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운명이 부르다 (5)
‘뭐지?’
기종의(起鐘依)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눈으로 한 무리를 포착하기에 앞서, 그들의 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잔잔하다. 날을 세운 이가 있기는 하지만 임전(臨戰) 태세는 아니야.’
설마?
‘기다리고 있었다고? 우리를?’
그럴 리가 없다.
황제가 납치된 이후, 용(龍)의 진정한 주인께서는 경각심을 늦추지 않으셨다. 그래서 정보에 있어서만큼은 어떤 단체보다도 예민하게 다루고 있었다.
즉, 이쪽에서 움직인다는 정보가 새어 나갈 리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쪽은 자신들이 접근하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기(氣)가 그러했다. 잔잔한 기는 마치 호수와도 같았다. 제아무리 부동심을 얻었다 한들 이토록 파랑(波浪)이 없을 수가 없었다.
‘긴장해야겠군.’
잠시 후, 그가 관도에 들어섰다.
“드디어 오셨구먼.”
관도 맞은편, 거대한 나무에 기댄 규격 외의 야수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야수의 배에 반쯤 눕듯이 앉은 청년과 그 옆에 선 강력한 고수들도.
그들이 풍기는 기가 너무나도 무겁고 강렬해서 한편에 세워진 마차의 존재는 한참이나 뒤에 깨달았다.
“참나, 이런 게 소위 선술(仙術)이라는 건가? 긴가민가했는데 진짜였잖아? 신안(神眼)이니, 뭐니 하면서 사기 치는 줄 알았더니만 엄청 성능 좋은 눈일세그려.”
알 수 없는 말을 뱉는 자는 야수의 배에 기대어 앉은 청년이었다.
훅.
무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마찬가지로 한 걸음 다가서려던 기종의가 움찔했다.
“정체를 밝혀라.”
묵직하게 깔리는 저음.
약간의 탁성이 섞인 목소리가 실로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발했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요, 광기에 미쳐 날뛰는 것도 아닌데 등골이 다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굉장하군. 저자는 누구지?’
마교 측 신상 명세를 전부 외워 뒀지만, 그중 저와 같은 자는 없었다.
기종의가 마동필을 바라보았다.
‘저 검사는 마동필이라 하였다. 마교주의 오른팔이며 밀착 호위. 얼마 전, 철혈성의 신창과 수십 합을 겨룬 고수라 했지.’
강력한 검사다.
신창 언극은 천하십대고수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자였다.
비록 해상전(海上戰)에선 온갖 변수가 난무한다지만, 여하튼 수십 합을 겨룰 정도면 저자 역시 극마의 고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지금 그와 마주 선 기종의가 가장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누구보다도 화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음에도 먼저 눈이 가지 않은 것은, 이곳에 있는 고수들의 면면이 너무나도 화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저 백색일색(白色一色)의 미청년 역시 무시하기 힘든 고수임은 분명했다.
전해져 오는 서늘한 기파가 가히 압권이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여럿 봤지만, 그중 누구보다도 생기 넘치는 압박함을 전해 주고 있었다.
‘여강휘. 북해빙궁의 소궁주. 그리고…….’
기종의의 눈이 깊어졌다.
그의 눈이 붉은 전포를 입고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장대한 체구의 청년에게 향했다.
‘염라!’
마교주, 십대천마 서량.
청년의 얼굴임에도 도저히 청년처럼 보이지 않는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일렁이는 존재감이 태산과도 같아서, 마치 수십 년간 강호를 종횡한 노고수를 보는 듯했다.
서량의 미소가 서늘해졌다.
“이봐.”
“…….”
“우리 대호법님께서 여쭤보시잖아, 누구냐고.”
“……?!”
무담의 표정이 단숨에 어색해졌다. 적과 대치한 와중에도 농담 같은 한마디로 긴장을 풀어 버렸다.
기종의가 헛기침을 했다.
“귀하가 마교주요?”
어색해졌던 무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쾅!
기종의의 의복 자락이 펄럭였다.
