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태풍을 불러오다 (4)
“교주를 만나고 싶네.”
“마음은 정하셨습니까?”
“그렇다네.”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쿠궁!
대전의 문이 열렸다.
태사의에 앉은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나?”
“그렇다네.”
주청의 신색은 며칠 사이에 몰라보도록 좋아져 있었다.
굽은 허리는 당당하게 펴졌고, 얼마 남지 않았던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풍성해졌다. 안광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심지어 체격까지 좋아진 듯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본교의 숙수들을 애먹였다고 들었는데, 그 값을 하는군. 낯빛이 몰라보게 좋아졌어.”
주청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대전을 시원하게 울렸다.
“남부의 음식이 입에 맞더군. 고생한 숙수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덕분에 기운을 차렸어.”
“저쪽으로.”
잠시 후, 다탁 위에 술병 하나와 잔 두 개가 놓였다.
“이 술은 뭔가?”
“금존청.”
“구하기 어려운 술이로군. 중원 멀리서 가져왔을 텐데.”
“그다지 어렵진 않아.”
서량이 주청의 잔에 술을 따랐다. 주청 역시 서량의 잔을 채워 주었다.
“얼마 만에 마셔 보는 술인지 모르겠군. 한잔하세.”
“그러지.”
두 사람이 시원하게 잔을 넘겼다.
“크, 좋구먼. 속이 싸한 게 아주 괜찮아.”
서량이 잔을 놓으며 물었다.
“해서, 마음을 정했다고?”
주청이 피식 웃었다.
“기실, 정하고 말 것도 없었네. 어차피 안 한다고 해도 자네들은 날 이용할 것 아닌가.”
“맞는 말이야.”
“그럴 바에야, 다시 한번 생의 장절한 날개를 펼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으이.”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교를 국교로 받아들일 텐가?”
“그 외의 선택지를 주지도 않았으면서 뭣 하러 다시 물어보는가? 그럴 수밖에 없지.”
“하긴, 그도 그렇군.”
“다만 내가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은 하나뿐일세.”
“뭐지?”
주청의 얼굴에 진지한 빛이 어렸다.
“그걸로 만족하는가?”
“무엇이?”
“제국의 국교가 되어 천하를 일통하고 무림을 장악하겠다.
말하자면 그것도 마도천하(魔道天下)라 할 수 있지만, 총군사의 얘기를 곱씹어 보니 단순히 거기서 끝날 것 같진 않아서 말이네.”
서량은 주청의 안목에 감탄했다.
호요성은 총군사답게 화술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상대가 황제든 뭐든, 자신의 속내는 보여 주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원하는 것만 빼내는 것에 능했다.
한데 주청은 그런 호요성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꼈다고 한다. 그 하나만 봐도 주청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나?”
“단도직입적인 걸 좋아하는 성격인 것 같은데, 내가 틀렸나?”
“그거 좋아하지.”
서량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황궁을 잡아먹을 생각은 없지만, 살아 있는 신(神)이 될 생각은 있어.”
“살아 있는 신이라…….”
“황제를 천자(天子)라고들 하지. 하늘의 아들, 그러니 하늘 아래(天下) 모든 것이 황제의 것이야.
그러나 그보다도 높은 신에게는 그 황제마저도 고개를 조아려야 하지.”
주청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가 황제가 된들 상관없다고 한 말의 뜻이 그거였나?”
“그래.”
무시무시한 야망이었다.
천하를 손에 넣는 것은 물론이요, 마도 무림의 신(神)이 아닌 중원의 신(神)이 되겠다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마도천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량을 노려보던 주청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감당키 힘든 사내로군.”
“내 스승도 가끔 그리 말씀하셨지. 감당키 힘든 놈이라고.”
“스승이라…… 그 소문 자자한 구대천마를 말함인가?”
“들어 봤나?”
“아니 들어 볼 수가 없지. 들어 본 것을 넘어, 실제로 보기도 했다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사부님을 본 적이 있다고?”
“말 안 해 주던가? 언제더라…… 아마 삼십 년도 훌쩍 지난 과거였을 걸세. 한참 황궁의 세력 확장을 꾀하던 시절, 그를 만날 수 있었지.”
