분조차 구현해 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아.’
서량은 눈을 감았다.
‘불가능하지 않다. 나는 천하 어떤 사람보다도 그분의 실력을 많이 봐 왔다.
그 힘의 끝이 어디인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천하를 굽어다 봤는지는 알 수 있어.’
우우우웅.
천마도가 긴 울음을 토해 냈다.
츠츠츠.
일순 천마도에서 무지막지한 마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서량의 마기가 아니었다. 천마도 자체에 봉인된 선천마기(先天魔氣)가 주인의 의지에 따라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쿠구궁!
판마정이 뒤흔들렸다.
서량과 일체가 된 판마정은 이 절대의 마기를 쉬이 버텨 낼 수 없었다.
판마정 역시 주인의 힘에 따라 수용할 수 있는 힘과 충격의 정도가 달라지는 법,
지금 서량의 힘으로는 천마도에 봉인된 선천마기의 압력을 버텨 내기 힘들었다.
‘그래도 한다.’
부르르르.
천마도를 쥔 손이 떨렸다.
도의 무게가 천근만근으로 늘어난 듯했다. 구유마공으로 중심을 잡고, 군림마황기로 제어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놓쳤을 것이다.
‘나오십시오.’
서량의 안광이 번쩍였다.
‘나오십시오!’
피이잉!
일순 선천마기가 튀어 나와 사람의 형상을 한 구름에 스며들었다.
츠츠츠츠츠.
서량의 얼굴에 희열이 일었다.
‘됐다!’
위이이잉.
뭉게뭉게 부드럽게만 보였던 구름이 빠른 속도로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칠 척에 다다른 키. 흑색의 용포.
떡 벌어진 어깨가 태산이라도 짊어질 것 같았다. 헐렁한 옷가지에 강인한 가슴이 드러나고,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여인의 그것처럼 검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두 눈.
번쩍!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안광 속, 세상의 섭리를 관통하는 절대자의 의지가 깃들었다.
서량의 얼굴에 아련한 빛이 어렸다.
“사부님.”
처음이었다. 판마정으로 이천상의 형태를 만들어 낸 것은.
그간 방법은 알아도 힘의 농도가 낮아 시도조차 못 해 보았다.
설령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이천상을 보게 되면, 일은 안 하고 만날 그와 술을 마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힘의 농도는 아직 낮았지만, 왠지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오늘은 그가 그리워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싸우기 위해서였다.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사부님도 자신을 책망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흔들림 없는 눈으로 서량을 주시하던 이천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판마정인가.”
그 순간, 서량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스승의 마지막을 보지도 못한 채 철혈성의 병력을 지우러 출정했던 때가 떠올랐다.
욕계문을 통해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 그 대화를 통해 스승의 유언과 감정을 느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쉽지만, 그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맞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왜 이리 반가운지 모르겠다.
애써 잊고 있었던 사무친 그리움이다. 천하진으로 살아갔을 때도, 서량으로 살아가는 지금도 이렇게나 정(情)을 주었던 사람이 또 있었던가.
“제법이야.”
이천상의 얼굴에 흥미가 깃들었다.
“유진도형의 성취가 뛰어나구나. 익힌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 정도로 구현해 낸 건지.”
“…….”
“과연 천마의 칭호를 받을 만하다.”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불러낸 이천상이 진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진짜는 아니지만, 또한 가짜라고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이천상의 일면만 알뿐, 성격이나 힘의 한계는 몰랐다.
즉, 천마도의 선천마기로 형성한 존재이니만큼 허구이면서도 동시에 진짜다.
지금의 이천상은 그가 기억했던 그때의 이천상이지, 그가 ‘바라 왔던’ 이천상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더 반갑다. 더욱 생생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천상의 눈에 엄기(嚴氣)가 어렸다.
“그러나, 이 나의 힘을 감당해 낼 정도는 아니다.”
“압니다.”
“천마도의 선천마기를 뽑아내다니, 아까운 줄 알거라.”
“한 톨의 선천마기만 있어도 천마도는 천마돕니다. 여기저기 뿌려 대도 괜찮아요, 아직은.”
“그 힘은 신교의 미래를 위해 써라. 이미 스러져 버린 과거의 망령을 불러내는 데 쓰기엔 아까운 기운이야.”
“그래서 불러낸 겁니다. 신교의 미래를 위해서.”