차차차창!
기종의 뒤에 도열해 있던 수룡병(水龍兵)들이 제각기 무기를 뽑아 들었다.
물론 의미 없는 짓이었다. 무담의 공격은 경고성이었고, 두 번 내지를 생각은 없었다.
“언사를 똑바로 하라. 이분께서는 십만마도의 대종주, 본교의 십대천마이시다. 너 따위 놈이 함부로 입에 올릴 이름이 아니야.”
후욱.
무섭도록 파고드는 기파였다.
가만히 서 있을 때도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의 압력을 자아냈지만, 작정하고 기세를 방출하니 상상을 초월하는 위압감을 전해 준다.
수만 근 바위가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짓눌려 터져 버릴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기종의는 저도 모르게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발 앞, 한 치 거리에 거대한 검흔(劍痕)이 나 있었다. 횡의 길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이가 엄청났다. 마치 무저갱 끝까지 파고들 것 같은 검력이었다.
주르륵.
기종의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렀다.
‘강하다!’
수주(水主)로서 수왕(水王)의 호칭을 받은 그였다.
대다수의 천룡칠주와 달리, 그는 실제로 조화지경에 오른 강력한 고수였다. 칠요집전술이 완성된 순간, 그의 깨달음도 무극(武極)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격이 달랐다. 다른 잔재주 없이, 오롯이 수주로서의 능력을 깨달음에 녹여 구사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전투력…… 대규모 전투에서는 내가 낫겠다만, 일대일 결전에서는 불리해.’
기종의의 눈이 빛났다.
‘과연 마교의 대호법이란 것인가?’
그때, 서량이 입을 열었다.
“신기한가?”
기종의가 서량을 보았다.
서량이 끙차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
“왔으면 할 말 해라. 아! 대호법 말마따나 건방진 언사는 금물이야. 나야 괜찮다만, 우리 대호법께서 워낙에 열혈이시거든. 까딱 잘못하면 너희 목 날아갈 수도 있다.”
기종의의 눈빛이 돌변했다.
‘강하다.’
후욱.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공기가 뒤바뀌었다.
그저 자세를 바꾼 것만으로도 대기가 요동치는 것 같았다. 기종의는 내심 긴장하며 말했다.
“천룡칠주, 칠요의 대사제 중 수주(水主)를 맡은 기종의라 하오.”
스스로를 천룡칠주라고 분명하게 칭한다. 지금껏 만나 왔던 대사제들과는 달랐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호남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용케도 여기까지 왔군.
하긴, 수백만 대군이 일자진을 형성한 것도 아니니, 정보를 받았다면 여기까지 침투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을 거야?”
“…….”
“그래, 기 수주께서는 어인 일로 예까지 오셨는가?”
담백하다.
적장을 대하는 군주의 자세라고 보기 어려웠다. 특히나 두 집단처럼 뿌리 깊은 증오로 얽힌 관계라면 더더욱.
기종의가 포권을 취했다.
“제 주군을 보러 가시는 길이라면 직접 안내해 드리고자 왔소.”
순간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담사영이?’
놀랍다.
의중을 떠보려고 보낸 줄 알았다. 그랬다면 바로 잡아서 목을 뽑았을 것이다.
그것이 담사영의 방법이었다. 전력을 보내 적의 반응을 살피고 의도를 들여다보는 것.
보낸 전력이 죽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 죽을지, 전투의 양상은 어떠한지, 무엇을 전하고 죽을지를 전부 보고 파악하는 사람이 담사영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떠보기가 아닌 손님을 모셔 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이쪽의 의도를 꿰뚫어 본 것인가? 평소 담사영이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에 서량조차도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그렇군.’
이 시국에 마교주가 세상에 나왔다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다. 그러나 의도를 읽을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예전처럼 병력을 파견해 의중을 떠보는 정도로는 부족한 것이다. 그러다가 의천맹이 와해되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변했군.’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변했듯 늙은이도 변한 거야.’