“놀랍군.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
“생각해 보니 그럴 것도 같네. 당시에 직접 본 그는 말수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어.
그저 끝없는 위엄과 절대적인 자신(自信)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받았지.”
“대화는 나눠 봤나?”
“나누지 못했네. 다만 그가 남긴 한마디는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지.”
“뭐라 하셨는가?”
주청이 씁쓸하게 말했다.
“집은 잘 지킬 놈이군.”
“…….”
“딱 그 한마디만 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집은 잘 지킨다? 황궁의 주인으로서는 부족함이 없는 그릇이지만, 천하를 도모할 만한 인재는 아니라는 소리다.
참으로 사부님다운 한마디였다.
“굳이 고백하자면, 난 그때 큰 충격을 받았네. 황궁에도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 많아.
한데 그 많은 고수의 눈을 모조리 속이고 들어와서, 그 한마디만 남기고 가 버리다니? 이 어인 무례이고,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인가.”
“…….”
“잊을 순 없지만, 애써 잊고 있었지. 중원에는, 저 무림에는 저런 괴물들이 판을 치고 있구나. 그걸 깨닫게 해 준 사람이었다네.”
“그렇군.”
“그로부터 몇 년 뒤에 황궁의 세력 확장을 멈추었네. 더 커지면 무림 세력들의 견제를 받을 것 같았거든.”
“알 것 같네.”
주청의 눈이 빛났다.
“한데 지금, 그 마신(魔神)의 제자는 황제를 짓밟고 서서 살아 있는 신이 되겠다고 말하는구먼.”
“씁쓸한가?”
“아니 씁쓸할 수 없지.”
“그래도 동맹을 맺을 생각인가?”
주청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서량은 그의 고뇌를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주청이 말했다.
“자네, 그거 알고 있나?”
“뭘?”
“역사상, 황궁이 이 정도로 힘을 잃은 사례는 없었다네. 힘을 잃어 가는 즉시 반란이 일어나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고 성씨가 다른 황제가 천하를 지배했지.”
“하긴, 그도 그렇겠군.”
“달리 말하면, 무림의 세력들이 중원을 차지한 덕에 황제의 핏줄이나마 유지하게 된 셈일세.”
“흥미로운 관점이야. 제법 비참하기도 하고.”
“그 비참함을 안고 말하겠네.”
주청의 목소리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황궁은 놔두게.”
“무슨 의미지?”
“자네가 신이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네. 기실, 내게는 그걸 막을 힘도 없지만 말이야.”
“그래서?”
“적어도 황궁의 권리는 인정해 주었으면 하네. 내 다음 대, 차기 황제들은 교주를 신으로 모시겠지만, 천마신교가 황제를 정하지는 말아 달라는 걸세.”
서량이 피식 웃었다.
주청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무림 세력을 등에 업는다 한들, 황궁이 예전만큼 제 성세를 찾기는 어려운 실정이지.
내 아들놈은 그것도 모르고 저 무도한 이들과 손을 잡은 것 같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아.”
“확실히 댁네 아들내미는 분에 넘치는 욕심을 품은 것 같더군.”
“맞네. 내 자네에게는 녀석을 아들이라 했지만, 패륜을 저지른 놈을 아들이라고 여기지 않네.
그리고 나로선, 비(妃)와 궁(宮)이 없는 상황에서 또 다른 적통을 만들 힘도 없네.”
“무슨 의미지?”
“양자(養子)를 들일 걸세. 능력이 되는 양자를.”
서량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양자라…….”
“내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았지만, 내 성씨를 물려줄 만한 인재를 찾아볼 생각이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한 번 무너진 핏줄은 얼마 안 가 스러지게 마련이야. 내 양자가 될 녀석을 찾는다면, 그 녀석 역시 다음 대 황제를 제 자식에게 물려주지 못하게 할 생각이네.”
“……호오?”
주청이 담담하게 말했다.
“대통(大統)을 잇는 자,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야. 이 세상에 고귀한 핏줄 따위는 없네. 핏줄이 황궁의 위엄을 세워 주진 않아.”
“…….”
“능력이 없는 자, 황제의 자격이 없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보듬을 수 있는 능력이요, 희생정신이야.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나고 자라는 법이니,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네.”
