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태풍을 불러오다 (3)
“……?!”
“원주님?”
“…….”
“원주님?”
깜짝 놀란 소연심이 주화를 돌아보았다.
주화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아니다.”
소연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잘못 봤나?’
창밖 너머, 얼핏 금빛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싶어서 안력을 집중하니 사라져 버렸다.
‘헛것을 본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소연심은 그 금빛 무언가에서 풍기는 신비로운 기도를 느꼈다. 한 번 보면 어지간해선 잊기 힘든 기도였다.
아니, 그것은 기도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했다. 존재감이라는 단어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그저 심상치 않다고 느낀다. 그것이 전부였다.
‘한데…….’
왜일까?
그 금빛 무언가에 대해 알고 싶은데, 딱히 조사할 필요까진 느끼지 못했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다. 마치 번쩍! 하고 떠올린 기억의 꼬리를 잡은 기분이랄까.
혹은 꿈이 남긴 그림자와도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거듭할수록 기억에서 사라져 가는 꿈결 같은 광경이었다.
소연심이 고개를 저었다.
‘요새 많이 힘들긴 했나 보군.’
하긴, 환희원 업무 중 힘들지 않은 게 얼마나 있겠는가. 신교를 향한 충심을 떠나, 이제는 이런 과중한 업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소연심이 주화를 바라보았다.
주화의 얼굴에선 빛이 났다. 용모도 아름다웠지만, 투명하리만치 맑은 눈빛이 몹시 고왔다.
“근래에 성취가 있었구나.”
“아, 네.”
“대단하다. 그 바쁜 와중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니.”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걸요.”
소연심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당연한 걸 못 하는 사람이 천지에 널렸다. 앞으로도 그 당연한 일을, 계속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정진했으면 좋겠다.”
“네.”
“앞으로 외성 관련 건은 나한테 맡겨 두어라.”
“네?!”
주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연심이 피식 웃었다.
“나도 얼마 남지 않았다. 원주직을 감당하기에는 이제 버거워.”
“워, 원주님!”
“그간 열심히 달려왔으니, 이제 후계에게 자리를 넘길 때도 되었지. 당분간 외성 업무는 내가 맡을 테니, 남는 시간은 수련에 힘쓰도록 하거라.”
“하지만……!”
“본교는 강자존이다. 아닌 듯하면서도 약하면 깔보는 곳이야. 환희원주가 되려거든, 그에 걸맞은 무력을 손에 넣는 것도 중요하다.”
“…….”
“당분간 무공에 열중하거라. 필요하다면 교주님께도 말씀드리도록 해.”
“교, 교주님께요?”
“교주님은 아랫사람의 요구가 타당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응해 주시는 분이다. 하지만 곧 교주님께서도 바빠지실 것이다.
그 전에, 한 번이라도 가르침을 청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한다.”
“그건…….”
“내가 미리 말씀을 올리도록 하마.”
주화의 얼굴에 감격이 깃들었다.
교주님께선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시다. 그런 분께 한 번이라도 가르침을 받는다면 필경 무공 성장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하나뿐인 후계자를 위해 무엇인들 못 할까.”
소연심이 웃으며 문서를 들었다.
“오늘까지는 처리하도록 해라.”
“네!”
황금빛으로 물든 무언가.
놀랍게도 그것을 본 사람은 호요성과 소연심만이 아니었다. 신교 곳곳에서 그 ‘물체’인지 ‘기’인지 모를 무언가를 본 사람이 하나둘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의 정체를 궁금해하면서도 쉬이 넘겨 버렸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한 사람만 입을 열어도 그것을 본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웅성거릴 것이 분명한데,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신비로운 황금빛 무언가.
그 무언가는 몇 날 며칠이고 신교를 휘돌다가 사라졌다.
* * *
서량은 침중한 눈으로 적송을 바라보았다.
“허억! 허억!”
적송의 호흡은 가팔랐다.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고, 흰자위는 샛노랗게 변했다. 현기가 어려 있던 동공은 탁했고, 손발은 차가웠다.