다른 말로는 성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성장이든 퇴보든, 그 정도 위치에 오른 자가 변화를 꾀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변화 없이는 천하를 발아래 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네 주인이라면 담사영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소이다.”
“흐음.”
이 또한 떠보기다.
떠보기임과 동시에 초대였다. 자신이 있으면 언제든 와 봐라.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그때, 무담이 입을 열었다.
“교주님.”
“음?”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적의 수괴가 무슨 함정을 준비했을지 모르는 판국입니다.”
기종의의 눈이 깊어졌다.
“제 주군께선 적을 섬멸키 위한 전략 전술에 한계를 두지 않는 분이오. 그러나, 적군의 수장과 만나는 자리에까지 함정을 설치할 만큼 비겁한 분은 아니외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너의 말은 의미 없어. 너야 네 주군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만을 볼 테니까.”
그리고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기종의가 말을 이었다.
“혹, 자신을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니라면 이 말을 전해 달라 하셨소.”
“말?”
“전쟁을 치르든 평화로 나아가든,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할 사이이니, 기왕 나오신 김에 와서 차나 한잔 드시고 가시오.”
“…….”
“제 주군께서 직접 전하라 하신 말씀이오.”
한 번은 만나야 할 사이라…….
“하하하!!”
서량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갑작스러운 웃음이었다. 거의 폭소에 가까웠다.
무담과 마동필, 여강휘가 깜짝 놀라 서량을 보았다. 그들은 서량이 저리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이라고? 그래, 한 번이지.’
그는 더 이상 증오에 휩싸인 괴물이 아니었다. 한은 풀지 못했지만, 한에 휘둘릴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자신이 담사영을 만나게 될 때는, 반드시 놈을 죽이게 될 때다.
한데 놈은 그게 싫단다. 어차피 한 번 만나야 할 사이라면 지금 만나자고 한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한다.
그 사실이,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담사영의 눈이 우스웠다.
동시에 기뻤다. 지나친 살기로 인해 사신(死神)으로서의 혼(魂)을 유지하던 자신이, 이제는 진정한 마신(魔神)으로서 군림할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한참 동안 웃음을 터트리던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마.”
“명민하신 결정이오.”
“네 주인이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지부터 말해 준다면.”
기종의의 눈이 깊어졌다.
“직접 모셔다드리기 전까지는 말씀드리기 곤란하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야말로 스스로의 임무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게나. 전쟁 준비까지 하고 있는 양측의 수장들이 만나는 자리일세.
그곳이 어디인지도 미리 말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그곳으로 가겠는가?”
“겁을 드신 것이오?”
무담과 마동필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겁나지. 담사영, 그 구렁이 같은 인간의 준비성은 충분히 위협적이거든.”
“…….”
“말해 주지 않을 텐가? 그렇다면 이번 만남은 취소일세. 이만 가 보게나.”
물끄러미 서량을 보던 기종의가 입을 열었다.
“호북성 무당산이오.”
“무당산?”
“그렇소.”
서량이 마차를 힐끔거렸다.
“그렇구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무당산의 경치가 그리도 좋다는데, 구경 삼아 가 보도록 하지.”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내린 판단이었다. 너무 선뜻 결정해서 농담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자, 우리도 슬슬 일어나자고. 알아서 데려다준다는데 우리야 편하지. 아!”
서량이 기종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말일세.”
“……?”
“굳이 여럿일 필요는 없잖나?”
“무슨 말씀이오?”
그때였다.
퍼어어어억!
기종의가 입을 쩍 벌렸다.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오십 수룡병들의 몸이 두 쪽이 나 버렸다. 천마도(天魔刀)의 이기어도(以氣馭刀)였다.
후우웅.
무려 오십이나 되는 고수를 일격에 쳐 죽인 서량이 천마도를 쥐곤 어깨에 걸쳤다.
“길잡이 보낼 시종이야 하나면 충분하거늘 뭣 하러 줄줄이 딸려 보냈는지. 그 양반은 이런 게 문제야. 쯧쯧.”
“……!!”
“뭐 해? 길 잡아.”