서량이 씨익 웃었다.
“선천마기의 일부로 인해 교주인 제가 강해집니다. 그러니 확실한 가르침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이천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파지지지직!
그의 몸에서 어두운 번개가 휘몰아쳤다.
“말솜씨만큼이나 실력도 늘었는지 보겠다.”
그렇다.
서량은 그를 추억하기 위해서 부른 게 아니었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결국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배우고 성장하는 것.
“갑니다.”
“와라.”
콰앙!
서량의 신형이 빛살처럼 나아갔다.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쩌저저저정!
천마도가 극속(極速)으로 휘둘러졌다.
극마에 이른 고수도 한 합을 넘기기 힘든 위력이었다. 그 절대의 무공을, 이천상은 손짓 몇 번으로 받아 냈다.
서량은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이천상의 힘을, 이천상의 경지를.
천하제일을 논해도 부족함이 없는 자신의 마력을 손쉽게 쳐 내는 상대의 위대함을.
‘전력으로!’
쾅!
마황군림보로 이천상의 후방을 점한 그가 폭풍 같은 일격을 휘둘렀다.
휘이이이잉! 콰앙!
이천상이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군림마황기 칠십이신기의 하나, 혈풍광검(血風狂劍)이었다. 검법이지만 도법으로 대신한다.
이미 구유인화도법을 장법으로 변화시킨 적이 있는 그에게 병장기술의 종류는 의미가 없었다.
부아아아앙!
서량의 몸 주변으로 시뻘건 돌풍이 휘몰아쳤다. 어두운 청색 뇌전이 번뜩이는 광기의 바람이었다.
“마황군림보를 대성했구나.”
서량의 눈이 빛났다.
어느새 이천상은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이동 속도였다.
“그래도 멀었어.”
파지지지직!
가벼운 손짓에 따라 거대한 전광(電光)이 허공을 지워 가며 쏘아졌다.
콰아앙!
서량이 울컥 피를 토했다.
천마도로 막았음에도 그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순식간에 침투하는 마력이 무지막지했다. 일격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상대에게 통하지 않을 보법이라면, 이제 막 입문을 했든 대성을 했든 무의미한 법.”
파지지지직!
이천상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시커먼 번개가 한가득 담긴 두 손은 금마(禁魔)의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
“압니다.”
파지지지지직!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자세를 낮춘 서량, 한쪽으로 내린 천마도에서 비슷한 전광이 이글거렸다. 만압금마도(卍壓禁魔刀)였다.
서량이 힘차게 일 보를 밟았다.
콰아앙!
대지에서 끌어 올린 힘이 그대로 천마도에 담겼다. 금마도의 뇌광이 천지를 갈아엎을 듯 거대한 그물을 형성하며, 이천상을 뒤덮었다.
이천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재미있는 수법이군.”
그가 손을 휘둘렀다.
콰콰콰쾅!
뇌전의 그물이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서 소멸했다.
그때였다.
훅.
어느새 준비를 마친 서량이 이천상의 코앞에서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쓰면 제법 효과적이로군요.”
퍼어엉!
이천상의 몸이 흔들렸다.
반면 공격을 가한 서량의 몸은 십여 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구유인화장의 삼장연환(三掌連環)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쏟아진 것이다.
“우웨에엑!”
한 움큼 피를 토해 낸 서량이 충혈된 눈으로 이천상을 보았다.
이천상의 몸에서 반투명한 흑색 기류가 일었다.
‘마황신갑(魔皇神鉀)!’
군림마황기 칠십이신기의 하나, 기공으로 둘러친 진기 방어막의 극한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승부의 세계에서 마황신갑을 펼치는 건 시간 아까운 짓이었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천상은 달랐다. 어떻게 저리 복잡한 내공 운용을 찰나의 순간 구현해 냈는지 모르겠다. 지금의 서량으로선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였다.
“인상적이다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다.”
화르르륵!
이천상의 손에서 시커먼 불꽃이 타올랐다.
번개가 아니라 화염이다. 서량의 병기 네 개를 단번에 녹여 천마도의 도신(刀身)을 형성했던 수법, 소천겁화(燒天劫火)였다.
“할 수 있겠느냐?”
서량이 씨익 웃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오너라.”
콰앙!
자흑색 칼날과 재앙의 화염이 정면으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