한옆에 앉은 현천진인의 얼굴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병색이 짙을 뿐, 사기(死氣)는 없었다. 아직 죽을 때가 되진 않은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 자신은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이 사람아.”
“콜록! 콜록! 허억! 허억! 마, 말코인가?”
현천진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떠날 때가 다 되어서까지 말코라 부르는 겐가?”
적송은 연신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그, 그러게 내가…… 콜록! 내, 먼저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네가 이런 꼴을 보일 줄은 몰랐지.”
“쿨럭! 다, 다 내가 선택한 길인 것을.”
현천진인이 탄식했다.
“자네가 이리 고통스럽게 갈 걸 알았다면, 그때 그냥 보내 줄 것을 그랬네.”
얼마 전, 가부좌를 틀고 열반에 들기 직전이었던 그를 일부러 깨운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다.
“그리 말하지 말게. 더, 덕분에 조금 더 세상을 즐기다가 가네. 허억! 허억!”
“이제 그만 말을 멈추게.”
그때, 서량이 적송의 맥을 잡았다.
우우웅.
적송의 맥문을 통해 들어간 기가 순식간에 그의 호흡을 안정시켰다.
현천진인이 놀라운 눈으로 서량을 보았다.
“설마 마기로?”
“아니오.”
서량이 씁쓸하게 말했다.
“마기를 주입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소. 그저 무속성(無屬性)의 기를 조금 불어넣었을 뿐이오.”
마기를 떼어 내 정제하고 또 정제하여, 아무런 속성도 없는 진기로 다듬어 건넸다는 뜻이었다.
말은 쉽지만, 그것은 자신의 내공 일부를 영구히 잃을 수도 있는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서량에게 그 정도 양의 내공은 참새 눈물만큼도 되지 않는 터라 별 의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타인에게 제 내공을 떼어 건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현천진인이 눈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서량이 적송에게 말했다.
“좀 살 만하오?”
적송이 미소를 지었다.
흐린 눈은 여전히 천장만을 보고 있었다. 시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제 갈 사람에게 살 만하냐니?”
“…….”
“허허, 덕분에 좀 편하게는 가겠구먼.”
“왜 그랬소?”
“무엇이?”
서량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어렸다.
“왜 노선배의 영력(靈力)을 본교 전체에 뿌렸냐는 말이오.”
적송이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었는가?”
“모를 뻔했소.”
“허허허. 자네는 진정 대단하네. 일신우일신이라, 그만한 경지에 오르고서도 또 한 계단 올라섰단 말이지?”
“올라선 건 아니오. 오히려…….”
“퇴보한 것 같겠지. 하지만 그건 별거 아니라네. 그저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야.”
서량이 쓰게 웃었다.
“앞도 안 보이는 분이, 참 많은 것을 보고 계셨소이다.”
“자네도 죽을 때가 되어 보게.”
“살날 창창한 젊은이한테 할 말이오?”
“허허허.”
서량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노선배가 내게 건네준 것은, 노선배의 깨달음이 집약된 진기의 덩어리였소.”
“며칠 전, 자네 표정을 보아하니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더구먼.”
“의도가 읽히지 않는 기운은 영 껄끄러워서 말이오.”
“허허. 걱정하지 말게. 나로선 자네를 해칠 방법이 없으니까. 다만, 앞으로 자네가 가는 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했네. 그저 그것이 전부야.”
“그거면 되었지 뭘 더 주겠다고 본교에 귀한 영기를 뿌렸소.”
호요성, 소연심 그리고 교내 마인들이 봤던 황금빛 기운의 정체.
그것은 바로 적송의 영기였다.
그의 영기는 천마신교 전체를 누빌 정도로 광대했다. 일찍이 수많은 수행자가 영력을 단련했지만, 이 정도로 크고 짙은 기운을 연련한 사람은 몇 없었다.
“자네들 덕에 커졌다네.”
“무슨 말이오?”
“내 영기 말일세. 평생을 단련한 것보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성장한 게 훨씬 더 컸다네.