서량은 얼떨떨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그럴 생각인가?”
“내 선조가 이 제국을 건설했다고 생각하나?”
“…….”
“내 선조는, 원래 있던 제국을 강탈한 것에 불과해. 위대한 정신? 애국지심? 그런 거창한 이유는 없었네.
그저 힘으로 황위를 찬탈하고, 새로운 황궁을 건설했을 뿐이야.”
“…….”
“내 이런 꼴을 당하고 나니, 다시는 이처럼 비참한 황제가 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일세.”
주청이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 이상적인 계획인가? 하지만 난 이게 옳다고 보네. 자네가 말했었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들,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랬지.”
“자네는 실로 배울 만한 사람일세. 내가 살아 봤자 얼마나 오래 살겠는가.
남은 생, 황궁의 권위를 되찾고 이 나라가 지속될 수 있도록 이 자리에서 최대한 노력할 뿐이네.”
서량의 눈이 빛났다.
“그래서 황위 이양에 관여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한 건가?”
“그렇다네. 기실, 자네도 알지 않나? 신(神)은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야. 그저 군림하는 존재지. 그래서 황제가 누가 됐든 상관없다고 말한 거 아닌가?”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접근해선 진정한 마도천하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한다.
‘책임이라…….’
신에게는 책임이 필요 없다. 그저 군림할 뿐이다.
그 책임은 모두 황제가 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다소 민망하지만 편한 길이 될 수 있다.
‘어려운 길과 쉬운 길. 진정한 마도천하와 신(神)으로서 존재하는 길.’
어렵다. 어려운 문제다.
그 어려운 문제에 주청은 직격탄을 날렸다.
“자네는 황제가 되고 싶은 겐가, 아니면 신이 되고 싶은 겐가?”
물끄러미 주청을 바라보던 서량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신으로 남고, 본교의 마인들에겐 천하를 안겨 주고 싶을 뿐이지.”
주청이 허허롭게 웃었다.
“좋은 것만 골라서 먹고 싶다는 것이로군.”
“나는 편식이 심한 편이거든.”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말은 알겠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그가 창가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었다.
“다만, 이런 문제는 일단 중원을 어지럽히는 저 머저리들부터 쓸어 버린 후에 고민해도 괜찮지 않나 싶어.
설령 저놈들을 지금 당장 쓸어 버리더라도 한동안은 세상이 혼란스러울 테니까.”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계획은 필요하다네.”
“그 계획, 천하일통지계를 완성했지.”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황제를 핏줄이 아닌 능력으로 선발한다? 다소 꿈같은 얘기지만, 자네의 그 진심 어린 목표는 응원할 만하다고 생각하네.”
“…….”
“천하를 안정시키고 난 이후,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해 보세. 이 부분은 더 많은 얘기가 필요할 것 같네.”
“자네 말이 맞네.”
“동맹 체결인가?”
주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나 역시.”
마도 무림의 총본산, 천마신교.
제국의 총본산, 황궁.
마침내 두 세력의 수장이 손을 잡았다. 천하일통을 위한 거인들의 연합이었다.
“그나저나, 동맹이 되었으니 술자리라도 크게 갖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주청은 알고 있다는 듯 물었다.
“옥새(玉璽)를 말함인가?”
서량이 눈을 빛냈다.
“그래. 자네를 데려오는 데에 급해서 옥새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지만, 그 옥새가 저쪽에게 있는 한…….”
“저쪽에게도 없을 걸세.”
“엉?”
주청이 여유롭게 말했다.
“만일 저 역적 무리가 옥새를 갖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겠는가? 당장 더 많은 세력을 규합하여 이쪽을 치려 들지 않았겠나?”
대단한 안목이었다. 평생 힘이 약한 황제로 살았지만, 그 안목은 천하에 이르러 있었다.
“그럼?”
“내 아들내미는 한순간에 저리 변한 게 아닐세. 서서히 욕망에 물들어 갔지. 그 변화를 가장 빨리, 그리고 확실히 느낀 것은 바로 나일세.”
서량이 눈을 빛냈다.
“옥새를 빼돌렸나?”
“나만 아는 장소에 두었다네.”
“거기가 어디지?”
“그것이…….”
주청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자네들, 배 한 번 더 타도 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