불에 물 몇 방울을 뿌리면 더 크게 타오르는 법이지. 자네들의 존재는 그와 같았네.”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생각해 보니, 자네에게만 선물을 주기는 아쉽더군. 그렇다고 그 많은 사람을 일일이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그리했네.”
적송의 목소리가 아련해졌다.
“마인들은 신앙을 위해 제 한 몸 불사르길 주저하지 않는다네.
그래, 그것으로 충분한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할 말은 없네. 다만, 그들은 자네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싸움을 거쳐야만 해.
개개인의 목적보다는 신교의 목적을 위해 생사(生死)를 걸겠지.”
“……그렇겠지.”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원하고 있을 걸세. 그러나 나는 앞으로 그들이 겪을 무수한 죽음과 슬픔을 위로하고 싶었네.
얼마 되지 않는 기운이지만, 그들의 마음에 한 줄기 온풍(溫風)이나마 불어넣어 주고 싶었어.”
“…….”
“그저 그것이 전부였다네.”
서량이 눈을 감았다.
적송은 신화에 오르지 못했다. 그가 죽으면 영육(靈肉)이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그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생 모은 영기를 마인들을 위해 기꺼이 퍼트려 준 것이다.
물론 그 영기가 마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것이다. 무공이 성장하지도 않을 것이며, 성정에 변화를 주지도 못한다.
다만, 그들의 의욕을 조금 더 부채질해 줄 것이며 슬픔에 사무칠 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약간의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스스로의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는 아픔, 그 아픔의 무게를 약간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적송은 평생을 가꾼 영기를 전부 흩뿌려 버린 것이다.
신화에 이르지 못한 자. 그러나 그 자비심만큼은 부처의 경지에 다다른 자.
“미안하오.”
“자네가 미안할 게 무에 있는가. 내 멋대로 저지른 일일세. 오히려 말도 없이 그런 짓을 해서 내가 미안하지.”
적송이 명쾌하게 말했다.
“영기를 흩뿌리며 새삼 느꼈다네. 그래, 마인도 사람이구나.
강호는 무인을 정사마(正邪魔)로 나누었지만, 결국 그들 모두가 피와 살을 뒤집어쓴 사람이야. 자비와 동정은 사람을 가려 가며 발휘되지 않는다네.”
적송이 서량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마치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정확한 시선이었다.
“자네 덕분일세.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속세의 때가 묻어 잊고 있던 자비심을 다시 꺼내 들 수 있었던 것은, 다 자네 덕분이야.”
“노선배.”
“그러니 내게 고마울 것도, 안타까워할 것도 없네.”
그때, 하얀 손이 적송의 손을 잡았다.
보지 않아도 그것이 누구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적송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서윤이구나.”
“대사님.”
주서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과거의 그녀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적송이 그녀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네 사형은 큰사람이다. 그의 밑에서 많이 배우거라.”
“……네.”
“옳지.”
적송이 현천에게 말했다.
“이보게 말코.”
“……말씀하시게.”
“자네 혼자 득도하면 안 되네. 먼저 가 있을 테니, 하늘에 오르지 말고 따라오게.”
현천진인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 과한 거 아닌가?”
“허허.”
“걱정하지 말게. 지금 내 꼴을 보니, 득도는 요원한 듯싶네.”
“도에서 멀어졌음을 자각하는 것. 그 또한 깨달음이지. 자네는 하늘에 오를 수 있을 걸세.”
적송의 호흡이 점차 잦아들었다.
눈을 감은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삶이 덧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제때 살리지 못한 하나의 생명이 아직도 눈에 밟히는구나.”
그렇게 적송의 호흡이 멎었다.
현천진인의 주름진 눈에 눈물이 고이고, 주서윤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호요성이 한숨을 쉬었고, 의원들의 얼굴에도 비탄의 기색이 어렸다.
‘잘 가시오, 노선배.’
적송은 서량이 본 사람 중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었다.
평생 세상을 위해 살았음에도 더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고귀하게 살았음에도 제때 살리지 못한 생명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이었다.
서량은 적송이 극락왕생하기를 바랐다.
지옥 같은 사바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나 만인을 빛으로 이끄는 부처가 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